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87화 (387/400)

Round 387. 투혼의 마스크

1차전 경기가 끝난 후, 준영과 정병탁을 비롯해 부상을 입은 선수들은 병원에서 검사와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대부분 타박상에 그쳤고, 정병탁의 경우도 예상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염좌군요. 빠르면 1~2주 안에 회복될 겁니다.”

“휴… 그렇습니까.”

병탁의 입에서 길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심하지 않다고 하지만, 3차전까지 나올 수 없다.

그렇게 풍운의 꿈을 안고 나갔던 월드컵 본선에서의 활약이 여기까지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울적해졌다.

“한 경기도 제대로 못 뛰고 아웃이라니…….”

“이봐, 정 군! 월드컵에 나오지도 못하고 은퇴한 선수도 있어. 그런 걸로 치면 자넨 복 받은 거야.”

정병탁에게 등짝 스매싱을 날린 김용식 코치는 최정민에게 물었다.

“최 코치, 이 군의 상태는 어떤가?”

“골절이라 지금 수술받고 있을 겁니다.”

“수술이면…….”

“남은 경기 출전이 어렵겠죠.”

준영은 현재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에서 초핵심 플레이어.

그가 있고 없고에 따라 팀 전력이 달라진다.

그런 그가 더 이상 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휴, 여기까진가.”

“승점 1점이라는 성과는 올렸지만… 아쉽네요.”

1차전에서 보인 경기력 때문에 기대치가 많이 올라갔다.

앞으로 골은 물론 첫 승도 따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제 그 기대는 불투명해졌다.

“하지만 말입니다. 기적을 한번 믿어 보고 싶습니다.”

“기적이라……. 여기까지 온 것도 어떻게 보면 기적 같긴 한데…….”

두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준영의 수술이 끝났다.

준영의 가족과 한국 팀 관계자들이 한꺼번에 준영과 의사에게 몰려갔다.

“아빠, 많이 아파?”

“괜찮아. 참을 만해.”

퉁퉁 부은 얼굴에 보호대와 붕대를 두른 준영의 모습을 본 안나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 딸을 다독이며 준영은 괜찮은 척 웃음을 지었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경기에 뛸 때는 잘 몰랐는데, 아프고 답답하고 화끈거리고 미치겠군.’

그나마 다행이라면 뼈가 오른쪽 한쪽만, 그것도 잘게 부서지지 않았다는 점.

덕분에 수술이 어렵지 않게 끝났고, 회복도 빠를 것이라 했다.

“회복될 때까지 유동식을 먹도록 하고, 음주나 흡연은 절대 안 됩니다. 코를 풀거나 만지는 일도 최대한 피하도록 하고요.”

“그럼 언제쯤 뛸 수 있는 거지요?”

월터 윈터보텀 감독의 물음에 의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뛰어요? 최소 한두 달은 안정을 취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

의사의 말은 한국 팀 관계자들에게 날벼락이나 마찬가지.

대체 불가인 초핵심 플레이어가 이대로 전력에서 이탈된단 소리가 아닌가.

“저기, 우리 고향의 이웃 사람은 코가 깨져도 병원에 안 가고 그냥 나았었는데…….”

대니 블란치플라워 코치의 말에 의사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자연적인 회복이 불가능하진 않죠. 코가 휘거나 매부리코로 변형되겠지만 말입니다.”

“확실히 휘긴 했죠.”

“뭐, 회복이 덜 돼도 움직일 수 있어요. 예전에 치료했던 권투 선수 하나가 덜 나은 상태로 시합에 나갔었는데, 뼛조각이 머리 안쪽에 박혀서 죽다 살았죠.”

대니는 더 이상 대꾸할 수 없었다.

권투만큼 치고받진 않지만, 축구도 상황에 따라 격렬한 스포츠였으니까.

헤딩 경합 시 충돌하고, 상대방의 킥에 얼굴을 얻어맞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할 수 없군. 일단 존을 빼고 다음 경기에 대비하자고.”

월터의 결정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숨이 터져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건 준영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이대로 남은 경기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코뼈가 부러지고도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이 있잖아. 2002년 월드컵 때만 생각해도…….’

미래의 일이 떠오른 준영.

그는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리즈에게 부탁했다.

“조셉에게 연락을 해 줘. 내가 급하게 찾는다고.”

“알겠어요.”

리즈는 마음 같아서는 그냥 남은 경기를 포기하고 쉬라고 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심하게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이나 한국 선수들이 얼마나 땀 흘리며 준비해 왔는지 똑똑히 봤는걸.’

