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90. 상처 입은 맹수
기자들의 카메라에 슈퍼맨처럼 몸을 날리는 조윤옥이 잡혔다.
제대로 걸린 다이빙 헤딩슛은 이탈리아 골망을 시원하게 흔들었다.
“이런 맙소사…….”
“골! 골인!”
“으하하! 대한민국 만세!”
다들 놀라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가운데, 한국 기자들만 신나서 껑충껑충 뛰었다.
그것은 한국 응원단 쪽도 마찬가지였다.
골이 들어간 순간 다들 펄쩍 뛰어오르며 기쁨의 함성을 내지르며 얼싸안았다.
“세상에! 들어갔습니다!”
“마마! 우리 선수들이 선제 득점을 했나이다!”
순정효황후를 모시는 상궁들도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윗전을 모시는 사람답게 경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어느새 경기에 완전히 빠져든 상태였다.
그러다 골이 터지자, 고양된 감정이 터지고 만 것.
늙은 황후도 제법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그래도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진정들 하여라. 마냥 좋아하기는 이르니라. 아직 시합이 끝난 것은 아니지 않느냐.”
“예, 마마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너무 기뻐 소인들이 추태를 보였나이다.”
쑥스러워하는 상궁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황후는 응원단 선두에서 신나게 대한민국을 외치고 있는 이석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도움이 되긴 된 모양이구나.”
그녀의 시선은 필드 쪽으로 향했다.
이탈리아 선수들이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사이, 골을 넣은 조윤옥과 한국 선수들은 펄쩍펄쩍 뛰고 얼싸안으며 기뻐하고 있었다.
“자식, 해냈구나! 잘했어! 정말 잘했어!”
“진짜 거기에 윤옥이 형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노마크 슈팅이 골키퍼에게 막히는 거 보고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는데…….”
월드컵 우승국 이탈리아를 상대로 선제골.
한국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성과를 올린 선수들은 쉬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에 준영이 나서 그들을 진정시켰다.
“자자, 아직 경기 중이다. 각자 위치로 돌아가. 이제 상처 입은 맹수가 달려들 거다.”
“알겠습니다, 주장!”
한국 선수들이 신나게 자기 진영으로 되돌아가자, 이탈리아 선수들은 센터 스폿에 공을 놓고 킥오프 준비를 했다.
「전반 26분, 한국이 선제골을 넣으며 앞서가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놀라 까무러칠 일인데요. 이탈리아가 이대로 침몰하고 마는 걸까요?」
중계 캐스터의 말투에는 고소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과거 하이버리 전투 등으로 잉글랜드 역시 이탈리아 축구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으므로.
영국 관중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킥오프를 하는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조롱 섞인 야유를 보내다, 한국 쪽이 공을 잡으면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쳇, 카운터 한 방 먹었다고 우리가 무너질 줄 알아?”
“5분 만에 동점 골을, 아니 역전 골까지 넣어 주겠어!”
자존심이 제대로 구겨진 이탈리아 선수들은 무서운 기세로 공격에 임했다.
***
상처 입은 맹수.
자존심을 제대로 구긴 이탈리아의 플레이는 준영이 표현한 그대로였다.
마졸라의 슈팅이 한국 골대 옆을 살짝 스쳐 간 것을 시작으로, 이후 리베라와 바리손이 박스 안으로 돌파해 들어와 슈팅을 날려 댔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슈팅은 골대를 넘어가거나, 수비수들의 육탄 방어에 맞고 튕겨 나왔다.
‘훗, 성급하군. 마음이 그래서는 공이 골대로 들어가지 않아.’
하지만 이탈리아가 성급해졌다고 마냥 좋지는 않았다.
중세식 축구, 칼치오 스토리코를 할 때의 버릇이 나오기 시작했으므로.
그들은 돌파하는 한국 선수를 향해 발을 높이 들거나, 공중 경합에서 팔꿈치를 휘둘러 댔다.
그건 부상을 안고 뛰는 준영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빡-!
“크윽!”
중원의 공중 경합에서 지아친토 파게티가 거칠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박치기를 맞은 준영은 잔디 위로 나동그라졌다.
그 광경에 멀리서 보는 준영의 가족들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 아빠…….”
“괜찮아, 안나. 아빠가 다치진 않았나 봐.”
준영은 금방 털고 일어났다.
다행히 충돌한 부위가 정면이 아니라 옆머리인 데다 보호대를 한 덕에 충격이 적었기 때문.
“우! 우우!”
“야 이 스파게티 자식아! 축구장에 왔으면 축구를 해!”
관중들의 야유와 비난이 파게티에게 쏟아졌다.
부상을 안고 뛰는 선수에게까지 위협적인 파울을 가하다니. 너무 비열하지 않은가.
파게티 본인도 뒤늦게 그 점이 부끄러웠던지 낯빛을 붉혔다.
「이탈리아가 슬슬 본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리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한국 선수들…….」
성질이 불같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차태성도 이탈리아의 더티 플레이에 말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할 테면 해보라는 듯, 도발의 손짓을 보였다.
