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82. 헤이젤의 결투
1964-65 유러피언 컵 왕좌에 오른 리버풀 FC.
디펜딩 챔피언인 그들은 1라운드 디나모 부쿠레슈티전을 시작으로 1965-66시즌을 열었다.
첫 경기인 부쿠레슈티 원정에서 2 대 1로 패하는 불안한 출발을 했지만, 이후 홈에서 로저 헌트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3 대 0으로 승리했다.
이후 2라운드에서 헝가리 챔피언 페렌츠바로시를 무난하게 물리쳤다.
그리고 4강부터 진짜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다.
“레알 마드리드…….”
“아, 저놈의 하얀 유니폼, 보기만 해도 토 나올 것 같아.”
클럽 하우스 내 상영실에서 리버풀의 유러피언 컵 경기 영상을 보던 준영과 맨유 선수들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스페인의 제왕 레알 마드리드.
2년 전 디 스테파노는 떠났지만, 주장인 프란시스코 헨토와 푸스카스는 건재했다.
여기에 라몬 그로소와 마누엘 벨라스케스, 아만시오와 피리 등 뛰어난 젊은 인재들에 맨유에서 활약한 알베르토 스펜서 등이 합류, 프리메라 디비시온을 휩쓸고 다녔다.
“리버풀 녀석들, 시작부터 밀리네요.”
“아만시오랑 알베르토를 제대로 저지 못하니 저렇지.”
스페인에서 마법사라고 불리는 아만시오와 알베르토 스펜서는 리버풀 좌우 측면을 휘젓고 다녔다.
결국 전반 12분 만에 피리가 골을 터트리며 레알 마드리드가 경기를 리드해 갔다.
“리버풀이 공격을 제대로 못하네.”
“와, 태클하는 것 좀 봐요. 펠리페라는 자식, 펠레를 죽이려고 작정했나 본데요?”
리버풀은 경기 내내 고전했다.
토미 로렌스 골키퍼의 눈부신 선방이 아니면 서너 골은 더 허용했을 정도.
하지만 끝까지 버텨 낸 보람이 있었다.
종료 직전, 이안 캘러헌의 패스를 받고 돌파하던 쿠티뉴가 페널티킥을 얻어 냈으니까.
펠레가 이를 깔끔하게 성공시키며, 리버풀은 마드리드 원정에서 값진 무를 캐고 돌아왔다.
그리고 안필드에서 열린 4강 2차전.
이 경기에서도 리버풀은 고전했다.
전반 20분에 아만시오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갔던 것.
하지만 후반 초반에 펠레의 번득이는 패스를 쇄도하던 로저 헌트가 골대로 밀어 넣으며 동점에 성공했다.
이후에는 완전히 난타전.
펠레와 알베르토 스펜서를 필두로, 양 팀 공격수들이 서로의 골문을 두들겨 댔다.
하지만 승부를 결정지은 이는 수비수였다.
코너킥 세트 플레이에서 리버풀의 센터백 론 예이츠가 강력한 헤딩슛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골문을 갈라 버렸다.
그렇게 2 대 1로 역전승을 거둔 리버풀은 결승에 올랐다.
“경기는 레알이 더 잘한 것 같은데…….”
“그럼 뭐 해. 정작 중요한 골을 못 넣었는데.”
“아무튼 잘 아는 놈들과 결승에서 맞붙게 되었네요.”
“저쪽도 우릴 잘 알아서 문제지.”
빌 섕클리가 제집 드나들 듯이 맨유 훈련장을 찾아온 게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마치 맨유 코칭스태프처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상대 팀을 공략할 방법을 조언해 주고, 그에 맞는 전술을 제안하곤 했다.
그랬던 만큼 섕클리 감독은 현재 맨유 전력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뭐, 우리도 저쪽에 대해 다 알고 있지만.’
리그 라이벌이다 보니, 리버풀에 대한 정보 수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멜우드에 어떤 잔디를 쓰는지, 리버풀 선수들이 어디서 뭘 하는지도 꿰고 있을 정도였다.
‘알 만큼 아는 만큼, 당일 컨디션이나 분위기가 결과에 영향을 미치겠지.’
분명한 건 어려운 경기가 될 것이라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영은 결승전이 무척 기대되었다.
물론, 한편으로 걱정되는 점도 있었기에 이에 대한 대비도 게을리하지 않기로 했다.
***
“와, 저기가 헤이젤 경기장!”
5월 11일, 브뤼셀 헤이젤 파크에 온 이희택은 감격 어린 눈으로 눈앞의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현재 한국 축구의 영웅이자 우상인 이준영이 첫 유러피언 컵을 들어 올렸던 장소.
