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83화 (383/400)

Round 383. 정상 탈환

페널티 박스 안에서 대치한 준영과 펠레.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멈춰 서 있던 두 사람의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수많은 장면이 스쳐 갔다.

어떤 테크닉을 펼칠지, 그럴 땐 어떤 식으로 막아 낼지.

‘살짝 치고 들어가다 페인트를 걸고 방향을 전환하면?’

‘이 방향에서 펠레 녀석의 드리블 리듬이…….’

상대의 플레이를 예상하던 두 스타플레이어.

먼저 준영이 행동에 나섰다.

마치 사냥감을 향해 달려드는 호랑이처럼 그가 몸을 낮추자, 펠레는 발바닥으로 천천히 공을 굴리며 골대로 접근했다.

‘주장에게 가세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지, 괜한 짓을 했다간 펠레의 집중력만 흩트리게 될 거야.’

주변에 있던 선수들은 둘에게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만 공격 측인 리버풀 선수들은 시선을 분산시키려 애썼고, 방어하는 맨유 선수들은 이에 대응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렇게 숨 막히게 만드는 짧고 긴 대치는 준영이 달려들면서 끝났다.

‘어림없지!’

준영이 번개같이 발을 내밀자, 펠레는 잽싸게 공을 띄워 올렸다.

그것으로 자신을 막고 있는 거인을 제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떨어지는 공을 잡으려는 순간, 준영이 거칠게 몸싸움을 걸어왔다.

‘벌써 쫓아왔다고?’

‘내가 그리 쉽게 떨어질 줄 알았냐?’

앞서 인터셉트 시도 자체가 페인트.

펠레는 순간적으로 이준영을 제쳤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걸려든 건 본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라고!’

‘소용없다. 슈팅할 각이 없다고.’

터치라인 부근에서 다시 준영과 맞붙은 펠레.

자세를 낮추며 몸싸움에서 버텨 낸 펠레는 양발 드래그 백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척하다가 순간적으로 오른쪽 뒤꿈치로 터치, 준영의 다리 사이로 공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잽싸게 터치라인 바깥쪽으로 우회해서 드디어 준영을 뿌리쳤다.

‘됐어!’

각이 없는 상황에서 달려 들어오는 골키퍼 해리 그렉.

펠레는 침착하게 발을 뻗어 로빙슛을 날렸다.

슛의 방향이 골문에서 빗나가 버렸지만…….

‘빗나가도 상관없어!’

애초에 슈팅이 아니라 중앙에서 쇄도하는 로저 헌트의 머리를 보고 올렸던 로빙 크로스.

공을 향해 뛰어오른 로저는 텅 빈 골대를 향해 헤딩슛을 내리찍었다.

그런데 골라인을 넘기 직전, 비호같이 달려든 거인이 슈팅을 걷어 냈다.

「캡틴 리가 오늘도 유나이티드를 구원해 냅니다! 정말 아까운 기회를 놓치는 리버풀!」

리버풀 선수들은 분한 나머지 발을 굴렀다.

펠레는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준영을 째려보았다.

“빌어먹을 괴물 자식!”

“너도 만만찮거든.”

준영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펠레에게 돌파를 허용한 순간, 두뇌가 멈춰지는 줄 알았으니까.

그래도 아직 완전히 늦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몸을 날렸고, 덕분에 로저 헌트의 슛을 막아 낼 수 있었다.

「리버풀의 드로잉으로 경기가 재개됩니다. 쿠티뉴 쪽으로 전달되는 패스, 하지만 조지 코헨이 차단해 냈습니다.」

코헨의 인터셉트를 시작으로 맨유는 재빨리 역습을 시도했다.

측면을 재빨리 치고 달린 코헨은 바비 찰튼 쪽으로 패스.

힐끔 전방을 바라보았던 바비는 논스톱으로 조지 베스트에게 공을 찔러 주었다.

“이 애송이 자식!”

조지 베스트의 스텝 오버에 속아 넘어간 론 예이츠가 슬쩍 팔을 뻗었다.

어깨를 잡혀 쓰러지는 상황에서 내찬 조지의 슛은 토미 로렌스 골키퍼의 옆구리를 스치며 골라인을 넘어갔다.

“골! 베스트 골!”

“꺄아악! 조지! 사랑해~!”

전반 종료 직전, 승부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선제골이 조지 베스트의 발에서 만들어졌다.

N구역의 맨유 팬들이 신나게 날뛰는 사이, X구역의 콥스는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쳇, 기회를 놓치면 위기가 온다더니만…….”

1 대 0으로 수정되는 스코어보드를 보며 인상을 구기던 펠레.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실망스럽게 전반을 마무리했지만, 아직 후반이 남아 있으니까.

***

후반전 리버풀은 총공세로 나왔다.

전반의 실점은 그들에게 낙담이 아닌 오기를 불태우게 만들었다.