그들이 얼마나 큰 기대를 품고 이번 대회에 나왔는지, 가난한 조국의 사람들에게 어떤 희망을 보여 주려 하는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리즈는 준영이 뜻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리라 마음먹었다.

***

<한국, 소련과 무승부!>

<극동 호랑이에게 덜미를 잡힌 동토의 불곰.>

<명장 윈터보텀이 펼친 놀라운 마법에 세계가 경악!>

7월 13일 아침, 영국과 유럽 스포츠 매체들은 4조에서 벌어진 이변을 전했다.

한국에도 이 소식이 전해져 대한민국 국민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어서 날아든 소식에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준영이 잔여 경기 출전이 불투명하대.”

“하여간 빨갱이 놈들은……!”

“어떻게 빨리 낫게 할 방법은 없는 걸까?”

한국 정부는 그날 바로 국내 최고 의료진을 영국으로 급파했다.

사실 이들이 가 봤자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회의적인 의견이 있었지만…….

“이준영이만 대한민국 선수는 아니잖소. 나머지 대표팀 선수들이라도 잘 돌봐야 경기력이 더 나빠지지 않겠지.”

이런 대통령의 주장에 누구도 반대할 수 없었다.

한편, 월드컵이 치러지는 영국 현지에서도 준영의 부상을 두고 많은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축구는 격투기가 아닙니다. 도가 지나친 파울을 하는 놈들은 퇴장당해 마땅해요.”

1차전 불가리아전에서 선제골을 넣으며 대활약을 펼친 펠레가 소련의 더티 플레이에 대해 쓴소리를 내뱉었다.

본인 스스로도 유럽에서 활동하며 이런저런 거친 파울에 시달려 봤기에 준영의 일이 남 일 같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은 페널티킥을 얻었어야 했어요. 스페인 심판이 왜 그런 판정을 내렸는지 모르겠네요. 혹시 레알 마드리드 팬이라 그런가?”

월드컵 첫 출전 경기에서 2골을 기록한 서독의 프란츠 베켄바워는 판정에 대해 거론하며 심판을 비난했다.

그 바람에 그는 대회 조직위로부터 따로 경고를 들었다.

“나는 한국 팀은 남은 경기에서도 선전할 거라 봅니다. 그들에겐 존 Y. 리 말고도 좋은 선수들이 있고, 상당히 뛰어난 체력과 기동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한국과 맞붙어 본 야신은 칠레와 이탈리아에 경고를 보냈다.

하지만 이탈리아 언론에서는 소련의 추태를 비웃을 뿐.

7월 13일, 지난 대회에서 산티아고 전투를 치렀던 칠레를 2 대 0으로 가볍게 제압한 이탈리아는 다음 경기가 야신의 은퇴 경기가 될 것이라며 으스댔다.

“존이 남은 경기에 못 나올 거라고요? 이런, 다들 아직 그 친구를 잘 모르나 보네.”

“경이로운 사나이죠. 분명 다들 깜짝 놀라게 만들 겁니다. 난 몇 번이고 그걸 봤기에 알 수 있어요.”

잉글랜드 축구대표팀의 던컨 에드워즈와 바비 찰튼은 준영이나 한국 팀에 대해 낙관적으로 예상했다.

사실 조 편성 때만 해도 걱정을 했지만, 소련과 무승부를 거두는 것을 보고 확신했다.

뭔가 일을 저지를 준비를 해 놓았구나 하고서.

그렇게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7월 15일 한국과 칠레의 2차전 경기가 막을 올렸다.

***

「레오넬 산체스가 한국 진영을 돌파, Cha가 저지하는 틈을 타서 Park이 공을 빼내 갑니다. 한국 팀, 오늘 경기력도 좋아 보이네요.」

칠레를 상대로 한국은 팽팽하게 경기를 이어 갔다.

준영의 빈자리는 만능 플레이어 차태성이 메웠고, 오른쪽 측면 풀백에는 박중환이 출전했다.

그리고 정병탁의 위치에는 석탄공사 소속의 노장 공격수 허윤정이 출전, 부지런히 필드를 누비며 공격에 힘을 불어넣었다.

“지난 대회 3위 팀이라고 경계했는데… 생각보다 할 만한 상대군요.”

박병석 코치의 말에 김용식이 동의했다.

“그러게. 체력적으로 힘들어 보이는군.”

“우리보다 하루 덜 쉰 점이 확실히 큰가 봅니다.”

