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79화 (379/400)

Round 379. 필사즉생

운명의 조 편성이 끝난 후, 바비와 던컨은 준영에게 다가와 위로를 건넸다.

“어느 조에 가든 힘들다고 하지만, 진짜 골치 아픈 조에 걸렸군요.”

“하필이면 거칠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놈들을 만나다니…….”

강력한 피지컬을 내세워 거칠게 몰아붙이는 소련과 틈만 나면 더티 플레이를 일삼으며 육박전을 펼치는 이탈리아.

이들은 잉글랜드 축구대표팀 입장에서도 달갑잖은 상대였다.

“그나마 나은 게 칠레인가?”

“글쎄, 지난 대회 산티아고에서 벌어진 대전투를 생각하면 그쪽도 만만찮게 거칠던데.”

그렇다고 칠레가 거칠기만 하고 실력 없는 팀인 것은 아니다.

주장인 레오넬 산체스를 필두로 루벤 마르코스, 프란시스코 발데스, 하이메 라미레스 등 만만찮은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거기다 이들은 상당수 선수들이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 칠레 대학 소속이라 조직력도 좋은 편이었다.

‘비록 지난 대회에 홈 어드밴티지에 힘입었다고 해도, 3위까지 한 점을 생각하면 상당한 저력을 가진 팀인 건 분명해.’

그리 생각하고 있던 준영에게 펠레가 다가왔다.

그는 자국 팀이 있는 3조에 한국이 아닌 불가리아가 들어온 데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월드컵에서 존 Y. 리와 맞붙을 기회는 없을 것 같았으니까.

“이봐, 캡틴 리,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응? 어쩌다니?”

“언론에다 우승이 목표라고 큰소리쳐 놨잖아. 설마 맥없이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려는 건 아니지?”

펠레의 물음에 준영은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시작하기 전에 포기할 사람으로 보이냐? 지금부터 한국도 전력을 높여 갈 거야.”

그러기 위해 1월 영국 전지훈련을 왔다.

월터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1월 전훈이 끝난 후에도 틈틈이 소집 훈련을 해서 조직력을 다질 것이라고 했다.

‘사실상 장기 합숙이지. 폐해가 많은 구시대적 방식이긴 한데… 아니, 지금이 구시대이니까 그 방식이 통하려나?’

잠시 생각에 잠겼던 준영은 펠레를 바라보며 말했다.

“7월에 우리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 거야. 그러니 염려 말고 너희 팀 준비나 잘해.”

“우리 브라질이야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지. 우린 챔피언이니까.”

그 디펜딩 챔피언인 브라질은 1승 2패로 탈락.

실제 역사에서 벌어진 비극을 알고 있는 준영은 자신만만한 펠레에게 충고를 해 주었다.

“네발 달린 말도 넘어질 때가 있어. 챔피언이라도 방심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어디에서 누구에게 한 방 얻어맞을지 모른다는 거지? 잘 알고 있어. 매번 어떤 사람에게서 얻어맞아 봤으니까.”

누구에게 얻어맞았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펠레의 눈빛을 보자니, 준영은 브라질이 실제 역사와 다른 운명을 개척해 갈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운명을 개척해 가야지. 원래 북한 녀석들이 이룬 결과에 뒤지지 않는… 그 이상의 성과를!’

준영의 눈빛이 뜨겁게 타올랐다.

앞으로 약 반년.

삼사자 군단의 땅에서 아시아의 호랑이가 날아오르게 만들 것이다.

***

조 편성 결정 소식은 맨체스터에 남아 있던 한국 대표팀 선수들에게도 전해졌다.

“왜 하필 4조인 거야.”

“어느 조에 걸리든 똑같은 거 아냐?”

“그래도 4조는 아니지! 죽을 사(死) 같아서 불길하다고!”

만만한 나라는 하나도 없다.

이미 그 현실을 알고 있었기에 대부분의 선수들은 마음을 비운 상태였다.

다만 미신 때문에 꺼림칙하게 여기는 이들은 제법 있었다.

다음 날 더 클리프 훈련장에 나타난 준영은 그런 미신에 대해서 가볍게 일축해 버렸다.

“옛날에 이순신 장군이 말씀하셨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말이야.”

성웅 이순신을 모르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다.

그건 이 시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준영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봤던 대사를 떠올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 말은 원래 오자병법에 나온 말이야. 요행 부리지 말고 죽을 각오로 맞서 싸워야 이긴다는 뜻이지.”

“죽을 각오…….”

“너희 말대로 우리 입장에선 4조가 死조 같겠지. 다들 만만한 우릴 죽이고 승점을 얻으려 하고 있어. 맞서 싸우지 않으면 틀림없이 죽는다. 질 거라 이거야.”