“이탈리아가 거칠게 나오는데도 한국이 경기 조율을 잘하는군요.”
“캡틴 리도 좋지만, Park이라는 하프백도 잘해 주고 있어.”
경기를 보러 온 영국 축구인들은 박승옥의 플레이를 칭찬했다.
돋보이지는 않지만, 묵묵히 공수에서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으므로.
물론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얄밉기 짝이 없었다.
‘솔직히 존 Y. 리는 버거워. 하지만 이놈이라도 봉쇄하면 공격이 좀 더 수월하겠지.’
그리 판단한 포글리와 불가렐리는 이준영을 제쳐 두고 박승옥에게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뭐야, 왜 갑자기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인 건데.’
박승옥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주변에 있는 정강지, 임국천과 패스를 주고받으며 상대의 견제를 적절히 뿌리쳤다.
‘승옥이가 만만해 보였나 본데, 호락호락하진 않을 거다.’
준영은 자신의 콤비인 박승옥을 믿었다.
재능이 그리 화려하진 않지만, 성실하고 노력을 많이 하는 선수였으니까.
특히 주도면밀한 성격이라 상대 팀에 대한 분석도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당연히 포글리나 불가렐리 등 이탈리아 선수들의 플레이 패턴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이탈리아 미드필더들은 매번 허탕을 칠 수밖에.
‘제길, 쥐새끼 같은 녀석!’
주변 동료들을 이용해서 매번 위기를 벗어나는 박승옥의 플레이에 불가렐리도 약이 바싹 올랐다.
그는 더욱 거칠게 박승옥에게 달려들었다.
‘참 나,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박승옥도 계속 달려드는 불가렐리가 성가신 건 마찬가지.
그래서 기회가 오면 제대로 혼쭐을 내리라 마음먹었다.
「페라니, 한국 진영 왼쪽 측면을 노리고 들어갑니다. 하지만 앞을 막아서는 Kim. 뒤에서 가세한 Jung이 공을 가로채 Park에게 넘겨줍니다. 한국의 역습 기회!」
박승옥이 전방으로 달려가는 정강지에게 리턴 패스를 보내려는 순간, 그림자 하나가 사납게 덮쳐 왔다.
‘이런, 또 덤비는군.’
불가렐리가 날리는 높은 태클.
미리 예상한 박승옥은 슬쩍 흘려 내면서 불가렐리의 위로 쓰러졌다.
누가 봐도 태클에 걸린 선수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우두둑-!
“으아아아악!”
섬뜩한 소음과 함께 터져 나오는 불가렐리의 처절한 비명.
심판은 황급히 경기를 중단시켰고, 양 팀 팀 닥터들이 부랴부랴 달려왔다.
“승옥아, 발목 괜찮냐?”
“예, 뭐……. 저보다 이 녀석이 더 큰일인 모양이네요.”
박승옥은 내심 당황했다.
넘어지는 척하며 적당히 깔아뭉개서 호된 맛을 보여 줄 생각이긴 했지만, 예상보다 크게 다친 것 같았으니까.
어찌나 고통이 큰지, 불가렐리는 거의 실신한 상태였다.
“왼쪽 종아리뼈가 부러진 것 같군.”
“맙소사…….”
“빨리 들것 가져와! 바로 병원으로 옮겨야 해!”
전반 42분.
오늘 경기 이탈리아의 주장으로 출전했던 불가렐리가 부상으로 이탈했다.
예상외의 악재가 발생한 이탈리아 진영에 무거운 암운이 드리워졌다.
***
빼도 박도 못한다는 말이 있다.
현재 이탈리아의 상황이 딱 그랬다.
선제골을 내주고 전반전을 마친 이탈리아는 후반에 더욱 공격적으로 나와야 했지만, 수가 부족하니 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거기다 파브리 감독은 공격에는 수완이 없지.’
교체 규정도 없으니, 준영은 이탈리아의 전술 변화가 쉽지 않을 것이라 봤다.
“아마 다재다능한 플레이어인 마졸라로 불가렐리의 공백을 메우거나, 파게티를 전진시키겠지.”
윈터보텀 감독의 이런 예측은 딱 들어맞았다.
후반전이 되자, 마졸라와 파게티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공세에서는 파게티가 전진하고, 수비 상황에서는 마졸라가 내려와서 중원의 공백을 채운 것.
그런 땜빵은 원활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리베라와 마졸라는 부지런히 찬스를 만들어 냈다.
「바이손, 돌파 시도. 14번 Kim을 제치고 슛… 하지만 골키퍼에게 잡힙니다. 차라리 뒤쪽에서 쇄도하는 마졸라에게 줬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빠진 선수의 공백은 어떻게든 메워도, 다급한 마음까지 진정시키지는 못했다.
마음이 급해지면 집중력도 떨어지고 시야도 좁아진다.
당연히 좋은 기회가 와도 제대로 살릴 수 없었다.
그건 세리에 리그를 주름잡고 있는 리베라와 마졸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빌어먹을, 한 골 넣기가 그리도 힘든 거야?”
