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88. Hero
후반전, 대한민국 대표팀은 더욱 공세를 높여 갔다.
그리고 후반이 시작되고 5분도 되지 않아 이희택이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수비수 휴고 발라누에바의 실수를 틈타 공을 가로채 골키퍼와 일대일로 맞닥뜨린 것.
하지만 골키퍼 후안 올리바레스의 선방으로 기회는 무산.
아쉽긴 하지만, 이후에도 이희택을 비롯해 한국 공격수들은 과감한 슛과 돌파로 칠레 수비진을 계속 흔들었다.
「Cho가 Lim에게 패스. Lim, 한 명 제치고 들어가 슛-! 골대를 살짝 벗어납니다. 아깝습니다.」
한국이 저돌적으로 칠레를 몰아붙이자, 교민들도 신이 나 더욱 크게 대한민국을 외치고, 아리랑을 비롯한 응원가를 불렀다.
경기장을 찾은 미들즈브러 주민들도 함께 박수 치며 응원에 동참했다.
그렇게 경기의 흐름이 한국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준영은 오히려 우려 섞인 표정을 지었다.
“주장, 뭔가 나쁜 겁니까? 너무 전진해서 위험한 건가?”
예비 엔트리 수비수인 박영태가 묻자,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공세 상황에서 전진하는 거야 당연한 거야. 문제는 간격이 흐트러지고 있어.”
소련과의 경기에서나 칠레와의 전반전에서는 공수 간의 간격이 적절히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세에 몰두해서인지 여기저기 간격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해볼 만한 상대라 여겨지니 경계심이 느슨해진 건가. 저러면 안 좋은데.’
윈터보텀 감독도 그 점을 파악한 듯했다.
그와 김용식 코치는 터치라인 가까이 가서 선수들에게 간격을 지키라고 외치면서 사인도 보냈다.
하지만 공세에 취한 선수들은 곧장 이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
그 틈을 타서 칠레가 날카로운 반격에 나섰다.
「피게로아, 태클. 루벤 마르코스가 공을 잡아채서 치고 나옵니다. 칠레의 빠른 역습!」
한국 중원의 느슨한 간격으로 치고 나온 마르코스는 차태성의 마크도 뿌리치며 중앙선을 넘었다.
그리고 전방에 있던 공격수 레오넬 산체스에게 패스.
산체스는 한국 수비진이 오프사이드 트랩을 깔기도 전에 잽싸게 치고 들어갔다.
「산체스, 한국 박스 안까지 들어왔습니다. 한국, 위기!」
위험한 순간, 박중환이 황급히 태클로 산체스의 돌파를 막았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늦은 태클은 공이 아닌 산체스의 발목을 걸고 말았다.
삐익-!
심판이 페널티킥을 선언하는 광경을 본 준영은 이마를 움켜쥐었다.
‘아, 어째 불길하더라니.’
칠레의 키커로 나선 선수는 역습의 발판을 마련했던 루벤 마르코스.
그가 왼쪽을 노리고 찬 슈팅을 함흥철이 몸을 날려 막아 냈다.
하지만 튕겨 나온 공을 마르코스가 재차 밀어 넣으며 결국 실점을 하고 말았다.
“거참, 잘하고 있다가 저렇게 되다니…….”
곁에서 함께 경기를 지켜보던 조셉의 말에 준영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잘하고 있다고 방심하다간 저렇게 되지. 너희도 그 점을 명심해라.”
준영의 말에 예비 엔트리의 유망주들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반 26분, 칠레가 선제골로 균형을 무너트렸습니다. 전열을 재정비하는 한국 선수들, 과연 추격을 할 수 있을지?」
한국이 다시 공격에 나섰다.
볼을 점유해서 경기를 주도해 나가는 건 실점 당하기 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달라진 점도 있었다.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성급하군. 저래서는 들어갈 것도 안 들어가.’
빨리 동점 골을 넣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일까.
점점 줄어드는 시간 탓에 허윤정이나 차태성 같은 노장 선수들도 허둥대고 있었다.
“패스나 슛을 너무 급하게 처리하려고 드는군요.”
“부정확하게 날아가서 아웃되면 괜찮아. 문제는 그게 차단을 당하면…….”
준영의 말이 나오기 무섭게 루벤 마르코스가 한국의 패스를 끊고 나왔다.
공격수 호노리오 란다에게 공을 건네준 마르코스는 이후 리턴 패스를 받아 한국의 페널티 박스로 돌파해 들어갔다.
그리고 김효와 김청남을 유인해 낸 다음, 슬쩍 공을 흘리고 지나갔다.