그렇게 말한 준영은 모두를 둘러보며 물었다.

“어때? 질 것 같으니 지고 싶어? 어차피 무리니까 그냥 한 수 배우고 간다는 마음으로 3경기 뛰고 돌아가서 세계의 벽은 높았더라고 말할 거야?”

“아뇨. 그럴 맘 없습니다!”

근성 하나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박중환.

그를 필두로 해서 다른 선수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지고 싶지 않습니다!”

“우릴 깔보는 놈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 줘야지!”

“이겨야죠! 이기려고 훈련하고 있잖아!”

명백한 운명.

선수들이 영국에 와서 본 신문에서는 한국 팀의 앞날에 대해 그리 논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기대할 게 없다는 뜻.

아무리 한국이 현재 아시아 축구의 제왕이라 해도, 이준영이라는 걸출한 월드 클래스 선수가 있다고 해도 결과는 뻔하다고 보고 있었다.

그렇게 떠드는 이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우리는 결코 약하지 않다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팀이라고!

“주장이 잘 말해 줬어. 죽을 각오로 싸워서 이겨야지.”

가만히 듣고 있던 최정민 코치도 동의하며 말을 보탰다.

“12년 전이지. 나와 선배들은 월드컵 무대에서 단 한 골이라도 넣어 보자 결의했어. 죽을 각오로 뛰겠다 마음먹었고, 실제 다들 쓰러질 때까지 뛰었지.”

하지만 한 골이라는 소박한 목표도 이룰 수 없었다.

전쟁 직후의 한국 대표팀은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진짜 죽을 때까지 뛰고 싶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어.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안타까워. 좀 더 준비할 시간이 있었으면, 전력을 높일 지원이 있었다면…….”

진한 아쉬움을 드러내던 최정민은 후배들을 보며 말했다.

“그런 점에서 너희는 행운아들이지. 전력을 다해서 너희를 단련시켜 주마. 그러니 방금 다진 각오를 잊지 말고, 죽기 살기로 해 봐!”

“예-!”

사지에서 싸워 이기자!

각오를 다진 호랑이들의 우렁찬 함성이 더 클리프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

필사즉생(必死卽生).

한국 선수들은 그 결연한 의지로 맹훈련을 시작했다.

“좀 더 빠르게! 그런 패스 속도론 어림도 없어!”

“내버려 두지 말고 쫓아가서 마크해!”

월터 윈터보텀과 코칭스태프들은 훈련 상황과 선수들의 기량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그들은 그렇게 기록한 자료들을 가지고 밤마다 의견을 주고받았다.

선수들에게 제일 적합한 포지션은 어딘지, 어떤 식으로 특성을 키워 나갈지, 보완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그러면서 본선에서 사용할 팀 전술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월터는 이 전술 논의에서 맨유의 맷 버스비 감독과 지미 머피 코치에게도 자문을 구했다.

명장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의 의견은 피가 되고 살이 될 테니까.

그런데…….

“자네는 부르지 않았는데?”

“이런, 자문이 필요하단 소리를 듣고 일부러 와 줬는데 고맙다고 해야지.”

리버풀의 빌 섕클리 감독.

태연스럽게 끼어든 그를 내칠 이유는 없었다.

그 역시 명장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므로.

그래서 그를 포함해서 토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로 꾸준히 한국 선수들을 살펴봤습니다. 현재 일부 해외파 선수들을 제외하면 대표급 선수들의 기량은 풋볼 리그 3, 4부 리그 수준이죠.”

이 선수들로 세계적인 팀들과 맞붙어야 한다.

경험이나 기량에서 뒤처진 상태이다 보니, 전술적인 방책이 필요했다.

“그나마 스피드와 기동력은 쓸 만합니다. 존은 선수들의 체력을 최대로 높여 전원 수비, 전원 공격의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저도 동의하는 바이지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는 거겠지.”

축구에선 공격이든 수비든 숫자 싸움이 중요하다.

골키퍼를 빼고 10명이 수비와 공격을 다 같이 할 수 있다면 매우 좋다.

하지만 그만큼 체력이 뒷받침할 수 있는지, 전술적인 약점을 노출하는 건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공격에 치중하면 뒷공간이 비고, 수비에 치중하면 계속 수세에 몰리게 되지. 중요한 건 알맞게 배치해서 움직이는 건데…….”

“먼저 수비에 신경을 써야지. 지난번에 존이 그랬어. 공격을 잘하는 팀은 팬들을 끌어모으고, 수비를 잘하는 팀은 트로피를 차지한다고.”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죠. 더구나 존 그놈은 수비수니까…….”

월터는 아시아 예선에서 4-2-4 전술을 썼다.

