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89. 축구 인생 최고의 순간
경기 전, 양 팀 선수들이 필드에서 예열을 하는 사이, 관중석에서는 한국과 이탈리아 양국 국민들이 한창 응원 준비를 하고 있었다.
“Forza Italia! Forza Italia!”
“Uniamoci, amiamoci~”
화려하게 장식된 모자를 쓴 이탈리아인들은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며 흥겹게 응원 구호를 외쳐 댔다.
“마치 축제를 하는 것 같군.”
“쳇, 누가 보면 벌써 이긴 줄 알겠네요.”
“저놈들, 우리나라는 간단히 이긴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지.”
한국 응원단을 선도하는 밴드 ADD4는 이탈리아 응원단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자자, 우리가 열심히 해서 선수들에게 힘을 북돋아 줘야죠.”
“석이 말이 맞다.”
“본격적으로 응원하기 전에 한 곡 당겨 보죠.”
“그래, 이준영 선수가 불렀던 것처럼 로큰롤 리듬으로 아리랑을 불러 보자고.”
세팅을 마친 ADD4가 연주를 시작하려 할 때였다.
“사동궁!”
익숙한 호통에 움찔한 이석.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하얀 한복을 입은 노파가 보였다.
“화, 황후마마!”
“이러려고 이역만리까지 왔더냐! 대체 네 포부는 어찌 된 것이야?”
설마 순정효황후가 머나먼 영국까지 납실 줄은 몰랐던 이석.
그는 납작하게 엎드린 채 진땀만 뻘뻘 흘렸다.
상황을 파악한 신중현이 냉큼 수습을 시도했다.
“저, 어르신, 아니 마마, 석이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
“그 입 다물라!”
“옙, 죄송합니다.”
위엄 어린 호통에 신중현과 밴드 멤버들은 자신도 모르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이 일련의 상황을 한국 교민들은 물론 주변의 영국인들도 뭔가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든 말든, 황후는 이석을 호되게 꾸짖었다.
“더는 생계가 힘들지도 않을 터. 대체 너는 어찌하여 잡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단 말이냐? 그리도 노래 부르는 것이 좋더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인의 노래가 누군가에게 위안과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사옵니다.”
이석의 해명에 황후의 노기가 다소 가라앉았다.
“도움이라 했더냐. 오냐, 일어서거라. 내 지금부터 네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볼 것이다.”
“예? 그럼……?”
“이 늙은이도 많은 백성들이 이 시합의 결과를 기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어디 신명 나게 노래를 불러 나라를 대표해서 싸우는 장정들에게 힘을 실어 보거라.”
“알겠습니다, 마마.”
목소리를 가다듬은 이석은 밴드 멤버들과 함께 힘차게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 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구슬프지 않고 힘찬 음색에 이끌린 교민들도 다 함께 목소리를 높여 아리랑을 불렀다.
경기장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노랫소리에 황후는 먼 옛날 일이 떠올랐다.
‘뭔가 3.1절 만세 소리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구나.’
그때의 함성이나 지금의 노래나 강한 바람을 담고 있었다.
황후는 그 바람이 이번에는 이뤄지기를, 그리고 백성들이 기뻐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
7월 19일 오후 7시 30분.
미들즈브러 아이레섬 파크 필드에 한국과 이탈리아 선수들이 진영을 갖추고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민국>
GK:함흥철
DF:차태성, 김정석, 김청남, 김효
MF:이준영(주장), 박승옥, 임국천, 이희택, 정강지
FW:조윤옥
<이탈리아>
GK:엔리코 알베르토시
DF:스파르타코 란디니, 아리스티드 과르네리, 프란체스코 야니치, 지아친토 파게티
MF:자코모 불가렐리(주장), 로마노 포글리
FW:마리노 페라니, 산드로 마졸라, 잔니 리베라, 파올로 바리손
수비를 보강한 한국은 좌우 날개에 발재간이 좋은 이희택과 체력이 뛰어난 정강지를 배치해서 역습을 노렸다.
이와 다르게 이탈리아는 상당히 공격적인 배치를 했다.
“에드몬도 파브리 감독이 그리 공격적인 성향은 아닐 텐데…….”
“오늘 경기는 반드시 잡아야 하잖아요. 거기다 2차전 결과 때문에 본국 협회나 언론에서 비난이 쏟아졌다고 하고요.”
과연 승자는 누가 될까.
