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80. 새로운 해외파
리버풀의 멜우드 훈련장.
남들보다 빨리 훈련장에 도착한 로저 헌트는 리프팅을 하며 동료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펠레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로저, 그 하얀 공은 뭐야?”
“이번 월드컵 공인구야.”
“공인구? 이게?”
“브리튼 섬의 옛 이름을 따서 알비온이라고 하지.”
로저는 선심을 쓰듯 펠레에게 알비온을 건넸다.
이리저리 만져 보다 한번 리프팅을 해 보던 펠레는 감탄을 내뱉었다.
“가볍군. 거기다 기존 축구공보다 탄성도 훨씬 좋아.”
“좀 더 원형에 가까운 구조라서 다루기도 편할 거래.”
“과연! 이걸로 슛을 하면 골망을 시원하게 흔들 수 있겠어.”
월드컵에서 멋지게 중거리 슛을 성공시키는 장면을 상상하던 펠레는 갑자기 생각난 듯 물음을 건넸다.
“근데 대회 때 쓰일 공인구를 어디서 구한 거야?”
“제작사에서 잉글랜드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일괄 지급해 줬어. 대회 전에 익숙해지라는 거겠지.”
“쳇, 치사하잖아!”
“후후후, 이게 개최국의 프리미엄이라는 거다.”
불만스럽게 입을 쑥 내밀던 펠레는 한 가지 질문을 더 했다.
“이거 혹시 나도 구할 수 있어? 잉글랜드 국가대표가 아니면 어려우려나?”
“글쎄, 한국 녀석들도 사용하는 모양이던데?”
로저는 엊그제 친척을 만나러 맨체스터의 모스 사이드를 방문했다.
거기서 맨체스터 시티가 이번에 월드컵 본선에 오른 동양의 국가대표팀과 연습 경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본선에 오른 아시아 팀이면 한국이잖아.”
“그래, 바로 메인 로드에 가 봤지. 내가 갔을 땐 벌써 후반전이 진행 중이더라고.”
“어느 쪽이 이기고 있었어? 존 Y. 리도 나온 거야?”
“응, 캡틴 리도 있었어. 맨시티가 페널티킥을 얻어서 앞서가다가 막판에 Jung이라는 한국 선수가 역습 상황에서 동점 골을 넣어 간신히 비겼지.”
그리고 뒤늦게 시합에 사용된 공이 알비온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그러고 보니 존 Y. 리가 나2키의 공동 창업자라고 했지. 자기 조국 선수들을 챙겨 준다고 공을 쓰게 해 준 건가.”
“챙겨 주긴 해야겠더라. 명색이 국가대표팀인데 2부 리그 팀도 못 이겨서 어쩌려는 건지…….”
“2부 리그라도 맨체스터 시티는 잘하는 팀이잖아.”
펠레의 말대로 이번 시즌 맨시티는 디비전2 1위.
그들이 다음 시즌 승격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건 새로 부상한 막강한 트리오 덕분이었다.
미드필더 콜린 벨, 공격수 리틀 리와 마이크 서머비.
많은 골을 합작한 벨-리-서머비 3인조는 퍼스트 디비전의 일류 공격 편대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제는 그 3인조가 쪼개졌지. 리틀 리가 한국 대표팀에서 뛰었으니까.”
그래도 맨시티의 공격력은 막강했다.
콜린 벨의 정교한 패스와 순간적인 침투 능력은 존 Y. 리도 진땀을 빼게 할 정도였다.
거기다 주전 공격수 마이크 서머비와 조니 크로산은 쉬지 않고 한국 수비진을 두들겨 댔다.
이런 맨시티의 공세에 밀린 한국 선수들은 수비와 미드필드에 집중한 상태로 간간이 역습만 시도했다고.
“공격수를 리틀 리 한 명만 세웠더라고. 뭐, 역습 상황에서는 재빨리 서너 명이 달려 올라가긴 했지만.”
“월드컵에 대비해서 수비 지향적인 전술을 쓴 거 아니야? 한국은 약팀이니까.”
“뭐, 그럴지도 모르지. 그보다 내 공은 언제 줄 거야?”
로저의 말에 계속 알비온으로 리프팅을 하던 펠레가 탐욕 어린 미소를 지었다.
“조금만 더 다뤄 보고 줄게. 다뤄 보고 익숙해지면…….”
“에휴, 그냥 가져가라.”
쩨쩨하게 굴기 싫었던 로저 헌트는 그냥 펠레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어차피 건네받은 공이 하나만은 아니었으니까.
***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3주 동안 맨체스터에 머물며 강도 높은 훈련을 진행해 나갔다.
그러면서 근방의 풋볼 리그 팀들과 연습 경기도 하면서 경기 경험도 쌓고, 전술도 실험했다.
