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91화 (391/400)

Round 391. 나는 아직 배고프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새하얀 둥근 공을 향해 있었다.

박승옥의 발에서 떠난 공은 박스 밖으로 달려 나온 준영의 앞으로 굴러갔다.

그리고 오른발을 축으로 돌아선 이준영이 왼발로 강하게 공을 때렸다.

제대로 힘이 실린 슈팅은 유성처럼 골대를 향해 날아갔다.

골키퍼가 반응할 틈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골망이 크게 흔들린 순간, 경기장에서 우레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Unbelievable!”

“It’s a miracle!”

믿을 수 없는 상황에 흥분한 관중들.

하지만 가장 열광한 이들은 역시 한국 응원단이었다.

“우와아아아! 골! 골이다!”

“으하핫! 2 대 0! 2 대 0이라고!”

하늘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 듯한 벅찬 기쁨과 감동.

그 감정을 느끼는 건 손에 못이 박인 노동자도, 책벌레 유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구세대라 하여도 예외는 아니었다.

“들어갔구나! 들어갔어!”

“마, 마마!”

득점한 순간 벌떡 일어난 순정효황후는 그 자리에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다.

이렇게나 기뻐하는 황후를 본 건 처음이었던 상궁들은 당황하는 와중에도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 대한민국이 이기고 있습니다! 더 힘차게! 끝까지 응원합시다!”

신중현의 외침에 다 같이 함성으로 대답한 한국 응원단은 박수 치며 크게 함성을 터트렸다.

“대- 한민국! 대- 한민국!”

기쁨과 벅찬 감정이 실린 우렁찬 함성이 아이레섬 파크를 흔들어 댔다.

중계 카메라 앞에서 보란 듯이 골 세리머니를 펼쳤던 준영은 응원단의 함성을 듣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하하핫! 그래, 이 소리지. 이게 진짜 승리의 함성이라고!”

마치 21세기의 월드컵에서 뛰고 있는 기분.

부상의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고, 전신에 힘이 펄펄 넘쳐흘렀다.

“자, 승리의 9부 능선까지 올라왔다! 끝까지 버티자!”

“예, 필승 대한! 필승 코리아임다!”

기운차게 뛰어가는 태극 전사들.

최정민은 후배들의 대견한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계속 눈가에 차오르는 이슬에 시야가 흐려지곤 했기에.

“최 코치…….”

“하하하, 선생님, 꿈에서나 보던 광경을 진짜 보게 되었는데 왜 자꾸 눈물이 날까요.”

벅찬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수제자를 도닥여 주던 김용식은 다시 필드로 눈길을 돌렸다.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 낸 대한의 건아들에게 경기장 조명이 환하게 쏟아졌다.

마치 오늘 경기의 주인공들을 축복해 주는 것 같았다.

***

「후반전도 어느덧 40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스코어는 여전히 2 대 0으로 한국이 리드. 이탈리아가 이기고 있는 게 아닙니다.」

중계 캐스터가 믿기 힘든 결과를 시청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는 가운데, 이탈리아의 공격이 진행되고 있었다.

파게티가 전진하며 찔러 준 패스가 준영의 발을 스치며 마졸라에게 전달되었다.

앞으로 공을 툭 치며 김정석과 김청남을 뿌리친 마졸라.

하지만 그가 달려들어 슛하기 전에 함흥철이 잽싸게 공을 잡아챘다.

「땅을 치는 마졸라. 한국의 방어가 만만찮은 가운데, 이탈리아는 어떻게든 골을 넣으려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정말 필사적이었다.

실점을 감수하고 골키퍼까지 스위퍼 지역까지 전진해서 공격을 지원할 정도.

다른 수비수들은 이미 중앙선을 넘어 미드필더처럼 뛰고 있었다.

‘질 수 없다!’

‘이대로 조별 리그에서 탈락해서 귀국하면…….’

이탈리아 국민들은 축구대표팀에 대해 엄청난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AC 밀란과 인테르나치오날레가 유러피언 컵을 제패하며 이탈리아 축구의 저력을 보여 주었기에, 다시 한번 월드컵 챔피언이 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었던 것.

시작은 좋았다.

하지만 꽃길 같던 조별 리그는 순식간에 가시밭길, 아니 수렁으로 변해 버렸다.

시간이 갈수록 짓눌러 오는 패배의 기운은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좌절감을 넘어 공포심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그 공포심은 순간적으로 초인적인 능력을 발동하게 만들었다.

“어엇!”

“막아! 저 스파게티 자식, 빠져나간다!”

우당탕하는 중원의 볼 다툼에서 공을 빼서 나온 파게티가 슛을 쏘았다.

