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78. 죽음의 조
웨스트햄전에서 결승 골을 터트린 준영은 19라운드 선더랜드전에서도 골을 기록, 복귀 후 3경기 연속 골을 기록하며 팀의 연승을 이어 나갔다.
20라운드 에버튼전에서는 득점을 하지 못했지만, 철벽 수비로 3 대 0의 완승에 공헌했다.
“자, 이번엔 닭집 차례군.”
12월 18일 토요일 저녁.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39,000여 명의 관중들이 올드 트래퍼드를 찾아와 맨유와 토트넘의 경기를 지켜보았다.
“Glory! Glory, United!”
“이준영, 파이팅!”
맨체스터의 한국 교민들도 맨유의 레플리카를 걸치고 열심히 응원을 펼쳤다.
쉴 새 없이 응원의 함성을 내지르는 교민들에게 버프를 받았던 걸까.
전반 20분, 알렉스 퍼거슨이 슈넬링거와의 공중 경합에서 떨궈 준 공을 페널티 아크 앞쪽에 있던 이준영이 논스톱으로 발리슛으로 때렸다.
빗속에서 레이저처럼 쭉 뻗어 나간 슈팅.
토트넘의 팻 제닝스 골키퍼가 몸을 날려 봤지만, 이미 공은 골망을 세차게 흔든 뒤였다.
그와 동시에 화산이 터진 것 같은 함성이 관중석에서 일어났다.
「엄청난 골입니다! 골망을 찢어 버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군요!」
팽팽하던 균형이 맨유 쪽으로 기울어진 가운데, 토트넘은 전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또 한 번의 일격을 얻어맞았다.
측면에서 공을 가로챈 레이 윌슨이 중앙의 알렉스 퍼거슨 쪽으로 패스.
곧장 골문으로 돌파해 들어간 알렉스의 슛이 골키퍼의 펀칭에 막혔다.
“고, 공이 뒤로 빠졌어!”
“얼른 걷어 내!”
슈넬링거가 걷어 내기도 전에 데니스 로가 몸을 날려 골대 안으로 공을 밀어 넣었다.
준영의 선제골이 터진 지 1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터진 추가 골.
흥이 오른 홈팬들의 입에서 응원가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두 방의 강펀치를 연달아 맞은 토트넘 선수들은 넋이 나갔다.
그리고 맨유 선수들은 그들을 더욱 강하게 몰아붙였다.
「유나이티드, 공격수들부터 토트넘의 공격을 적극적으로 저지합니다. 여의치 않자 뒤로 공을 돌리는 앨런 멀러리…….」
미드필드에서 내려보낸 공은 페널티 박스에 있던 수비수 데이브 맥케이가 잡았다.
맥케이가 전방으로 롱 패스를 보내려는 그때, 조지 베스트가 바싹 붙으며 압박을 시도했다.
맥케이는 공을 빼앗기지 않으려 돌아섰지만, 조지는 적극적으로 달라붙어 끝내 가로챘다.
“저런 바보 자식!”
“조심해! 사람 놓치지 마!”
조지는 때마침 중앙으로 달려온 게르트 뮐러를 보고 패스를 찔러 주었다.
토트넘의 수비수 필립 빌은 황급히 그 패스를 끊어 냈다.
하지만 바깥으로 걷어 내려 했던 것과 달리 필립 빌의 발에 맞은 공은 그대로 골대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허, 나 이거야 원……!”
비를 맞으며 경기를 지켜보던 토트넘의 빌 니콜슨 감독은 고개를 내저었다.
분명히 초반에는 대등한 경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3골이나 벌어져 버렸다.
최전방 공격수 클리프 존스나 에우제비우도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지 얼이 빠져 있었다.
「막상막하가 될 거라고 봤던 경기가 유나이티드에게 일방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후반을 위해서도 스퍼스는 재정비가 필요해 보이는군요.」
전반은 맨유의 3 대 0 리드로 마무리.
후반전이 시작되자, 토트넘은 만회 골을 위해 적극적인 공세로 나왔다.
그 노력은 후반 2분 만에 결실을 맺었다.
수비수를 달고 돌파해 가던 에우제비우의 크로스가 반대편에서 달려들던 클리프 존스의 머리에 걸렸던 것.
그렇게 추격의 불씨를 살리나 싶었지만, 2분도 채 되지 않아 꺼지고 말았다.
오른쪽 측면에서 던컨 에드워즈가 길게 걷어 낸 공이 토트넘의 빈 공간에 절묘하게 떨어졌고, 맹렬히 질주한 바비 찰튼이 이를 잡아챘다.
그대로 문전으로 돌진한 바비는 팻 제닝스 골키퍼를 앞에 두고 슛을 때렸다.
골키퍼의 선방에 튕겨 나오자, 바비는 재차 공을 차서 기어코 골망을 흔들었다.
“으윽, 4 대 1…….”
“말도 안 돼. 이건 꿈이야. 이 악몽에서 날 깨워 줘!”