말로만 듣던 그 전설의 현장에 왔다고 생각하니 절로 가슴이 웅장해졌다.
“어이, 리! 안 들어갈 거냐?”
“늦게 들어가면 좋은 자리 못 잡는다고!”
단짝인 콜린 벨과 마이크 서머비의 외침에 번쩍 정신을 차린 이희택은 그들과 함께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들 맨시티 트리오는 유러피언 컵 경기를 보기 위해 브뤼셀에 왔다.
아직 리그가 끝나지 않았지만, 우승이나 승격은 거의 확정된 상태.
여기에 감독도 흔쾌히 보내 주었다.
유럽 최고의 팀들이 어떻게 플레이하는지 직접 보고 배우라면서.
“미리 대비할 필요도 있는 거지. 내년 시즌에는 유나이티드, 리버풀과 맞붙게 되니까.”
“그들을 쓰러트리면… 우리도 유러피언 컵에서 뛸 기회가 오겠지?”
“유럽 최고의 대회에서 정상에 선다라…….”
맨시티의 유러피언 컵 우승.
그 웅장한 미래를 상상해 보던 트리오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어, 저건 태극기잖아.’
관중석 한쪽에 제법 큰 태극기가 날리고 있었다.
이준영을 응원하러 온 교민이 흔드는 건지, 아니면 맨유 서포터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격려하기 위해 준비한 건지.
자세한 건 알 수 없었지만, 이희택은 저도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꼈다.
“리버풀 쪽에서는 브라질 국기를 들었군.”
“저쪽은 펠레가 있으니까.”
이준영과 펠레.
맨유와 리버풀을 유럽 최강의 팀으로 끌어올린 장본인들이다.
리그에서도 숱하게 맞붙었던 그들이 오늘은 과연 어떤 활약을 보여 줄지? 또 어떤 결과를 이뤄 낼지?
기대에 찬 메인 로드의 샛별들은 얼른 경기가 시작되기를 바랐다.
***
저녁 7시 20분.
경기 시작 10분을 남기고, 필드로 양 팀 선수들이 입장했다.
경기 직전 약간의 이벤트가 진행되는 가운데, 준영은 경기장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일단 맨유 팬들이 자리 잡은 N구역과 콥스가 진을 친 X구역을 브뤼셀 경찰들이 진을 치고 나눠 놓긴 했다.
‘내가 보낸 경고를 완전히 무시하진 않은 모양인데…….’
경기 전, 준영은 UEFA와 브뤼셀 경찰에 우려의 전문을 보냈다.
영국 내에서도 라이벌 관계인 양 팀의 경기에서 과격 팬들이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고.
만약 폭력 상황이 발생하면 대회의 권위나 국가 이미지에 손상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다행히 그 경고를 흘려듣진 않았던지 오늘 경기장엔 경찰들이 제법 많았다.
거기다 돌이나 몽둥이 같은 위험한 물건을 소지하고 있진 않은지 검문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영은 안심할 수 없었다.
길게 진을 친 경찰들의 라인이 얇고, 구역을 나눈 울타리도 허술했으니까.
‘거기다 양 팀 팬들이 모두 구역을 지켜서 자리 잡았는지 미지수란 말이지.’
작정하고 사고 치려고 은신해 있는 놈들도 있을 터.
부디 그런 꼴통들이 많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삐익-!
7시 30분, 서독 출신의 주심 루돌프 크라이틀라인이 휘슬을 불며 경기가 시작되었다.
“Glory, Glory United!”
“Walk on, walk on! You’ll Never Walk Alone!”
양 팀 선수들이 부지런히 뛰는 가운데, 서포터들도 함성을 내지르고 응원가를 불렀다.
목청으로 부족하다 싶었던지 맨유 팬들은 자기편 선수들이 공을 잡을 때마다 꽹과리, 아니 꽹과리를 빙자한 냄비와 깡통을 두들겨 댔다.
이에 질세라 콥스도 북을 치고, 나팔을 불어 댔다.
“영국 놈들, 더럽게 시끄럽구만!”
“축구 종가란 놈들이 너무 천박한 거 아니야?”
중립인 벨기에 관중들 중에는 혀를 차는 이들도 있었지만, 마치 홀린 것처럼 양 팀 응원에 동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경기장 분위기가 화끈하게 달아오른 가운데, 준영과 펠레의 첫 번째 격돌이 일어났다.
공을 두고 서로 밀고 당기는 그들은 입씨름도 벌였다.
“이봐, 캡틴 리! 리그 우승을 먹었으면 유러피언 컵은 양보해!”
“너 같으면 더블을 포기하겠냐!”
이미 리그 우승을 확정한 맨유는 유러피언 컵까지 우승하면 더블.