“왜 거기서 중거리 슛을 해? 돌파해 들어가서 페널티킥이라도 얻어 내라고!”
경기 직전만 해도 승리를 낙관하던 이탈리아 기자와 응원단은 분통을 터트렸다.
자신들의 닦달이 선수들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한 골! 한 골만 넣으면 분위기를 바꿀 수 있어. 그럼 역전까지도…….’
속이 바싹 타들어 가는 와중에도 부지런히 사방을 살피던 잔니 리베라.
그는 잽싸게 한국 페널티 박스로 파고든 마졸라에게 패스를 넘겨주었다.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
하지만 마졸라는 슈팅을 할 수 없었다.
선심이 깃발을 들었으므로.
“오프사이드 트랩에 제대로 걸렸군.”
“크크크, 점마들, 똥줄 타가 어쩔 줄을 모르네예.”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이탈리아 선수들을 보며 김효가 고소한 미소를 지었다.
경기 시작할 때 보였던 거만한 기색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방심은 금물이야. 우린 겨우 1점 앞서 있을 뿐이라고. 동점 골이 터지면 분위기는 뒤집히고 말아.”
만약 무승부로 경기가 끝나면 한국은 2무 1패, 이탈리아는 1승 1무 1패다.
내일 소련과 칠레의 경기까지 봐야 알겠지만, 이탈리아는 무승부만 해도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반드시 이겨야 해.”
“걱정 마이소. 수비 단디 하겠심더.”
말보다 눈빛이 더 믿음직했던 김효.
준영은 안심하고 공격에 나설 수 있었다.
‘이탈리아 녀석들, 꽤 전진해 있군. 여기서 카운터펀치를 한 방 더 먹이면 그대로 K.O가 되겠지.’
하지만 준영과 한국 선수들은 결코 급하게 공격을 진행하지 않았다.
여유 있게 패스를 돌려 가며 상대편의 빈 공간과 동료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물론 이탈리아 수비들은 이를 두고 보지 않았다.
빨리 공을 빼앗아야 공격을 할 수 있다 보니 공이 가는 쪽으로 거칠게 달려들었다.
「캡틴 리, 왼쪽 측면으로 달려가는 Jung에게 패스. 아, 란디니가 뒤에서 걷어찹니다. 꽤 아프겠는데요.」
정강지가 쓰러지긴 했지만, 심하게 아픈 건 아니었다.
하지만 파울은 분명하고 충분히 엄살도 부릴 수 있었던 터라 한국 공격수들은 적절히 시간을 끌면서 프리킥을 처리했다.
“으아, 미치겠네, 진짜!”
“벌써 후반 30분이 다 돼 간다고! 이러다 잘못하면…….”
이탈리아 기자들은 이제 취재도 뒷전이 되었다.
그들이 애타게 성모와 신을 찾는 사이, 임국천이 찬 프리킥이 문전으로 날아들었다.
‘내가 막는다!’
파게티가 껑충 뛰어올라 헤딩으로 공을 걷어 냈다.
그 순간 그는 서늘한 기분을 느꼈다.
아까 분명히 존 Y. 리가 박스 안에 들어와 있는 걸 봤다.
그러니 헤딩 경합을 할 것이라고 봤건만, 어디로 간 것일까?
부리나케 사방을 살피던 파게티의 눈에 리바운드 볼을 슬쩍 내주는 박승옥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페널티 아크 앞에서 터닝슛을 하는 이준영의 모습도.
뻐엉- 좌아악!
폭음과 함께 하얀 궤적을 그으며 날아든 공이 골망을 세차게 문질렀다.
그 소리는 아주리 군단의 귀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큼 크게 들려왔다.
***
동북고 출신의 박승옥 선수는 화려하진 않지만 자기 포지션에서 묵묵히 할 일을 다 하는 선수였습니다.
그래서 팀원들의 신뢰가 두터웠고, 동북고에서도 주장을 맡았죠.
그런데 졸업 직후, 갑자기 해군 장교 2명이 찾아와서는 그를 납치해 가듯 진해로 데려가서는 해군사관학교에 입교시켰습니다.
당시 해사, 공사, 육사 간의 축구 대항전이 상당히 치열했거든요.
해사에서 박승옥은 준수한 활약을 보여 주었고, 교관들은 물론 교장도 무척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사관생도는 국가대표가 될 수 없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박승옥은 2학년에 진급하기 직전에 사고를 쳤습니다. 일부러 진탕 술을 마시고, 귀교 시간이 되었지만 이를 무시해 버렸죠.
바로 학칙 위반을 해서 자퇴를 노렸던 것이죠.
하지만 이건 자칫하면 퇴학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절은 퇴학=전과자 취급을 하던 시대였습니다.
자칫하면 국가대표 선발도 될 수 없었죠.
하지만 그의 목표가 국가대표라는 걸 안 해사 교장은 그의 자퇴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사에서 탈출한 박승옥은 원래 진학하기로 한 고려대로 편입하려 했는데, 이번엔 경희대에 납치당했습니다(…).
결국 경희대로 진학하게 되었고, 여기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국가대표까지 발탁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