Round 394. 노장의 품격
좌아악-!
공에 맞은 그물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관중석에서 크게 함성이 일어났다가, 이내 아쉬움과 안도의 탄성으로 바뀌었다.
「옆 그물! 옆 그물입니다! 몹시 아쉬워하는 Kim. 포르투갈 선수들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 같은데요.」
위기를 모면한 이후로도 포르투갈은 한국의 맹공에 쩔쩔맸다.
특히 공격의 시발점이 되어야 할 마리우 콜루나가 이준영과 차태성, 박승옥 등에게 번갈아 압박을 당하면서 최전방으로의 패스 공급도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
“이쪽으로 패스해!”
“나도 볼 공급을 거들어 줄게!”
보다 못한 그라샤와 시모에스가 콜루나 가까이 와서 공을 받아 공격의 활로를 개척했다.
하지만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한국 선수들이 공이 가는 쪽으로 모여서 포위망을 구축하고, 두세 명이 압박을 가해 공을 빼앗아 냈기 때문.
“또 한국의 공격이다!”
“이번에는 캡틴 리야! 캡틴 리가 직접 치고 올라가고 있어!”
공을 몰고 포르투갈 진영으로 넘어온 준영.
그는 앞쪽의 조윤옥에게 패스해 주고, 빠르게 상대 박스를 향해 달려갔다.
그의 쇄도에 맞춰 조윤옥은 정확하게 리턴 패스를 보냈다.
“존 Y. 리다. 막아!”
“저 원숭이 자식 다리를 분질러 버려!”
제르마누와 모라이스가 준영을 막아섰다.
어깨로 거칠게 밀어붙이며 공을 노리던 제르마누의 발이 시원하게 허공을 차 버렸다.
그리고 드래그 백으로 제르마누를 뿌리친 준영의 뒤로 모라이스의 태클이 날아들었다.
발바닥이 들여다보이는 높은 태클.
하지만 준영이 잽싸게 방향을 전환하는 바람에 모라이스의 태클은 헛되이 잔디를 긁고 지나갔다.
“앗! 아앗…….”
모라이스의 눈에 돌아선 준영이 슈팅을 날리는 모습이 비쳤다.
파앙-!
발등에 제대로 차인 공은 골대 하단 구석으로 날카롭게 꽂혔다.
페레이라 골키퍼가 손을 뻗었지만, 공은 그보다 빠르게 골라인을 넘어갔다.
「2 대 0, 전반 18분 또 한 골 추가하는 한국! 기세가 정말 무섭습니다!」
“이준영이다! 이준영이 추가 골을 넣었어!”
“역시 축구왕!”
“Wonderful, Captain Lee!”
“Pride of Korea, Pride of United!”
기쁨과 놀람의 함성이 구디슨 파크를 뒤흔들었다.
거대한 태극기가 또 한 번 붉은 물결 위에서 춤을 추는 사이, 포르투갈 선수들은 멍하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
“아니, 이게 말이 돼?”
“이해할 수 없군. 경험이나 기술은 분명 포르투갈 선수들이 우위에 있을 텐데…….”
“컨디션 난조 탓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현장에 있던 포르투갈 축구인과 기자들은 현재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마리우 콜루나가 봉쇄당하고, 아우구스투와 에우제비우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될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브라질이나 서독 같은 축구 강국이 아닌 한국 따위를 상대로!
“혹시 드라마틱한 역전승을 보여 주려고 일부러 당하고 있는 걸까요?”
“저 녀석들 표정을 보라고. 저게 일부러 당하는 놈들의 표정인지?”
벤피카에서 지도했던 수제자들의 활약을 보러 왔던 벨라 구트만.
그는 한국을 상대로 허둥대고 있는 포르투갈 선수들을 보며 한숨을 토했다.
“아무리 경험과 기술이 우세하면 뭐 하나. 상대의 의도에 놀아나고 있는데.”
“그 말씀은… 지금 포르투갈이 꼬레아의 전술에 말렸다는 겁니까?”
“제대로 말렸지.”
두꺼운 중원과 강한 수비 조직력, 빠르게 공수 전환을 해내는 놀라운 기동력.
한국은 자신들이 잘하는 플레이를 펼쳐 보이며 포르투갈이 정신 차리지 못하도록 조이고 후려치는 중이었다.
당연히 상대의 플레이에 말려든 포르투갈은 자신들의 장점이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고.
“제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상대의 꾐에 넘어가거나, 자기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 무너지기 마련이야.”
반대로 약체라 해도 자신의 장점은 최대화하고, 단점은 감추거나 보완할 수 있다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다크호스와 언더독의 맞대결이라 하지만, 포르투갈 쪽을 우세하다 보는 게 일반적이지. 즉, 한국은 져도 손해가 아니지만, 포르투갈은 그렇지 않다는 거야.”