거기다 에버튼을 물리치고 FA컵 결승에 올라간 상태라, 여기서도 우승하면 1958-59시즌 때처럼 트레블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하다더니!”
투덜대던 펠레가 한순간 준영을 슬쩍 흘려 내고는 빈 공간으로 달려가는 쿠티뉴에게 패스를 보냈다.
하지만 그 패스는 노비 스타일스에게 차단.
노비는 곧바로 리버풀 진영으로 달려가는 바비 찰튼에게로 공을 넘겨주었다.
「힘차게 치고 들어가는 바비 찰튼, 전방에 있던 알렉스 퍼거슨에게 패스, 다시 리턴 받아 슛-! 하지만 토미 로렌스 골키퍼, 정면으로 갑니다.」
양 팀 통틀어 첫 유효 슈팅이 나왔다.
이후에도 맨유는 좋은 기회들을 만들어 냈다.
문전에서 조지 베스트가 때린 논스톱 슈팅이 골대를 살짝 비껴가기도 하고, 조지 코헨의 날카로운 크로스가 알렉스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맨유 팬들에게서 아쉬움의 탄성과 함께 격려의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크리스, 측면을 확실히 막아! 크로스 올라오지 못하게 해!”
“미드필드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마크해! 유나이티드 놈들이 설치게 두지 마!”
리버풀 선수들도 부지런히 말을 주고받으며 상대 공격에 흔들리는 전열을 정비했다.
그러고는 펠레와 이안 캘러헌의 발끝을 이용해 찬스를 만들어 나갔다.
「로저 헌트 쪽으로 패스, 유나이티드 수비가 죄어드는 가운데 측면에서 침투하는 쿠티뉴 쪽으로 로빙 패스! 하지만 해리 그렉이 달려 나오며 잡아챕니다. 아까운 찬스를 놓치는 리버풀…….」
쉽게 골이 나오지 않는 상황.
하지만 지루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양 팀 모두 패스를 빠르게 주고받으며, 쉬지 않고 공방을 이어 갔기 때문.
거기다 파울도 적어서 경기가 딱히 지체되지 않고 시원하게 흘러갔다.
“패스가 두세 번 만에 상대 진영으로 가는군.”
“드리블 능력이 있는 선수들이 많은데도 공을 많이 끌지 않네요.”
경기를 바라보던 이희택은 대표팀 소집 때 감독과 코치들, 그리고 주장인 준영이 강조하던 플레이가 떠올랐다.
판단은 신속, 패스는 정확, 수비는 적극, 공격은 과감.
이렇게 요약할 수 있는 플레이를 맨유와 리버풀 양 팀 선수들이 보란 듯이 펼쳐 보이고 있었다.
‘단지 훈련의 성과는 아니야.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던 기술과 경험, 자신감을 갖췄기 때문이겠지.’
여기에 팀원들 간의 믿음과 목표를 향한 투지는 덤.
이 모든 것이 잘 우러나오면서 지금의 플레이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계속 저런 플레이를 할 수 있진 않겠지.’
경기하다 보면 지치고, 판단력도 둔해진다. 그러다 실수가 나오고 위기가 발생한다.
전세는 이 상황을 버텨 내는 팀에게로 기울어진다.
‘아직까진 잘 모르겠어. 어느 쪽도 쉽게 밀리지 않고 있으니까.’
아마 후반, 그렇지 않으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전반 종료 5분 전쯤에 뭔가 양상이 달라지지 않을까.
이희택의 예상대로 전반 40분대가 되자, 지금까지 숨죽이고 있던 브라질의 축구 황제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슨해진 틈을 타서 유나이티드 진영을 파고들면……!’
패스 플레이만 하던 펠레가 순간적으로 가속을 올리며 맨유 문전으로 돌파해 들어갔다.
빌리 맥닐과 베켄바워를 차례로 뿌리치자, 해리 그렉이 버티고 있는 맨유 골대가 보였다.
그리고…….
‘드디어 발동을 걸었나.’
‘그래, 쫓아올 거라 생각했지.’
축구 황제는 순식간에 자신의 앞을 막은 동양의 거인을 보며 확신했다.
바로 지금 벌어질 결투가 오늘 경기의 향방을 가르게 될 것이라고.
***
1985년 5월 29일 발생한 헤이젤 참사는 경기장 상태나 운영 측의 대처도 사태를 키우는 데 한몫했습니다.
너무 낡은 경기장은 여기저기서 개나 소나 다 들어올 수 있었고, 부족한 경찰 병력과 허술한 울타리 때문에 통제나 수습도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저 지경이 되고도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고 그대로 경기를 진행했을 정도였죠.
뭐, 큰 사고가 터진 후에야 후속 조치나 방지책을 세우는 건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다를 게 없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