그리고 레오넬 산체스가 달려들며 슛, 골망을 흔들었다.
「2 대 0, 칠레의 매서운 카운터 공격에 한국이 또 한 번 당했습니다. 계속 경기를 주도해 왔는데 안타깝군요.」
후반 38분.
추가 시간을 계산해도 종료까지 약 10분 정도 남았을 뿐이기에 경기를 뒤집기는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아니, 두 번째 골을 실점했을 때만 해도 낙담했지만, 오히려 칠레 쪽으로 승리가 기울자 마음을 비우게 되었다.
‘이대로 질 순 없다!’
‘질 때 지더라도 한 골을……!’
심기일전한 덕분에 한국 선수들은 침착하게 공격을 전개해 나갔다.
그렇게 계속 칠레 수비 좌우 측면을 흔들던 와중에 이희택이 찬스를 잡았다.
차태성이 건네준 패스를 발끝으로 슬쩍 띄우곤 잽싸게 칠레 문전으로 돌아서 들어갔다.
그를 마크하던 움베르토 크루즈도, 골대를 지키던 후안 올리바레스 골키퍼도 이희택의 순간적인 개인기에 반응하지 못한 채 슛을 허용하고 말았다.
「골! 한국, 추격 골! 불곰의 덜미를 물었던 극동의 호랑이, 마침내 월드컵 무대에서 첫 골을 신고합니다!」
역사적인 골이었지만 기쁨을 만끽할 틈도 없었다.
동료 공격수들과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나눈 이희택은 곧장 공을 들고 센터 스폿에 가져다 놓았다.
“잘했어.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박수를 치던 준영은 아쉬운 표정으로 스코어보드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정규 시간은 모두 끝났고, 얼마간의 추가 시간이 주어졌지만 드라마틱한 동점 골은 나오지 않았다.
차태성이 칠레 진영으로 공을 길게 차는 것을 마지막으로 심판이 종료 휘슬을 불었다.
그렇게 2차전은 2 대 1 한국의 패배로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단 한 경기…….’
8강에 오르기 위해서는 3차전 아주리 군단과 사생결단을 내야 했다.
‘거참, 여기서도 이탈리아라니.’
21세기의 북미 월드컵.
그때 16강에서 만났던 게 이탈리아였다.
‘그때 내가 결승 골을 넣고 대한민국을 8강에 올려놓았지.’
이제는 자신의 기억에만 남아 있는 미래.
그때의 영광을 이 시대에 재현해 낼 수 있을까.
흥분감에 심장이 절로 뛰기 시작했다.
***
“칠레가 꼬레아를 이겼군.”
TV 중계로 경기를 본 이탈리아 선수들은 코웃음을 쳤다.
“2 대 1이라……. 아시아 팀을 상대로 골까지 먹다니.”
“1차전에 붙었을 때 알았지. 이놈들이 지난 대회 3위를 한 건 홈 어드밴티지 덕분이라고 말이야.”
“칠레 따위에게 지는 팀에게 비긴 소련 놈들도 알 만하군.”
대다수 선수들이 희희낙락하는 가운데, 주전 공격수인 잔니 리베라와 중원의 미드필더 자코모 불가렐리는 웃지 않았다.
TV로 본 한국은 상당히 빠르고 기동력이 뛰어난 팀이었으니까.
과욕을 부리다 카운터 어택을 맞기도 했지만, 그 전까지는 수비 조직력도 괜찮았다.
“올림픽에서 봤을 때랑 달라진 것 같은데요?”
“아, 그때 꽤 끈질겼지. 비길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야.”
그때 맞붙었던 한국 선수들은 대부분 은퇴했다.
꽤 인상적이던 공격수 Choi도 한국 코치로 재직 중이라고 하고.
하지만 꽤 재능 있는 신예들이 있는 듯했다. 오늘 추격 골을 넣은 Lee라는 단신의 선수도 뛰어난 기술을 보여 줬다.
“하지만 역시 가장 요주의 대상은 존 Y. 리죠.”
“잔니 넌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맞붙어 봤다고 했지? 어땠어? 진짜 소문대로던가?”
불가렐리의 물음에 리베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유럽, 아니 세계 최고의 하프백이 틀림없어요. 얌전한 방식으론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죠.”
그때 리베라의 소속 팀 AC 밀란은 더티 플레이로 간신히 트로피를 획득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레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를 격파한 붉은 악마들을 쓰러트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거 없잖아. 캡틴 리는 출전하지 않으니까.”
불쑥 대화에 끼어든 선수는 프란체스코 야니치.
그는 불가렐리와 같은 볼로냐 소속의 스위퍼였다.