그렇다고 마냥 훈련만 한 건 아니었다.
휴식도 필요했기에, 적당히 선수들을 풀어 주었다.
“누누이 말하는 거지만 멀리 가지 말고, 사고 치지 마라. 복귀 시간은 철저히 지키고.”
“염려 마십쇼, 선생님.”
“귀국도 얼마 안 남았으니 조심해. 특히 길 갈 때 주의해야 하는 거 알지? 여긴 한국하고 달라서 차가 많아.”
“예예, 알고 있습니다.”
김용식 코치의 잔소리를 들으며 나온 선수들은 바로 맨체스터 시내로 향했다.
서너 명씩 나누어서 흩어진 그들은 번화가를 구경하거나, 상점에 들러 가족과 친지들에게 건넬 선물들을 구입하기도 했다.
“거참, 벌써 몇 번이나 보는 거지만 적응이 안 된단 말이야.”
거리를 지나가는 미니스커트 아가씨를 본 김청남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단짝인 김효나 정병탁의 반응은 달랐다.
“와요? 좋다 아입니꺼.”
“나도 국내 도입이 시급하다고 생각해. 최신 유행이라며?”
아직 갓 쓰고 도포 입고 다니는 어르신들이 보면 기겁할지 모르지만, 시대의 변화를 무시할 순 없는 노릇이다.
“선진 문물은 빨리 받아들여야지. 그래야 구한말처럼 왜놈들에게 망하지 않는다고.”
“치마 짧은 건 별로 상관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건 청남이가 모르는 소리야. 패션이라는 건 사상과 정신이 반영되어 있는 거라고.”
그리 말하던 정병탁은 두 눈을 반짝이며 다가오는 여성들을 보았다.
혹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나 싶어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봤지만…….
“Wow, Little Lee!”
“Please sign me!”
아가씨들은 죄다 정병탁의 뒤에 있던 이희택에게로 가 버렸다.
우쭐해하며 이희택이 사인해 주는 모습을 다른 선수들은 부러움과 질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희택이 저 자슥이 저마이 인기가 많을 줄 몰랐슴더.”
“맨체스터 시민 축구단의 주전 공격수잖아.”
“활약도 대단하다지? 주장에겐 못 따라가더라도 윤옥이 형님보단 훨씬 유명한 모양이던데…….”
맨시티의 승격이 유력하다 보니, 다음 시즌에는 코리안 더비가 이뤄질 가능성도 높다고.
아무튼 본의 아니게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그들에게 정장 차림의 중년 사내가 다가왔다.
“한국의 축구 국가대표인 Mr. Jung이 맞으시죠?”
“맞는데 무슨 일입니까?”
정병탁의 물음에 사내는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으며 명함을 한 장 건넸다.
“저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얼마 전 메인 로드에서 한국 팀의 경기를, Mr. Jung의 활약을 보고…….”
이어지는 이야기에 덤덤하던 정병탁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꿈꾸기만 하던 기회가 갑자기 찾아왔으므로.
***
“거리에서 스카우터를 만나서 오퍼를 받았다고?”
정병탁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준영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무슨 아이돌이 길거리에서 캐스팅되는 것도 아니고…….’
사실 제안이 오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발 빠르고 패스 능력이 뛰어난 정병탁은 그동안 연습 경기에서 꽤 두각을 드러냈으므로.
그래서 현장에서 몇몇 기자나 스카우터들이 그의 이름과 소속 팀을 물어보곤 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정식 제안이 오지 않았는데, 거리에서 오퍼를 받다니.
“혹시 사기꾼 아니야? 어느 팀 관계자라고 확실히 얘기는 했고?”
준영의 말에 정병탁은 상대에게 받은 명함을 꺼내 보였다.
“팀에 전화를 해서 확인했습니다. 그 사람, 볼턴 원더러스 스카우터가 맞는다고 하더군요.”
“볼턴이라. 지금 디비전2에 있을 텐데…….”
준영은 1957-58시즌 FA컵 결승전을 떠올렸다.
뮌헨 비행기 사고로 무너진 팀을 재건할 때 만났던 볼턴은 만만찮은 적수였다.
특히 잉글랜드 국가대표 출신 나다니엘 로프트하우스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은퇴하면서 볼턴은 하락세를 보이더니 1963-64시즌에 강등을 당했다.
‘강등당하기 전에는 윤옥이에게 오퍼를 보낸 적도 있었지. 아마 나한테 당한 일 때문에 한국 선수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걸지도…….’
준영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정병탁을 바라보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넌 어때? 풋볼 리그에서 뛰고 싶어?”
“당연히 뛰고 싶죠. 마음이 없었으면 주장에게 상의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의 의지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외 진출에 대비해 두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정병탁은 영어에 상당히 유창했다.