“유나이티드 놈들이 우쭐대는 꼴을 볼 수 없지!”

“반드시 버스비의 악마 새끼들을 때려잡자고!”

뜨거운 투지라는 합법적인 도핑을 시전한 리버풀 선수들은 전반보다 더욱 향상된 집중력과 몸놀림을 보였다.

부지런히 전후좌우로 뛰며 맨유의 공격을 저지하고, 슈팅이 날아오면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그 투지 넘치는 플레이에 시무룩하던 콥스도 아낌없이 갈채를 보냈다.

“잘한다! 계속 그렇게 뛰어!”

“할 수 있어! 동점도, 역전도!”

중립적인 벨기에 관중들도 리버풀 쪽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경기장 분위기는 물론 경기 흐름도 리버풀 쪽으로 기울었다.

“주장, 뭔가 폭풍우가 몰아쳐 오는 분위기인데요?”

“잘 봤다, 프란츠. 상대의 공격이 노도같이 밀려들 거다. 쓸려 가기 싫거든 정신줄 꽉 잡아.”

준영의 말에 마음을 다잡은 프란츠 베켄바워.

그는 눈을 부릅뜨고 박스로 돌파해 오는 쿠티뉴의 움직임을 살폈다.

‘절대 실점을 내주지 않아!’

반드시 승리를, 우승을 거둬 내고 말리라!

그리고 오늘의 활약을 발판으로 월드컵 엔트리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릴 것이다!

리버풀 선수들 못지않게 투지를 불태운 베켄바워는 쿠티뉴의 슈팅을 막아 냈다.

무릎에 맞은 공이 공중으로 뛰어오르자, 그는 바로 뛰어올랐다.

그 공중 경합 상황에서 로저 헌트의 팔꿈치에 얼굴을 맞았다.

‘큭, 공은……?’

다행히 공은 골키퍼 해리 그렉이 잡아챘다.

“프란츠, 괜찮냐?”

“이 정도는 문제없어요.”

흘러내리는 코피를 손으로 훔친 베켄바워는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이안 캘러헌의 패스가 펠레에게… 펠레, 우측 박스 안쪽에서 슛! 하지만 캡틴 리의 등에 맞고 골대 위로 넘어갑니다.」

계속되는 리버풀의 공격.

준영을 필두로 프란츠 베켄바워와 빌리 맥닐은 쏟아지는 슈팅과 크로스를 막아 냈다.

바비 찰튼과 노비 스타일스 역시 앞쪽에서 부지런히 리버풀 미드필더들을 견제하고 나섰다.

「쿠티뉴, 레이 윌슨을 따돌리고 중앙의 로저 헌트에게 패스! 하지만 해리 그렉이 몸을 날려 잡아챕니다.」

맨유 수비진의 드센 저항에는 골키퍼 해리 그렉의 활약도 한몫했다.

최근 다시 주전 골키퍼 자리를 되찾은 그는 장기 부상으로 뛰지 못했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 노련한 선방을 펼쳐 보였다.

“빌어먹을 악마 새끼들!”

“그만 좀 처막으라고!”

스페인에서 취재 온 기자는 리버풀 선수들의 분통을 듣고 실소를 지었다.

준결승 때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이 똑같은 말로 리버풀에 분통을 터트렸던 걸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아, 제발 한 골만……!’

‘버텨! 제발 버텨라, 유나이티드!’

양 팀 서포터들은 초조함과 조마조마한 기분을 감추며 계속 응원을 이어 갔다.

그렇게 맨유 진영에서 계속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지고 있을 즈음, 경기장 안으로 경찰 병력이 추가로 진입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는 건가?’

준영은 힐끔 스코어보드의 시계를 보았다.

후반전 남은 시간도 이제 5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때 이안 캘러헌이 날린 중거리 슛이 노비 스타일스의 팔에 막혔다.

그리고 심판은 곧장 휘슬을 불었다.

「박스 바깥쪽에서 노비 스타일스의 핸드볼 파울. 좋은 위치에서 리버풀이 프리킥을 따냅니다. 과연 최후의 순간 득점에 성공할 수 있을지?」

키커로 나온 펠레는 거리와 풍향을 살핀 후 바로 직접 슈팅을 날렸다.

크게 휘어져 날아오는 슈팅.

슈팅이 날아든 파 포스트 상단은 골키퍼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위치.

하지만 골대 앞에 대기해 있던 빌리 맥닐이 껑충 뛰어올라 헤딩으로 쳐 냈다.

“잡아! 놓치지 마!”

멀리 가지 않은 공을 향해 준영이 뛰어올랐다.

공격에 가담했던 론 예이츠와 머리를 세게 부딪쳤지만, 공을 걷어 내는 데 성공했다.

‘끝났군.’

선수들을 독려하며 경기를 지켜보던 빌 섕클리 감독.

그는 마지막 기회가 날아가자 질끈 눈을 감았다.

삐익-! 삑!