중앙의 하프백 2명의 활동량을 통해 공격이나 수비에 가세해서 효과적인 공수 협력을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기량이 월등한 상대가 똑같은 전술로 나오면 맞서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버스비 감독이 의견을 내놓았다.

“중원에 더 많은 선수들을 배치하는 건 어떤가? 우리 팀도 강팀을 상대로는 미드필드에 5명을 배치하고 있지.”

“MM포메이션을 개량한 3-5-2 말이지요? 저도 들어 봤습니다. 전술적으로 간단하다 보니 선수들이 습득하기 좋다고 하더군요.”

문제는 양쪽 측면을 맡은 선수들의 공수 부담이 크다는 점.

상대가 이쪽을 노리고 들면 전열이 한순간에 밀려날 수 있었다.

“거기다 수비에 치중한 전술이니 최전방 공격은 그만큼 약해질 수밖에 없죠.”

월터의 말에 섕클리는 별문제가 안 된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어차피 지금도 약하잖아. 그냥 포기하고 역습 위주로 공격을 전개하라고.”

“그건…….”

“까짓것 확 줄여 버려. 포워드는 한 명, 아니 아예 없애 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저도 모르게 미래의 원톱, 제로톱 전술을 들먹인 빌 섕클리.

그의 의견에 월터는 황당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최전방 공격수를 몽땅 없애라니?

“그럼 공격을 어떻게 하라고?”

“어떻게든 할 수 있어. 전원 공격, 전원 수비를 지향한다며? 그럼 굳이 공격수가 골을 넣을 필요는 없지.”

즉, 공격수의 숫자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것.

역습에 특화된 발 빠른 선수들을 배치하고 패스가 뛰어난 미드필더들이 뒤를 받치게 하면 된다.

마침 한국에는 조윤옥, 이희택, 정병탁같이 발이 빠른 공격수도, 이준영이나 임국천처럼 정교한 패스를 뿌릴 수 있는 선수도 있다.

“그리고 역습할 찬스도 많을걸? 답답한 놈들은 기어 올라오기 마련이니까. 그럼 자연히 뒷공간이 열린다는 말씀!”

현실적으로 한국은 승점 자판기.

그 말인즉슨 소련과 이탈리아, 칠레는 무조건 한국을 잡아야 8강 토너먼트 진출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놈들 입장에선 비기는 것도 나쁜 결과일 거란 말이지. 그리고 이번 대회는 승점이 같으면 골 득실 차로 본다며? 그러니 어떻게든 한국을 상대로 다득점을 따려고 들 거야.”

“빌의 말이 맞아. 오히려 그 점을 역이용할 필요가 있네.”

버스비는 물론, 머피 코치도 섕클리의 의견에 동의했다.

“요즘 이탈리아도 극단적인 수비 전술을 쓰고 있지. 밀란 놈들의 경우 그렇게 상대를 끌어들인 후에 전방의 3톱을 이용해 날카로운 역습을 전개하더군.”

빗장 수비, 카테나치오의 쓴맛은 맨유도 1962-63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겪어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맨유의 격파에 수훈을 세운 잔니 리베라는 현재 이탈리아 대표팀의 핵심 플레이어였다.

“그 이탈리아도 한국 상대로는 빗장을 잠그지는 않을걸.”

“우리가 빗장을 잠그고 놈들의 배후를 노려야 한다는 건가.”

넘기 힘든 세계의 벽.

생각해 보면 굳이 넘어갈 필요가 없다.

벽 너머의 상대가 스스로 벽을 허물고 나오는 걸 기다려도 되는 일이니까.

‘물론 그렇게 나온 상대가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일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한국 입장에선 진다고 딱히 손해 보거나 망신을 살 일은 없다.

그리고 선수들은 죽기 살기로 맞붙을 각오를 다진 상태다.

‘그래, 마냥 불리한 건 아니다.’

아직 가능성은 낮지만, 죽음의 4조에서 생존할 방법을 찾은 월터.

그는 계속 명장들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방책을 마련해 나갔다.

***

약체의 반란으로 유명했던 사례 중의 하나가 2014년 브라질 월드컵 D조 코스타리카입니다.

당시 코스타리카는 잉글랜드, 우루과이, 이탈리아와 같은 조로 그야말로 죽음의 조에 속해 있었죠.

대회 전 코스타리카는 홍명보 감독이 이끌던 한국 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도 패할 정도로 약한 모습을 보여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등 터질 새우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1차전 우루과이전에서 3 대 1로 승리하며 파란을 일으키더니, 이어진 2차전 이탈리아전에서도 1 대 0 승리, 마지막 3차전 잉글랜드전도 0 대 0으로 비기며 16강에 진출했죠.

그 때문에 당시에 붙은 별명이 고래 잡아먹는 ‘육식 새우’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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