“부상 때문에 잔여 경기 출전이 불가능하단 뉴스 못 들었어? 소련 놈이 그놈 콧대를 부숴 놨다고.”
“하지만 혹시 모르는 거 아닙니까.”
“하하, 그런 염려는 일단 소련 놈들을 박살 낸 뒤에 하면 돼.”
야니치를 비롯해 대다수 이탈리아 선수들은 여유 만만이었다.
이미 1승을 거두었고, 소련만 이기면 8강 진출은 확실해지니까.
‘소련이 과연 만만한 상대일까.’
한국과 비겼다고 너무 우습게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잔니 리베라가 방심은 금물이라고 얘기해도 다들 웃어넘길 뿐이었다.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아주리 군단은 다음 날 오후 3시, 소련과 맞붙었다.
야신의 눈부신 선방에 후반 12분에 터진 이고르 치슬렌코의 결승 골.
영국 도박사들이 꼽은 우승 후보 3순위 아주리 군단의 위신은 휴지처럼 구겨지고 말았다.
***
7월 16일 2차전 경기까지 끝나면서 각 조마다 토너먼트 진출 팀들의 윤곽이 나오기 시작했다.
1조는 주최국 잉글랜드가 던컨 에드워즈와 바비 찰튼, 로저 헌트의 활약에 힘입어 2승으로 일찌감치 8강 진출을 예약해 놓았다.
2조에서는 서독과 아르헨티나가 1승 1무, 스페인이 1승 1패로 추격하고 있었기에 마지막 3차전까지 가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3조는 포르투갈이 가볍게 2승을 거둔 가운데, 브라질이 헝가리와 3 대 3으로 비겼다.
이 결과는 준영이 알고 있는 역사와 달랐다.
‘원래는 브라질이 졌을 텐데?’
브라질을 패배의 수렁에서 건져 낸 구세주는 펠레.
그는 헝가리전에서 종료 직전 2골을 몰아 넣었다.
가히 펠느님이라 불릴 만한 대활약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 역사에서 펠레는 부상과 피로 누적으로 2차전에 나오지 않았지. 역사의 변동으로 유럽에서 뛰게 되었기 때문인가?’
실제 펠레는 유럽파란 이유로 브라질 축구협회의 무식하고 가혹한 평가전 일정에서 제외되었다.
그 덕에 본선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8강에서 포르투갈이 아니라 브라질을 만날지 모르겠군.’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8강에 올랐을 때 이야기.
어떤 팀과 맞붙느냐는 걱정을 하기 전에 당장 오늘 이탈리아부터 잡아야 했다.
“정말 출전할 거야?”
3차전 출전 명단 발표를 앞두고 코칭스태프가 준영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음을 건넸다.
“제가 뛰어야 우리 팀 승률이 조금이라도 더 올라갈 게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걱정 마세요. 목뼈가 부러지고도 경기에 뛴 사람도 있었는데요, 뭘.”
준영의 말에 그 투혼의 당사자인 버트 트라우트만 골키퍼 코치가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그때는 모르고 뛴 거였어.”
“지금 저는 제 상태를 잘 알죠. 걱정 마십쇼. 여기 우리 여왕님이나 공주님을 생각해서라도 충분히 조심할 테니까.”
그리 말한 준영은 나흘 전 조셉에게 받은 보호 마스크를 얼굴에 썼다.
마스크를 끼는 걸 도와준 리즈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쾌걸 조로 같네요.”
“조로?”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거울을 보니 조로 같아 보였다.
‘유니폼 색깔에 맞게 빨갛게 칠해 달라고 할 걸 그랬나?’
그러나 이 검은 컬러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안나가 무척 좋아했다.
“아빠, 멋있어! TV에 나오는 히어로 같아!”
“하하, 그래?”
딸 바보 아빠는 히어로가 되어 보기로 했다.
후대에 전설이 될, 기적과 같은 승리를 가져올 히어로가.
“좋아, 어디 승리를 훔치러 가 보실까!”
모든 이들의 우려와 기대를 안고 준영은 필드로 향했다.
***
2002 월드컵이 끝나고, 당시 히딩크호의 영웅담을 기리는 의미에서 음반이 나온 적이 있었죠.
가수 루다가 부른 ‘Hero’라는 노래가 참 인상 깊었습니다. 뮤직비디오도 있었는데, 지금은 찾아보기 힘드네요.
저 음반의 수익금은 유소년 축구 발전 기금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나저나 저렇게 샤프하셨던 운재 형님은 어쩌다 풍만해지시고 만 건지……;;; 세월 참 무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