그러니 빨리 적응해 나갈 수 있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본인이 원한다고 해서 바로 이적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너 연세대학교 축구부 소속이라고 했지? 학교에서 동의해 주겠냐?”
“그건… 설득해 보겠습니다.”
“아직 병역도 해결하지 않았을 테고.”
병역 문제가 언급되자, 정병탁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미 10대 때 해외에 나온 조윤옥, 이희택과 달리 현재 그는 24살.
병역을 회피하려 외국으로 나가려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 딱 좋았다.
“볼턴 구단의 영입 의사가 확고하다면 괜찮을 거야. 거기다 월드컵을 앞둔 시점에서 대승적인 차원에서 보내 주자는 국내 여론이 나오면 쉽게 풀릴 수 있겠지.”
그 말에 정병탁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영국에서는 한 2~3년 정도 뛸 생각입니다. 군대는 그 후에 반드시 갈 거고요.”
“그래, 반드시 그렇게 해. 해외 진출이 병역 회피용으로 악용되면 후배들이 피 보게 되니까.”
행실을 바로 하지 않으면 축구계에 제대로 악명이 남는다.
준영의 말을 이해한 정병탁은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전지훈련 끝나면 대표팀 따라서 귀국해. 협상은 나랑 친한 스카우터나 사무소에서 진행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예, 감사합니다,”
준영은 정병탁이 노예 계약을 맺지 않도록, 그리고 가급적이면 출전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게끔 손을 써 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야 성장할 것이고, 대표팀 전력 향상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
1966년 1월이 지나고, 2월이 되었다.
맨유의 2월은 유러피언 컵 2라운드 1차전 경기부터 시작했다.
상대는 SL 벤피카.
준영과 동료들은 낯익은 얼굴을 보고 반가워했다.
“잘 지냈냐, 토히스.”
“주장, 그사이 늙었군요.”
“야 인마, 난 너처럼 이마가 넓어지고 있진 않아.”
선수 대기실에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눈 준영과 토히스.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되자 그들은 치열하게 공중 경합을 펼쳤다.
“어쭈, 실력이 더 늘었구나, 토히스!”
“늘어야죠. 월드컵에서 브라질과 맞붙게 생겼는걸요.”
거기다 올해는 반드시 유러피언 컵 우승을!
토히스와 벤피카 선수들은 그런 의지를 불태우며 적극적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저돌적인 그들의 기세에 맨유 수비진이 주춤한 순간, 벤피카의 간판 공격수 주제 아우구스투가 마리우 콜루나의 침투 패스를 받아 맨유 골망을 흔들었다.
“이런, 전반 10분밖에 안 되었는데…….”
“다들 정신 바짝 차려! 홈에서 패해서 되겠냐!”
준영의 일갈에 맨유 선수들은 바로 전열을 재정비해서 반격에 나섰다.
던컨이 과감한 오버래핑과 중거리 슛으로 흐름을 바꾸는 걸 시작으로, 조지 베스트가 부지런히 들쑤시며 벤피카 수비진을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전반 35분, 제르마누, 토히스를 상대로 공중 경합을 펼친 준영이 공을 따냈다.
그가 떨어트린 공을 게르트 뮐러가 그대로 골대에 꽂아 넣었다.
“그래, 바로 그거지!”
“이래야 유나이티드지!”
홈팬들의 흥이 살아난 가운데, 경기 흐름도 맨유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전반 종료 직전, 던컨의 크로스를 받은 데니스 로가 역전 헤딩골을 작렬했다.
“좋아, 후반전에도 이 기세를 그대로 몰고 가자!”
후반전 벤피카가 다시 공세에 나섰지만, 오히려 뒷공간을 노출하며 번번이 맨유에 찬스를 내줬다.
그리고 후반 60분, 코너킥 상황에서 수비수 빌 포크스가 세 번째 골을 성공시키며 승세를 굳혔다.
벤피카는 후반 80분 토히스의 결정적인 슈팅이 골대를 맞고 나오고, 핀토가 발목을 접질려 실려 나가는 등의 불운이 겹치며 결국 패배의 쓴잔을 받았다.
“좋았어. 이번 달도 시작이 좋군!”
기분 좋게 승리를 거두며 귀가한 준영.
그런 그에게 한국에서 날아온 전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보의 내용을 살펴본 준영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뭔 개소리야?”
***
왼쪽의 선수가 바로 정병탁 선수입니다.
국가대표팀을 지도했던 민병대 감독의 지도를 받아 연세대에 진학했지요.
축구 실력뿐만 아니라 학업 성적도 무척 좋았다고 합니다. 특히 영어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하셨다고 하네요. 당시 대표팀 선수들 중에 영어를 제일 잘했다고…….
사진이 찍힌 건 1970년 9월 평가전인데, 상대는 SL 벤피카였습니다. 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셨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