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77. 궁극적인 목표
한국에서의 일정을 끝낸 준영은 대표팀의 해외파 선수들과 함께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준영의 복귀 소식에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나 스페인, 이탈리아 기자들도 맨체스터 공항으로 찾아왔다.
“조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축하합니다, 캡틴 리. 본선에서 어떤 목표를 세우고 계시죠?”
“첫 번째 골입니까? 아니면 승점?”
“조 편성에서 어떤 나라와 한 조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까?”
질문을 쏟아 내는 기자들 앞에서 준영은 폭탄 같은 발언을 내뱉었다.
“궁극적인 목표는 우승입니다.”
우승.
전혀 예상 밖의 단어가 나오자 장내는 순간 조용해졌다가 이내 크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준영이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었기 때문.
‘제정신인가? 농담이겠지?’
‘1승은커녕 1골조차 못 넣은 나라가 무슨…….’
만만한 승점 자판기.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에 대한 세계 축구계의 인식이 그랬다.
기자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실례지만 너무 비현실적인, 불가능한 목표라 생각하지는 않는지?”
“불가능하다고 단념해선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준영의 대답에 조윤옥과 차태성, 이희택은 자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왜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서 조롱거리가 되려고 하나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준영의 말이 맞았다.
“인간이 하늘을 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고 인류를 진보시켜 여기까지 왔습니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게 목표인 겁니까?”
“포기하지 않으면 꿈은 이루어집니다.”
기자들은 여전히 터무니없다고, 몽상 같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들도 조금 전처럼 폭소를 터트리진 못했다.
지금까지 준영이 어떤 일을 해냈는지 새삼 떠올랐으므로.
“언젠가 이뤄 낼 꿈을 위해 저는 포기하지 않고 도전할 겁니다. 제가 못하면 여기 후배 녀석들이, 그 뒤에 일어날 꿈나무들이 해내겠죠.”
“그렇습니까. 매우 험난한 도전을 결심하셨군요.”
“역경에 도전하는 일은 로망이니까요.”
이런 발언에 다들 준영이 먼 미래를 기약하며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준영은 내년 월드컵에서 그저 미래의 밑거름만 될 생각은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 북한도 해냈어. 우린 그들을 꺾고 본선에 올라왔다. 그러니 못할 게 없지.’
반드시 세계를 놀라게 해 주리라.
그리 다짐한 준영은 차근차근 본선 무대를 준비하기로 했다.
***
1965년 12월 1일.
맨유에 복귀한 준영은 유러피언 컵 1라운드 2차전 경기에 출전했다.
상대는 동독의 ASK 포어바르츠 베를린.
지난달 베를린 원정에서도 맨유는 데니스 로와 알렉스 퍼거슨의 골로 2 대 0으로 승리했다.
“이변이 없다면 오늘도 낙승이지.”
“이변 같은 게 생길 리 없잖아. 캡틴 리도 복귀했는데.”
11월에 그가 월드컵 예선으로 부재한 상황에서도 팀은 승승장구하며 1위를 지켜 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맨유 팬들은 느긋하게 2차전을 지켜보았다.
「중앙에서 한 명 제치고 들어가는 조지 베스트, 우측면에서 전진한 던컨에게 공을 넘겨줍니다. 던컨이 중앙으로 크로스… 캡틴 리가 뛰어들며 헤딩! 골입니다!」
관중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맨유는 전반 10분 만에 선제골을 터트리며 앞서갔다.
오늘 경기, 꽤 공격적으로 전진한 준영은 전반 40분에도 게르트 뮐러의 패스를 논스톱 발리슛으로 때려 넣으며 또 한 번 골망을 흔들었다.
이후에도 그 쾌조는 계속 이어졌다.
후반 24분, 상대 진영에서 바비 찰튼이 끊어 낸 공을 넘겨받은 준영은 상대 문전을 직접 돌파해 들어가 기어코 해트트릭을 완성했다.
그 활약에 맨유 홈 관중들도 신이 났다.
“복귀 기념 축포 한번 푸짐하군.”
“아주 펄펄 날아다니네.”
“훗, 애초에 동독 챔피언 따위는 상대가 안 되지.”
유러피언 컵 경기를 마치고 사흘 후, 맨유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 맞붙었다.
웨스트햄은 국가대표 수비수 바비 무어와 중원에서 걸출한 활약을 펼치고 있는 마틴 피터스, 그리고 연계 능력이 뛰어난 공격수 제프 허스트를 앞세워 맨유에 맞섰다.