이탈리아 기자들은 당연히 자국의 승리를 장담하고 있었다. 전력이나 선수 면면을 보면 한국 따위보다 훨씬 우세했으니까.
하지만 한국이 소련을 상대로 선전했던 점이 껄끄러웠다.
거기다 원래 주장이자 주전 센터백인 산드로 살바도르가 부상으로 빠진 점도 약간 우려스러웠다.
“어제 한국한테 2 대 1로 패하는 꿈을 꿨어. Ahn이란 선수가 역전 헤딩골을 넣던데…….”
“개꿈이구만. 한국 팀에 Ahn이란 이름의 선수는 없어.”
“꿈은 반대라고 하잖아. 우리가 2 대 1로 이길 거야.”
“한국 상대로 달랑 한 골 차이로 이긴다고? 최소한 3 대 0으로 이겨야지!”
희희낙락하는 이탈리아 기자들과 달리, 얼마 안 되는 한국인 기자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매만지고 있었다.
과연 승리의 여신은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줄 것인가.
삐익-!
프랑스의 피에르 슈빈테 주심이 호각을 불면서 경기가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공격수들이 한국 진영으로 달려갑니다. 불가렐리의 패스가 산드로 마졸라에게. 마졸라, 다시 리베라 쪽으로…….」
파란 상의에 검은 하의를 걸친 이탈리아 선수들 앞으로 붉은 유니폼을 입은 한국 선수들이 몰려왔다.
이탈리아 선수가 공을 잡으면 최소 2명 이상의 선수가 마크를 하고, 그 주변에 다른 선수들이 자리를 잡고 인터셉트를 노렸다.
「마졸라! 마졸라가 돌파를 시도합니다. 한국 팀 Cha를 제치고 슛! Kim이 막아서 옆에 있던 14번 Kim에게 줍니다. 오늘 한국 팀에는 Kim이 3명이나 있네요.」
이탈리아는 자국의 레전드 발렌티노 마졸라의 아들 산드로 마졸라를 앞세워 한국 문전을 두들겼다.
인테르나치오날레의 간판 공격수인 마졸라는 빠르고 다재다능한 플레이어.
그는 최전방과 미드필드를 부지런히 오가며 한국 전열을 흩트려 놓았다.
하지만 돌파나 날카로운 패스로 흩어졌다 싶은 한국의 전열은 금세 회복되곤 했다.
‘마치 벌 떼 같군.’
잔니 리베라는 한국 선수들의 움직임에 혀를 내둘렀다.
와해되는 것처럼 보여도 금방 대열과 간격을 맞추어 전환을 이루어 내는 것이 마치 군무를 추는 것 같았다.
리베라는 그 군무를 지휘하고 있는 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승옥아! 7번한테 확실히 붙어!”
“간격! 간격 조절해!”
“반대편 쪽에서 침투해 온다. 그쪽으로 공 못 가게 막아!”
소련과의 경기에서 부상당한 존 Y. 리는 눈과 코 부위를 덮는 가면을 쓰고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조로? 아니, 오페라의 유령 같아 보이기도 하고…….’
“리베라, 조심해!”
불가렐리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리베라.
자신의 발밑에 있는 공을 노리고 한국 선수가 태클을 해 오고 있었다.
“아악!”
삑-!
나동그라진 리베라는 인상을 썼지만, 못 뛸 정도로 다치진 않았다.
오히려 한국 팀 페널티 박스 오른쪽의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을 얻어 냈다.
「불가렐리가 키커로 나서는 가운데 한국 문전에 양 팀 선수들이 몰려 있습니다. 높이에서는 이탈리아가 우세해 보이는데요…….」
한국은 이준영을 제외하면 170대 선수가 많았다.
이에 반해 이탈리아는 180대 장신이 여럿, 거기다 준영이 경계할 만한 수준의 체격을 가진 선수도 있었다.
“공 온다! 사람 놓치지 마!”
불가렐리의 킥이 빠르고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공을 향해 훌쩍 뛰어오른 준영에게 푸른 유니폼 하나가 강하게 어깨를 부딪쳤다.
이탈리아 6번 풀백 지아친토 파게티.
191센티미터의 당당한 체격을 가진 그의 차지에 준영의 몸이 휘청했다.
‘이 자식, 제법이구나.’
‘아직 건재하군. 아시아의 거인 캡틴 리.’
헤딩으로 공을 라인 밖으로 걷어 낸 준영은 파게티와 잠시 눈싸움을 벌이다 이내 경기에 집중했다.