토트넘 서포터들이 낙담하는 가운데 경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에우제비우와 클리프 존스가 몇 차례 기회를 잡았지만, 해리 그렉의 선방에 모두 막혔다.
긴 부상을 털고 출전한 노장 해리 그렉의 선방은 맨유 선수들을 든든하게 해 주기에 충분했다.
이 든든함을 발판으로 후반 36분, 조지 베스트와 데니스 로가 절묘한 패스 플레이로 다섯 번째 골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경기는 5 대 1 맨유의 승리로 종료.
예상 밖의 대승을 거둔 맨유는 라이벌 토트넘을 뿌리치고, 순조롭게 선두를 달려 나갔다.
***
토트넘전을 끝내고 이틀 후.
준영은 헨리 케일을 비롯한 미스터리 푸드의 임원들과 함께 자선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맨체스터 지역의 보육원 아이들과 빈곤층 가정에 크리스마스 선물과 위문품을 보내기로 했던 것.
“과자는 차질 없이 준비될 것 같은데, 장난감은 어때요?”
“거래처에서 모레 오후 5시까지 납품을 완료하겠다는 답변이 왔습니다. 그리고 의류나 제화 쪽은…….”
상무가 막 보고하려던 차에, 회의실에 조셉 포스터가 들어왔다.
“잘 왔어, 조셉. 크리스마스 위문품 준비는 어때?”
“방금 하청 업체들을 둘러보고 왔어요. 23일까지 납품한답니다.”
“23일 오전까지 달라고 해 줘. 분류해서 포장하는데도 시간이 걸리니까.”
그렇게 조셉도 참여한 크리스마스 자선 행사 준비 회의는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회의가 끝난 후, 조셉은 내년 월드컵과 관련해 중요하면서도 반가운 보고를 해 왔다.
“FA에서 우리 회사 제품을 공인구로 최종 선정했어요.”
“오, 알비온이 선정된 거야?”
나2키 알비온(Albion).
이 공의 개발에 준영은 여러 가지 조언을 했다.
일반적으로 축구공 하면 잘 알려진 1970년 월드컵 공인구 텔스타를 모델로, 12개의 오각형과 20개의 육각형 조각으로 정이십면체 구조로 만들라고 했던 것.
여기에 소재는 가죽에 폴리우레탄을 코팅했고, 하얀 바탕에 영국을 상징하는 사자 문양을 넣었다.
‘마음 같아선 내가 21세기에서 가져온 공인구를 복제하고 싶지만, 기술이 부족하니…….’
이렇게 개발된 알비온은 FA가 런던 소호 스퀘어에서 진행한 블라인드 테스트에 참여했다.
이 테스트에서 알비온과 마지막까지 경합한 제품은 슬래진저 사에서 만든 챌린지4.
알비온에 비하면 25개 직사각형 조각으로 된 보수적인 구조에 천연 가죽, 오렌지색에 무늬는 없었다.
“기존의 축구공이 익숙한지 챌린저4에 대해 호평한 사람들이 꽤 있었어요. 우리 공은 너무 가볍고 탄성이 큰 게 아니냐고 지적했죠.”
“가벼우니 좋은 건데……. 그래도 어떻게 선정은 됐구나.”
“방수가 된다는 점이 많은 점수를 받았죠.”
“하하, 확실히 비가 잦은 이 나라에선 그게 큰 장점이겠지.”
폴리우레탄 코팅이 신의 한 수였던 셈.
아무튼 공인구로 선정되었으니, 이제 대회에 맞춰 납품하면 되었다.
“조셉, 그거 미리 만들어서 잉글랜드 대표팀에 건네줘. 한국 대표팀에 전달할 것도 만들어 놓고.”
“알겠습니다.”
공인구 납품으로 회사만 선전하고 끝낼 수는 없었다.
단 1퍼센트의 승률이라도 끌어올려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렇기에 준영은 한국 대표팀이 미리 새로운 공에 익숙해져 실전에서 경기력이 올라가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
새해가 밝았다.
신정이 지나고,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맨체스터에 도착했다.
월드컵을 대비한 현지 적응 및 합숙 훈련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어서 오십쇼, 감독님.”
“그래,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마중 나온 준영은 월터 윈터보텀 감독의 굳은 얼굴을 보았다.
“표정이 안 좋으신데, 어디 아프십니까?”
“아니. 오랜만에 영국에 와서 그런가, 공기가 적응이 안 되는군.”
“그래요? 계속 있어서 그런가, 저는 잘 모르겠던데…….”
한창 경제 개발과 산업화가 진행 중이라지만, 한국은 아직 공기가 맑은 편이었다.
그에 반해 매연이 많고 스모그가 끼는 영국의 공기는 매캐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공기 때문만은 아니지. 사흘 후에 있을 조 추첨을 생각하니…….”
“어차피 쉬운 상대는 없는걸요. 마음을 비우는 게 편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최악은 피해야지.”