30미터 거리에서 날린 대포알 중거리 슛.

얼마나 빨랐는지 함흥철은 몸을 날릴 틈도 없었다.

까앙-!

세차게 골포스트를 맞히고 튀어나오는 공.

리베라가 달려들며 슛을 했지만, 대기권을 돌파할 기세로 솟구쳐 버렸다.

“Che Cazzo!”

리베라가 자신들에게 등 돌린 승리의 여신을 저주하고 있을 때, 준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와, 이놈들, 눈 돌아가니까 스팀팩 맞은 것처럼 미쳐 날뛰네.”

“주장, 스팀팩이 뭡니꺼?”

저도 모르게 21세기 용어를 내뱉었던 준영에게 김효가 물음을 건넸다.

“그게… 각성제 말이다.”

“아, 절대 하믄 안 된다 캤던 몹쓸 거 말이지예?”

“그래, 아무튼 전열 정비하자. 시간이 얼마 안 남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니까.”

준영은 서둘러 수비를 조율하며 이탈리아의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골이 절실했던 이탈리아는 최전방에 5명을 전진시키며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공을 잡으면 문전으로 크로스를 올려 일제히 쇄도해 들어가 골을 노리는 전술이었다.

「란디니가 측면에서 크로스! 파게티가 뛰어들지만, 캡틴 리가 먼저 끊어 냅니다. 한국의 골문은 끝까지 열리지 않습니다.」

마침내 정규 시간이 멈추고, 심판의 재량으로 주던 추가 시간도 4분가량 흘러갔다.

“빨리 끝내시오! 더 볼 것도 없다고!”

터치라인 가까이 나온 윈터보텀 감독은 손목에 찬 시계를 가리키며 심판에게 빨리 경기를 종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힐끔 시계를 보았던 심판이 마침내 종료 휘슬을 불었다.

“이겼다!”

“대한민국 만세에-!”

한국 코칭스태프와 오늘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던 후보 선수들이 일제히 필드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얼싸안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승리를 기뻐하는 한국 선수들.

이들과 다르게 나락으로 떨어진 이탈리아 선수들은 울음을 터트리거나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4조 3차전, 한국인들이 명백한 운명을 걷어차 버렸습니다. 정말 두 눈으로 봤음에도 믿기 힘든 이변이네요.」

경기장에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대한민국의 함성.

영국 관중들도 기립해서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에 이겼습니다!”

경기장을 돌며 관중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한국 대표팀 선수들은 마지막에 한국 응원단 앞으로 와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신나게 응원가를 부르며 승리를 만끽했다.

“자자! 마지막으로 신나게 뛰어 보자!”

“아, 전에 말한 그거 하는 겁니까?”

“그래! 그거 할 거야. 다 같이 꼭 하고 갈 거라고!”

준영의 말에 대표팀 모두가 손을 잡고 필드 위를 뛰었다.

그러다 잔디 위로 다이빙하며 쭉 미끄러졌다. 그리고 다시 반대편으로 내달리며 다이빙.

시간을 거슬러 온 레전드 플레이어에 의해 2002년에 있었던 승리의 뒤풀이가 36년 앞당겨 벌어졌다.

1966년 7월 19일.

이날은 모두가 잊지 못할 한국 축구 승리의 날이 되었다.

***

“어, 이겼네?”

“이겼어! 이태리를 이겼어!”

“세상에 2 대 0이래!”

7월 20일 아침.

호외와 함께 라디오, TV에서 전한 속보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 국민들을 열광 속으로 몰아넣었다.

1차전 소련을 상대로 1무를 했을 때만 해도 대단히 선전했다고 생각했는데, 승리를 거두다니!

그것도 월드컵 우승 팀 이탈리아를 상대로!

축구에 관심 없던 이들도 이 쾌거를 자신의 일인 양 기뻐했다.

그러나 이 상황이 난감한 이들도 있었다.

“주모! 우리나라 이기면 오늘 막걸리 공짜랬지?”

“야 이놈 김 가야, 우리나라가 이기면 돼지 잡아서 동네 잔치한다더니 뭐 하고 있냐?”

기쁨을 만끽하는 건 높으신 분들도 마찬가지였다.

김홍일 대통령은 곧바로 미들즈브러로 전화를 걸어 승리를 치하했다.

“정말 잘했소! 우리나라가 세계 8강에 오르다니, 정말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오!”

(예, 대통령 각하. 그 기념적인 쾌거에 제 이름을 남길 수 있어 기쁩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윈터보텀 감독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내일 소련과 칠레의 경기가 남아 있지만, 이미 한국의 8강 진출은 확정되었다.

현재 1승 1무 1패인 한국은 3득점 2실점으로 골 득실에서 +1.