‘해머스가 자랑하는 삼총사가 모두 나오셨군. 쉽지 않은 경기가 되겠는걸.’
1963-64시즌 FA컵에서도 이 삼총사들에게 쓴맛을 보았던 터라 준영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웨스트햄은 초반부터 과감하게 공세로 나왔다.
바비 무어가 적극적으로 전진하며 역습을 시도하고, 제프 허스트는 맨유의 오프사이드 라인을 부수며 좋은 찬스들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여 주는 건 마틴 피터스로군.’
웨스트햄의 공수를 조율하고 있는 미드필더 마틴 피터스.
184센티미터라는 준수한 체격에 양발잡이인 그는 예측 불가의 번득이는 움직임과 패스를 펼쳐 보이곤 했다.
노비 스타일스의 찰거머리 수비도 곧잘 뿌리치고, 준영과의 공중전 경합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확실히 평가대로 미드필더로서는 진짜 완벽한 놈이야.’
‘쳇, 이 아저씨는 늙지도 않나.’
준영이 주목하는 만큼, 마틴 피터스도 준영을 신경 쓰고 있었다.
중원에서 누구보다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 동양의 거인만 아니면 유나이티드를 와르르 무너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진짜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반드시 쓰러트리고 말겠어! 앞으로 풋볼 리그의 제왕이 되는 건 나, 그리고 우리 해머스일 테니까!’
‘그래, 어디 덤벼 봐라!’
바비 무어에게 패스를 받은 마틴 피터스는 준영을 앞에 두고 과감하게 돌파를 시도했다.
도중에 슬쩍 룰렛을 쓰면서 뿌리치려 했지만, 준영은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인마, 그건 내 기술이야.”
“크윽! 제길…….”
준영의 개인기는 이미 널리 알려졌고,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남미에서도 유망주들이 그의 플레이 영상을 보며 기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마틴 피터스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양발잡이였던 그는 준영의 개인기들을 열심히 연구하고 연마해서 습득했다.
하지만 원조를 상대로 써먹기엔 다소 부족했던 것 같았다.
“그럼 이건 어때요?”
‘어쭈, 이놈 보소?’
현란한 페인팅을 선보이는 마틴의 움직임에 준영은 순간 움찔했다.
방금 마틴이 보여 준 건 펠레가 펼치는 징가식 드리블이었으니까.
「피터스, 캡틴 리를 뿌리치고 전진해 갑니다. 바로 추격하는 캡틴 리, 피터스를 밀어내고 공을 빼앗아 냅니다.」
넘어진 마틴은 파울이라고 어필했지만, 주심은 고개를 저었다.
마틴의 돌파 루트를 예상한 준영이 먼저 위치를 선점, 어깨싸움에서 마틴을 이겼기 때문.
“어이, 깻잎 머리, 피지컬은 좀 더 키우는 게 좋겠다.”
“쳇, 키우고 있어요.”
준영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선 마틴 피터스.
그런 그에게 준영이 은근히 추파를 던졌다.
“근데 너 혹시 우리 팀에 올 생각 없냐?”
틈만 나면 바비 무어를 꼬신다더니.
피식 웃음을 지은 마틴은 어깨를 으쓱하며 튕겼다.
“저 비싸거든요.”
“얼마면 돼?”
“그런 건 경기 끝난 다음에 물으면 안 돼요?”
“아니, 지금 물어야 네가 경기에 집중을 못하지.”
“나 참, 이 아저씨가 진짜…….”
10년은 앞선 축구를 하는 천재 미드필더와 21세기에서 온 베테랑 플레이어의 경합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귀빈석에 자리한 한 남자는 그들의 플레이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
현재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을 맡은 알프레드 램지.
잉글랜드에 두 번째 우승컵을 안겨 주겠다고 공헌한 그는 오늘 선수들의 플레이를 살펴보러 올드 트래퍼드에 와 있었다.
맨유와 웨스트햄 양 팀에는 현역 국가대표, 그리고 차기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많았으므로.
“다음 평가전에 마틴 피터스는 반드시 차출해야겠어.”
“제프 허스트의 활약도 좋아요. 연계도 잘하고, 찬스를 만드는 위치 선정 능력도 좋아요.”
부지런히 수첩에 메모하는 램지 감독과 그의 보좌 해롤드 셰퍼드슨 코치.
관중들의 함성이 일어난 순간, 그들의 시선이 한 선수에게 꽂혔다.