잠시 후,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길게 울렸다.

승자도 패자도, 마지막까지 몽땅 쏟아 냈던 양 팀 선수들은 필드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다 천천히 일어나 서로를 일으켜 세워 주며 유니폼을 교환했다.

그런 선수들에게 관중들의 박수가 쏟아지는 가운데, 버스비와 섕클리는 악수를 나누었다.

“승리를, 우승을 축하하오, 형제여.”

“고맙네, 섕클리. 다음에 또 정상에서 맞붙어 보세.”

“그래, 다음에는 꼭…….”

반드시 정상을 탈환하여 붉은 제국의 위엄을 만방에 떨치리라.

각오를 다진 섕클리의 눈빛이 강하게 빛났다.

***

2002년 5월 8일.

2001-2002시즌 프리미어리그 37라운드 올드 트래퍼드 원정에서 아스날은 윌토르의 결승 골로 맨유를 1 대 0으로 물리쳤다.

이 경기 결과로 아스날은 남은 1경기 상관없이 우승을 확정 지었다.

그리고 맨유는 3위, 4년 만에 처음으로 무관이라는 치욕을 당했다.

“야 이 FuXXing Seeval한 새끼들아! 성스러운 붉은 저지를 입고 이따위 경기를 해?”

파비앙 바르테즈, 라이언 긱스, 로이 킨, 폴 스콜스, 디에고 포를란, 군나르 솔샤르 등등.

세계 올스타 수준의 초특급 플레이어들은 지금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고개를 떨군 그들의 귀청으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호통과 욕설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부상으로 오늘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던 데이비드 베컴도 동료들을 위로하러 왔다가 덩달아 욕을 들어 먹었다.

“내가 너희들 때문에 은퇴를 하고 싶어도 못하겠다! 나 떠나면 허세만 들입다 커진 Seeval한 애새끼들이 팀을 똥통으로 처박아 놓을까 봐 말이지!”

“여, 진정해, 퍼기.”

“던컨 형, 나 말리지 마! 이 자식들은 욕을 처먹어도 싸다고!”

“존도 말했었잖아. 거 뭐냐, 중국의 무슨 노인네 말이던가? 좋을 때가 있으면 나쁠 때도 있다고 말이야.”

“새옹지마도 정도가 있지! 이 새끼들은 안 돼! 존 형님이 우쭈쭈 귀여워해 주니까 완전히……!”

맨유 레전드인 던컨 에드워즈와 바비 찰튼은 퍼거슨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자칫하다간 혈압이 올라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

“우리도 왕년에 트레블 후에 무관이었던 적이 있었잖아. 그러다 다시 트레블을 해냈고.”

“그때가 1966년 5월이었던가?”

“맞아. 유러피언 컵 우승하고 사흘 후에 바로 웸블리에서 FA컵 결승전을 뛰었지.”

노인네들이 영광스러운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조금은 부드럽게 풀렸다.

“생각하면 참 무식하게 축구를 했지. 교체도, 선수 보호 규정도 없고.”

“지금에 비하면 연봉도 형편없었지. 그렇게 힘들어도 다들 최선을 다해 뛰었지. 승리의 기쁨은 그 어떤 것보다 달콤했으니까.”

“요즘 젊은것들은 그런 기쁨을 모르는 것 같아. 좀 유명하다 싶으면 어디서 여자 꼬실 생각이나 하고…….”

마지막 던컨의 말에 라이언 긱스가 움찔했다.

“왜 그러냐, 라이언? 뭐 할 말이 있나?”

“아, 아니요, 선생님. 없습니다.”

“그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을 게다. 뭐, 시대가 달라지고 축구판 분위기도 달라졌다만, 선수로서 투지와 사명감을 잃지 않아야 하지 않겠니.”

그렇게 말한 던컨은 수십 년 전, 투지와 사명감이 충만했던 레전드 선수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희도 잘 알고 있겠지. 가장 암울하던 시기, 우리 팀의 주장을 맡아 정상으로 이끈…….”

‘어휴, 또 그 얘긴가.’

라이언 긱스가 유소년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존 Y. 리의 일대기.

그러나 안 들을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현재 프리미어리그 정상급 플레이어라 쳐도 수많은 업적을 일군 존 Y. 리나 눈앞의 영감님들에 비하면 자신은 그저 애송이에 불과했으니까.

***

퍼거슨 감독은 원래 2001-02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기로 의사를 밝혔었죠.

실제로 팀에서도 후임 감독 구하는 데 애를 썼고요.

하지만 그해 시즌을 제대로 말아먹었고, 데이비드 베컴이나 로이 킨 등, 핵심 플레이어들도 이런저런 말썽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무관도 무관이지만, 홈에서 여섯 번이나 패한 건 24년 만에 처음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당시 아내 캐시가 은퇴를 만류하기도 했기 때문에, 퍼거슨은 은퇴를 번복하게 되었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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