아직 위기는 끝나지 않았으므로.
***
「이탈리아의 코너킥. 문전으로 날카롭게 날아갑니다만, 골키퍼 Hahm이 가볍게 잡아챕니다.」
경기 초반 이탈리아의 공세를 막아 낸 한국은 발 빠른 조윤옥과 이희택을 이용해 역습을 시도했다.
하지만 카테나치오가 흥한 이탈리아의 수비는 약하지 않았다.
특히 4부 리그 팀을 1부 리그까지 승격시켰던 에드몬도 파브리 감독은 기본적으로 수비를 중시했다.
이렇다 보니 한국 공격진은 문전 돌파가 힘들었고, 외곽에서 중거리 슛을 쏘며 상대 수비진을 흔들어 놓으려 애썼다.
“쳇, 틈이 없네…….”
“국천아! 주장한테 보내!”
박승옥의 말에 임국천은 전진해 온 준영 쪽으로 패스를 보냈다.
하지만 준영이 패스를 받기 전 파게티가 먼저 달려들어 끊어 냈다.
“저 자식, 키도 큰데 발도 빠르다니…….”
“여러모로 주장이랑 비슷한 것 같아.”
준영처럼 발이 빠른 190대 장신에 뛰어난 수비력.
거기다 공격 가담도 적극적인 데다 슈팅 또한 위력적이었다.
또한 풀백으로 출전했지만, 상황에 따라 센터백과 미드필더 등의 포지션도 잘 소화했다.
“존 Y. 리만 틀어막으면 나머지 한국 선수들은 별거 아니지.”
파브리 감독은 마치 그림자처럼 이준영을 마크하는 파게티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준영을 시작으로 상대 주축 선수들을 하나하나 지워 나가면 한국 팀을 무너트릴 수 있으리라.
그의 작전은 잘 진행되고 있었다.
“힘내라. 밀리지 마!”
“대- 한민국!”
이탈리아의 공세에 고전하는 준영과 한국 선수들을 향해 교민들의 힘찬 응원이 쏟아졌다.
그 응원에 흔들리는 마음을 가다듬은 한국 선수들은 침착하게 상대의 공격을 끊으며 반격을 시도했다.
「리베라가 마졸라에게. 마졸라, 툭 치고 들어가다 중앙의 마리노 페라니에게 패스! 하지만 Kim이 침착하게 끊어 냅니다.」
인터셉트에 성공한 김청남은 앞에 있던 준영에게 패스를 보냈다.
그러자 파게티가 다시 귀신같이 준영에게 따라붙었다.
“계속 쫓아와 봐라, 스토커 자식아!”
준영은 공을 잡지 않고 흘려 놓고는 잽싸게 돌아서 빠져나갔다.
“우와아아!”
“그야말로 나이스 플레이군!”
노터치 트릭.
순간적인 재치에 파게티는 발이 꼬여 넘어져 버렸다.
그렇게 파게티를 뿌리친 준영은 이탈리아 진영으로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포글리가 달려들지만 어깨싸움에서 밀려납니다. 야생마처럼 질주하는 캡틴 리!」
준영의 저돌적인 돌파에 과르네리와 야니치가 동시에 마크를 붙었다.
하지만 그들이 제대로 수비해 보기도 전에 준영은 빈틈으로 파고드는 정강지에게 패스를 보냈다.
“어? 어어!”
“저……! 저거, 저거!”
이탈리아 선수들이 준영에게 시선이 팔린 틈을 타서 파고든 정강지.
그는 박스 안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슈팅을 날렸다.
골키퍼 알베르토시는 혼신을 다해 몸을 날렸다.
그는 슛이 자신의 선방에 튕겨 나온 것을 보고 안도하다, 순식간에 낯빛이 파랗게 질렸다.
리바운드 볼을 향해 한국 공격수가 몸을 날리고 있었으므로.
“으라차!”
전방에서 계속 역습 찬스를 만들던 조윤옥.
도둑처럼 슬그머니 상대 박스 안에 들어와 있었던 그는 자신의 축구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이했다.
***
이 소설을 처음 연재할 때만 해도 이탈리아가 카타르 월드컵에서 탈락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러시아 월드컵 탈락 이후 절치부심했고, 2020 유로에서 우승을 했으니까요.
월드컵 예선 전만 해도 차기 월드컵 우승 후보 1순위로 꼽히던 팀이 속된 말로 개같이 멸망할 줄이야…….
정말 공은 둥글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