“심리적인 여유도 꼬레아가 낫다는 거군요. 그럼 포르투갈은 이대로 무너지는 겁니까?”
“멍하니 휘둘리다 시간만 낭비하면… 저런, 저런! 콜루나 녀석, 냉정해야지!”
구트만은 콜루나가 차태성과 말다툼을 벌이는 광경을 보고 혀를 찼다.
한국 진영으로 공을 몰고 가던 중에 차태성에게 걷어차여 격분했던 것.
부상당하지는 않았지만, 경기가 풀리지 않으니 감정까지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둬, 마리우. 주장인 네가 흥분해서 어쩌자는 거야.”
포르투갈 필드 플레이어 중 제일 연장자인 제르마누가 콜루나를 만류하고 나섰다.
키 플레이어인 콜루나가 자칫 퇴장당하기라도 하면 경기는 걷잡을 수 없게 될 수 있었다.
“아직 시간은 많아. 그러니까 차근차근 풀어 보자고.”
“쳇, 알았어요.”
감정을 가라앉힌 콜루나가 프리킥을 처리했다.
하지만 마음을 완전히 다잡지는 못했던 걸까.
토히스의 머리를 겨냥했던 프리킥은 그대로 훌쩍 골대를 넘어가 버렸다.
그 광경에 구트만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좀 더 천천히, 침착하게 찼어야지.”
좀 더 냉정하지 않으면 지금 경기 흐름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콜루나, 아니 그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그걸 깨닫고 조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반격에 나서는 한국. 캡틴 리의 패스가 미드필더 Park을 거쳐 리틀 리에게 전달됩니다!」
중계 카메라가 냉큼 이희택 쪽을 비췄다.
오늘 경기 벼락 선제골의 주인공.
그리고 1965-66시즌 맨체스터 시티의 1부 승격에 공헌한 황색 돌풍이 거침없이 포르투갈 문전으로 돌파해 들어갔다.
「리틀 리, 힐라리오를 제치고 슛… 아, 제르마누에게 차단당했습니다. 위기를 모면하는 포르투갈.」
제르마누까지 제치려 했던 이희택.
하지만 이번에는 제르마누가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았다.
희택의 페인트 동작을 읽고, 능숙하게 공을 빼내며 앞으로 나왔다.
“이 대머리 자식이!”
희택은 곧장 달려들어 공을 빼앗으려고 했다.
골 욕심 때문만은 아니다.
공격수가 바로 압박을 해 줘야 우리 편 수비가 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다.
준영에게 그리 배웠기에 제르마누에게 달려들어 어깨로 밀쳤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까불지 마라, 꼬마야!”
“크억!”
이희택을 튕겨 낸 제르마누는 중앙선으로 전진해 나갔다.
앞쪽에서 박승옥이 견제하고 나섰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필드를 차분하게 쓸어 보았다.
“뭐 해요, 제르마누 형님! 빨리 패스를……!”
“서둘 거 없어!”
다그치는 힐라리오에게 손을 들어 올린 제르마누.
그는 패스해 달라는 듯 제스처를 보내는 콜루나를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근접해 있는 존 Y. 리도.
‘콜루나는 무리야. 그럼 다른 선택을 해야지.’
그가 결심을 굳힌 순간, 박승옥이 과감하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제르마누는 침착하게 그의 마크를 뿌리치고, 앞으로 더 전진해 나갔다.
“세상에, 진짜 바위 같잖아.”
제르마누에게 밀린 박승옥은 혀를 내둘렀다.
몸싸움을 굉장히 잘한다던 준영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들었던 것보다 발이 느려. 충분히 저지할 수 있어.’
박승옥은 다시 한번 제르마누를 마크했다.
하지만 그 전에 제르마누는 전방으로 롱 패스를 건넸고, 굶주린 흑표범의 앞으로 떨어졌다.
‘위, 위험해!’
에우제비우가 달려 들어오자, 박중환과 김정석이 황급히 막아섰다.
하지만 맹수 같은 몸놀림으로 그들을 제친 에우제비우는 한국 문전 앞에서 강슛을 날렸다.
“우와앗!”
몸을 날리는 골키퍼 함흥철.
그를 지나친 슈팅은 골대 옆을 스쳐 갔다.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유세비오의 강슛!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빗나가 버렸습니다.」
포르투갈 응원단은 아쉬운 탄성을 내뱉으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벨라 구트만은 박수를 보냈다.
“그래, 바로 그거다. 그렇게 하면 돼!”