늘 그랬던 것처럼, 더 클리프에 여장을 푼 한국 대표팀 선수들은 간단한 회복 훈련을 하며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그리고 1월 6일, 윈터보텀 감독은 수석 코치 톰 피니와 김용식 코치, 그리고 주장인 준영과 함께 런던 로열 가든 호텔에 왔다.
호텔에는 남미와 유럽 축구계의 저명인사들, 그리고 각 대표팀 수장과 스타 선수들이 모여 있었다.
“저길 봐. 스페인 대표팀의 호세 비야롱아 감독과 아만시오 아마로군.”
1964년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정상에 오른 스페인은 강력한 월드컵 우승 후보로 꼽히고 있었다.
“프랑스의 앙리 게랭 감독에 주장 마르셀 아르텔레사……. 저쪽은 소련 대표팀의 니콜라이 모로조프 감독과 레프 야신이군.”
“낯익은 얼굴들도 꽤 보이네요.”
잉글랜드 감독 알프레드 램지와 동행한 바비 찰튼과 던컨 에드워즈.
브라질 대표팀의 펠레, 서독의 칼 하인츠 슈넬링거, 이탈리아의 잔니 리베라 등등.
한솥밥을 먹고 있는 동료들도 있고, 필드에서 한바탕 붙어 본 선수들도 있었다.
추첨이 시작되기 전, 장내에 모인 축구인들은 서로 인사와 안부도 주고받으며 친분을 나누었다.
“캡틴 리, 제발 우리 조로 와 줘.”
“아냐. 한국은 우리 조로 와야 해! 우리가 잘 대해 줄 수 있다고!”
다들 한국에 대한 구애가 적극적이었다.
김용식은 그런 반응이 분했던지 낯빛을 굳혔다.
“망할 놈들, 아주 호구 취급을 하는군.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지만…….”
“방심해 주면 고마울 뿐이죠. 누가 걸리든 본선에서 제대로 한 방 먹여 주는 겁니다.”
“그래, 이 군 말이 맞아. 반드시 그리해야지.”
얼마 후, FIFA 회장 및 임원들이 입장하며 조 추첨이 진행되었다.
포트1은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을 필두로 한 남미의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포트2는 개최국 잉글랜드와 헝가리, 소련, 서독이었다.
‘포트3은 남유럽인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우리랑 불가리아, 멕시코, 스위스는 포트4로군.’
과연 이 15개 국가들 중에 한국과 한 조가 되는 건 어떤 나라들일까.
긴장한 상태로 지켜보는 가운데, 1조에서 4조까지 하나하나 국가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젠장, 개최국이랑 같은 조라니!”
“브라질은 매직 마자르랑 한 조인가.”
포트3 국가들까지 배정이 끝난 상황에서 준영은 4조에 주목했다.
‘칠레, 소련, 이탈리아…….’
실제 역사에서 북한과 한 조에 속했던 나라들이다.
지난 대회 3위 칠레, 1960년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우승을 한 소련, 월드컵 2연패의 이탈리아.
다른 축구 강국과 비교해도 그 전력이나 이력이 만만치 않았다.
‘설마 저기 걸리는 거야? 진짜로?’
실제 역사에서 북한은 저 죽음의 조에서 어떻게 8강에 갔을까.
준영이 새삼 의문을 느끼고 있을 때, 각 조가 하나하나 완성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3조와 4조가 남겨진 상황.
추첨자가 3조에 들어갈 포트4 국가를 뽑았다.
“불가리아는 3조입니다.”
마지막에 남은 대한민국은 자동으로 4조.
끝까지 지켜보던 준영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안도감에 나온 것인지, 아니면 답답한 마음에 터져 나온 것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역사를 바꾸었는데… 결과적으로 북한의 대타가 된 건가. 그럼 앞으로의 결과도 북한과 같을까? 그렇지 않으면…….’
이 상황이 호재인지 악재인지.
어떤 식으로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해야 할지?
주변이 떠들썩한 상황에서 준영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
1. 1966년 월드컵 공인구였던 슬래진저 사의 챌린지4입니다.
이전에 사용하던 공인구들과 별 차이가 없었죠. 색깔이 주황색이 아니라 흰색이었으면 축구공이 아니라 배구공처럼 보였을 겁니다.
이 공 다음에 우리가 보통 축구공이라고 하면 생각하는 그 텔스타 계열의 축구공이 등장합니다.
2. 작중에 나온 토트넘의 골키퍼 팻 제닝스는 북아일랜드 출신의 레전드 골키퍼입니다.
토트넘과 아스날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보이며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올라간 선수죠.
사진은 1,000경기 출전 기념으로 찍은 것인데, 작중에는 아직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애송이 키퍼입니다. ^^;;;
그는 18세에 국대에 데뷔해서 40세인 1986년 멕시코 월드컵까지 출전, 북아일랜드 A매치 최다 출장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