「캡틴 리, 웨스트햄의 역습을 차단! 전진하는 데니스 로에게 패스를 밀어 줍니다. 로, 수비를 끌고 들어가며 힐킥, 캡틴 리가 달려들며 슛-! 골! 골입니다! 유나이티드, 선제골!」
후반 19분, 팽팽하던 경기가 기울어지는 골이 터졌다.
반지에 입을 맞추며 골 세리머니를 펼치는 이준영.
램지와 셰퍼드슨은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참, 서른이 넘었는데도 하락세라곤 보이지 않는 친구로군.”
“스탠리 매튜스도 그랬잖아요. 현재 풋볼 리그 선수들 중에 존 Y. 리가 몸 관리를 제일 잘한다고.”
“그러니까 웬만한 20대 선수들보다 더 잘 뛰어다니지.”
한때 삼사자 군단의 일원으로 월드컵 우승에 수훈을 세운 이준영의 변함없는 활약을 보고 있자니, 램지는 절로 아쉬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남의 선수지. 이봐, 해롤드, 만약에 한국이 우리 조에 들어온다면 존 Y. 리를 누가 막게 하는 게 좋을까?”
“빅 던이나 잭 찰튼에게 맡겨야죠.”
같은 팀에서 준영을 잘 알고 있는 던컨 에드워즈, 그리고 리즈 유나이티드의 황금시대를 연 장신 수비수 잭 찰튼.
램지 감독의 보좌인 해롤드 셰퍼드슨이 생각하기에 저 아시아의 거인을 제대로 막을 선수는 그 둘밖에 없어 보였다.
오늘 경기에 뛰고 있는 마틴 피터스나 바비 무어도 나쁘진 않았지만, 피지컬에서 고전하곤 했다.
“뭐, 상대가 한국이면 그리 걱정할 게 있나요? 존 Y. 리 하나 빼면 다들 아마추어 수준일 텐데.”
한국이 같은 조에 들어오면 좋은 승점 공급원이 되어 줄 터.
하지만 램지 감독은 마냥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로마 올림픽 때 영국 대표팀을 맡았던 노먼 크릭 감독이 그렇게 만만하게 여기다 망신을 당했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당시 한국은 올림픽 전에 영국에 전지훈련을 와서 프로팀들과 연습 경기를 치르며 많은 준비를 했다.
아마 이번 월드컵에서도 비슷하게 준비할 것이다.
‘어쩌면 먹이라고 여겨 주길 바라고 있을지 모르지.’
존 Y. 리는 영국에 복귀하면서 월드컵에서 우승이 목표라고 기자들 앞에서 말했다.
사실 그렇게 발언한 배경이나 맥락은 따로 있지만, 그럼에도 대다수 축구인들이나 대중은 어이없어했다.
‘존 Y. 리는 실력만큼이나 허풍도 월드 클래스다.’
‘그는 세상에 ‘명백한 운명’이라는 것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1승을 하거나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한 번 9골을 먹어 봐야 그도 현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같은 반응을 보이는 건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남미도 마찬가지.
물론 램지 감독처럼 방심은 금물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 올림픽 때 한국의 선전이나 칠레 월드컵 예선 플레이오프에서 유고슬라비아가 고전했던 사례들을 지목했다.
그러나 그런 의견도 올림픽과 월드컵은 수준이 다르다는 둥, 그러니 유고슬라비아가 이번 월드컵에서 탈락한 거라는 둥의 반박이 날아들었다.
‘상대가 방심하면 그만큼 파고들 여지가 많아지지. 만약에 의도적으로 한 발언이라면…….’
그게 의도적인지 아닌지, 그리고 이준영의 발언이 터무니없는지 아닌지는 내년 월드컵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
마틴 피터스는 15세에 웨스트햄에 입단, 302경기에서 82골을 터트린 웨스트햄의 레전드 플레이어입니다.
1970년에 토트넘으로 이적했는데, 이때 이적료가 20만 파운드로 당시 잉글랜드 역대 최고 이적료였습니다.
1966년 5월 월드컵을 앞둔 시점에 유고슬라비아와의 평가전에서 국가대표 데뷔를 했고, 서독과의 월드컵 결승전에서 골을 넣기도 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의 알프 램지 감독은 조별 리그 중에 4-2-4가 아닌 4-1-3-2전술을 썼는데, 피터스는 그야말로 이 전술의 맞춤형 플레이어라 잉글랜드의 우승에 상당한 추진력이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