일정상 손해를 보는 칠레는 겨우 이틀 만에 2차전 경기를 치러야 했다.

거기다 한국 대표팀과 달리 영국 현지 적응도 잘 하지 못한 상황.

이런 체력적인 우위에서 한국 선수들은 상대의 공격을 잘 막아 냄은 물론, 전반 중반부터는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

“승옥이 형, 여기!”

칠레 진영 측면 뒷공간으로 들어가는 조윤옥에게 박승옥이 패스를 넣어 주었다.

조금 앞쪽에 떨어진 패스를 잡아챈 조윤옥의 앞을 수비수 피게로아가 가로막았다.

살짝 페인트를 걸어 보던 조윤옥은 돌파가 아닌 패스를 선택, 이희택에게 공을 보냈다.

하지만 희택에게 가던 패스는 칠레 센터백 움베르토 크루즈가 차단했다.

“저 움베르토라는 놈, 수비수치고 작은데도 상당히 빠르고 판단력이 뛰어나네요.”

“지난 대회 칠레를 3위에 견인한 수훈자니까.”

아직 부기가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지만, 준영은 경기장을 찾아와 예비 엔트리의 유망주들과 함께 동료들을 응원해 주고 있었다.

“수비수 맞고 나갔어요. 코너킥이네요.”

“이번에는 부디 골을……!”

임국천이 올린 날카로운 코너킥은 허윤정과 이희택이 있는 곳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칠레의 장신 센터백 엘리아스 피게로아의 헤딩에 걸리며 골 기회는 또다시 무산되었다.

“공중전은 영 상대가 안 되네.”

“준영 형님이 있었더라면…….”

현재 준영을 제외하면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에 180대의 장신 선수는 없었다.

그렇다 보니 오늘 경기에선 공격이든 수비든 높이에서 많이 고전했다.

“재헌아, 네가 잘 커야 우리도 공중전에서 제대로 비벼 볼 수 있어.”

“예, 주장. 열심히 할게요.”

현재 한국에서 희귀한 190대 장신 공격수 김재헌.

아직은 유망주에 불과한 그는 경기를 보면서 자신이라면 어떤 식으로 플레이할지 생각해 보았다.

그런 그에게 준영이 말했다.

“3조 포르투갈에 나랑 같이 뛰었던 장신 공격수 주제 토히스가 있어. 19일 날 리버풀에 가서 그 녀석이 어떻게 플레이하는지 보도록 해.”

“예? 하지만 그날은 우리 팀 경기도 있는데요?”

“응원보다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게 중요하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경기를 보는 사이, 전반전이 끝났다.

양 팀 다 득점 없이 0 대 0.

스코어보드를 보던 준영은 혹시 오늘도 골을 못 넣고 무승부가 되려나 생각했다.

‘3차전까지 0 대 0 무재배를 해 버리면… 그럼 토너먼트는 못 올라가겠군. 이탈리아가 벌써 1승을 했으니.’

3차전 이탈리아를 상대로는 어떻게 경기를 해야 할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준영은 그 경기에는 출전을 하고 싶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특별한 아이템이 필요했다.

“형님!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오, 조셉이냐? 안 그래도 기다리던 참이었어.”

준영은 자신을 찾아온 조셉 포스터를 반갑게 맞았다.

조셉은 손에 든 종이 상자를 준영에게 내밀며 말했다.

“그저께 얼굴 치수를 잰 대로 만들었어요. 최대한 가볍고 튼튼한 소재를 썼는데, 충격에 얼마나 버텨 줄지는…….”

“괜찮아. 훌륭해.”

조셉이 만들어 준 보호 마스크.

자신이 그려 준 것과 형태가 약간 다르긴 했지만, 충분히 쓸 만했기에 준영은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3차전은 어떻게든 출전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

2002년 16강 이탈리아전에서 부상을 입었던 김태영 선수가 스페인전부터 저 마스크를 하고 경기를 했었지요.

사실 저 보호 마스크는 일본 축구대표팀의 미야모토 츠네야스 선수가 먼저 사용했습니다. 이 선수는 훈련 중에 부상을 당해서 착용했다고 하지요.

당시 유상철 선수가 J리그에서 뛰면서 인맥이 있어 마스크 제작자를 수소문, 10시간 만에 제작했다고 합니다.

한때 몇몇 선수들이 빌려 쓰고 그랬는데 지금은 김태영 선수의 본가에 고이 보관되어 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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