오투 글로리아 감독이 기용을 망설였던 제르마누.
그의 발끝에서 경기가 전환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
에우제비우의 강슛이 터지긴 했지만, 경기 흐름은 쉬이 바뀌지 않았다.
포르투갈이 득점을 얻은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공격을 시작으로 포르투갈은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측면에서 Jung의 크로스! 하지만 제르마누가 헤딩으로 끊어 낸 볼을 페레이라 골키퍼가 가볍게 잡아 냅니다. 실점 이후 제르마누의 수비가 좋은데요.」
제르마누가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자, 파트너인 비센테 루카스나 모라이스, 힐라리오도 안정감을 되찾았다.
그들은 한국의 빠른 공격을 침착하게 막아 내고, 반격도 차분하게 진행해 나갔다.
“서둘지 마! 충분히 주변을 살피고 움직여!”
“차근차근 풀어 가는 거다! 패스도, 슈팅도!”
포르투갈은 지공이라고 할 정도로 천천히 경기를 진행했다.
초반의 실점을 만회한다고 허둥지둥 속공을 펼쳤지만, 그것은 상대의 장단에 놀아나는 결과만 불러왔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흐름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포르투갈을 건져 올린 건 노장 제르마누.
그 역시 초반에는 한국의 장난에 놀아났지만, 경험이 많은 만큼 문제를 빠르게 파악했다.
제르마누는 일단 수비진을 안전하게 조율하면서 중원까지 전진하며 패스 공급을 거들었다.
“덕분에 마리우 콜루나가 짐을 덜 수 있게 되었지. 공격도 좀 더 다양하게 전개할 수 있게 되었고 말이야.”
초반과 달라진 포르투갈의 플레이를 보며 구트만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공격에 변수가 많아지면 수비는 힘들어지기 마련.
포르투갈 선수들의 뛰어난 기량과 경험들은 이런 다양한 공격 전개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좋아, 점점 제 모습을 되찾고 있구만. 이제 흐름을 바꿀 결정적인 한 방만 터지면…….”
구트만의 시선이 그 한 방을 터트릴 만한 선수에게로 향했다.
사냥감을 찾아 배회하다 기회가 오면 번개같이 달려드는 필드의 맹수.
하지만 흑표범 에우제비우에 주목하고 있는 건 구트만뿐만이 아니었다.
에우제비우의 활약을 누구보다 잘 아는 준영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북한도 3 대 0으로 이기고 있다가 저 녀석에게 영혼까지 털렸지. 절대 눈을 떼선 안 돼.’
준영은 언제든지 마크할 준비를 하는 한편, 박중환과 김정석에게도 사인을 보냈다.
이미 한 차례 아찔한 상황을 경험해 봤던 두 수비수는 준영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특히 악바리 기질을 가진 박중환은 에우제비우의 그림자인 양 졸졸 따라다녔다.
「경기가 잠잠해진 가운데, 포르투갈이 공을 잡는 횟수가 늘어났습니다. 그라샤가 시모에스에게 패스. 시모에스, 한국 문전으로 크로스를 올려 줍니다!」
바로 쇄도하며 공을 향해 뛰어오른 토히스와 에우제비우.
하지만 둘은 이준영과 박중환의 견제 때문에 공을 건드리지 못했다.
터치라인 쪽으로 떨어지는 공을 김효가 잡아챘다.
바로 돌아서서 걷어 내려는 순간, 아우구스투가 그를 밀쳐 내고 공을 빼앗았다.
“저거 파울…….”
김청남은 아우구스투가 김효에게 손을 쓰는 것을 봤다.
하지만 심판의 휘슬은 울리지 않았다.
***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가장 유명한 오심이라면 결승전 제프 허스트의 골입니다만, 그 외에도 꽤 자잘한 것들도 있었습니다.
1조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3차전 경기에서 나온 바비 찰튼의 골이 오프사이드로 판정받은 것도 있고, 3조에서는 펠레에게 더블 백태클을 날린 주제 모라이스가 퇴장은커녕 경고조차 듣지 않은 일이 있었죠.
잉글랜드-아르헨티나의 8강전에서 아르헨티나 주장 라틴이 석연찮은 이유로 퇴장을 당했고, 결국 아르헨티나가 졌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이를 두고 ‘세기의 도둑질’이라 부를 정도로 격분했지요. 사실상 이때부터 두 나라가 원수지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독과 우루과이의 경기에서도 심판이 슈넬링거의 핸들링 파울을 넘어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우루과이 선수들은 이 판정에 격분했고, 수비수 호라시오 트로체가 우베 젤러와 말다툼 끝에 폭력을 행사하다 퇴장당하는 등, 자멸하고 말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