현재 소련은 1승 1무에 골 득실 +1이고, 칠레는 1승 1패에 골 득실 –1이다.

어느 쪽이 이기든 한국은 2위 확정.

칠레가 이기면 소련은 골 득실에서 뒤져서 3위로 떨어지고, 설령 둘이 비긴다 해도 칠레는 골 득실에 변동이 없으니 3위에 그친다.

“8강에서 싸울 상대가 포르투갈이라고 하던데 맞소?”

(예, 저희와 같은 시간에 리버풀에서 포르투갈과 브라질이 시합을 해서 비겼습니다.)

이 경기는 풋볼 리그에서 득점왕을 다투는 펠레와 에우제비우가 맞붙어 화제가 되었다.

브라질은 전반에 시모에스와 에우제비우에게 연달아 실점하며 패색이 짙었다.

하지만 리버풀 팬들의 열성적인 응원에 힘입은 펠레가 연속 골을 터트리며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후반 28분 브라질의 힐두가 역전 골을 터트렸으나, 종료 직전 에우제비우의 동점 골이 터지며 무승부로 끝났다.

결국 포르투갈이 2승 1무로 1위, 브라질이 1승 2무로 2위를 하며 두 나라가 8강에 올랐다.

“브라질을 따돌리고 1위를 하다니, 포르투갈 축구도 꽤 강한가 보구만.”

(예, 이번 대회 다크호스입니다.)

“그렇군. 아무튼 이번 일로 우리 국민들 모두가 불가능은 없다는 사실과 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소. 부디 남은 경기도 최선을 다해 주시오.”

(예, 한국 국민들이 더 큰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통화를 종료했다.

“8강 진출이라……. 정말이지 아주 큰 소득을 얻었어.”

김홍일이 볼 때 이번 월드컵의 가장 큰 소득은 윈터보텀이 말했던 희망.

앞으로 재건과 발전을 이뤄 가야 할 대한민국 입장에선 이번에 정말 소중한 보물을 얻었다고 할 만했다.

‘희망이 없는 나라는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발전할 수 없는 법이니까.’

그렇기에 김홍일은 앞으로도 축구에 대한 지원이 계속될 수 있게 노력할 생각이었다.

아니, 축구뿐만 아니라 다른 스포츠 종목들, 그리고 국민들이 희망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모든 부문이 지원될 수 있게 손을 쓰리라 마음먹었다.

***

이탈리아전을 마친 다음 날.

한국 대표팀 훈련장으로 수많은 취재진이 찾아왔다.

그들을 본 한국 선수들은 히죽 웃음을 지었다.

“1차전을 하기 전에 완전히 썰렁했었는데…….”

“참 나, 무시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저런대?”

“크크, 나갈 때 목에 힘주고 고개 빳빳하게 들고 가야지.”

잠시 후, 회복 훈련이 끝나자 기자들이 대표팀에 벌 떼같이 몰려들었다.

“이번에 선전한 비결이 뭡니까?”

“한국 선수들의 지치지 않는 체력의 비결에 Ginseng이라는 신비한 약초가 있다는데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그건 도핑이 아닌지?”

“이번에 잉글랜드도 미드필드를 강화하는 전술을 펼쳤는데 전술적으로 양국의 교류가 있었는지요?”

여러 가지 잡다한 질문들이 날아드는 가운데, 준영은 가디언의 기자가 날린 질문에 주목했다.

“리 선수, 지난번에 궁극적인 목표는 우승이라고 했는데, 그 마음엔 변함이 없습니까?”

“물론입니다.”

단호한 답변에 기자들은 누구도 비웃음을 짓지 못했다.

이미 대한민국 대표팀은 모두가 예상하던 명백한 운명을 부숴 버렸으니까.

“절대 8강에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잠시 뜸을 들이던 준영은 이제 네덜란드에서 선수 생활을 슬슬 시작하고 있을 미래의 명장이 했던 말을 빌려 왔다.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니까요.”

***

러시아 월드컵 당시에 호기를 부렸던 어느 식당의 이벤트입니다.

뭐, 저때 망했을 것 같진 않습니다만……^^;;;

실제 2002 월드컵 당시에 히딩크호가 4강에 가는 바람에 ‘샤이닝 로어’라는 온라인 게임 하나가 망한 적이 있긴 합니다.

이벤트 의상으로 유저들에게 한국 대표팀 유니폼이 풀렸는데, 이게 한국 대표팀이 이기면 방어력이 상승하도록 되는 바람에 유니크급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게임 밸런스가 그대로 망해 버렸죠.

물론 망한 데는 이것 말고 다른 요인도 있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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