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75. 폭력 축구
2차전에서 한국과 북한의 선발에 변동이 있었다.
한국은 조정수를 빼고 센터백 김정석을 투입, 발 빠르고 풀백 포지션도 소화 가능한 김효에게 왼쪽 측면 수비를 맡겼다.
그리고 발목 상태가 좋지 않은 임국천을 대신해 김기복을 내보냈다.
한국이 소소하게 변화를 줬다면, 북한은 꽤 파격적으로 바뀌었다.
골키퍼 리창명과 박승진, 박두익, 한봉진, 림중선만 남고 절반 넘게 바뀌어 있었던 것.
“신영규도 뺐네.”
“이상하네요. 북한 수비수들 중에 제일 잘하던 놈이었는데.”
“부상당했나?”
경기 직전 북한 선수들에게 이유를 물어봤지만 아무런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하고 말 섞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다 쳐도 왜 못 잡아먹어 안달 난 표정으로 노려보는 거야?”
반드시 이기겠다는 의지가 표명된 적대감이라고 볼 수 없었다.
뭔가 진한 원망의 감정이 묻어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한테 지고 윗선에 엄청 까였나 봐요.”
“거참…….”
도대체 저쪽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준영과 한국 선수들은 그 의문을 풀지 못한 채 2차전 경기에 임했다.
“패스! 꾸물대지 말고 공을 넘겨!”
“조심해! 뒤에서 마크 붙는다!”
2차전은 시작부터 격렬했다.
북한 선수들이 1차전 때와 사뭇 다른 수준으로 거칠게 나왔기 때문.
경합 시 들이받고 걷어차는 건 예사.
전반 10분도 안 되어 충돌로 김기복의 이마가 찢어지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준영도 공중볼 경합에서 상대가 들이민 머리에 맞아 입술이 터졌다.
“씁, 이 자식들이 축구를 하자는 거야, 종합 격투기를 하자는 거야?”
그대로 당할 수 없었던 한국 선수들도 퇴장당하지 않을 선에서 맞대응했다.
거친 플레이는 유럽에서 전지훈련을 하며 충분히 익숙해진 데다, ‘북괴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투쟁심 때문이었다.
그래서 2차전 판정을 맡은 실바 심판은 연방 휘슬을 부느라 바빴다.
양 팀의 팀 닥터들 역시 부지런히 필드를 오가며 다친 선수들을 치료했다.
‘완전히 군대스리가 전투 축구구만.’
거칠고 완만하지 않은 경기 흐름.
하지만 준영은 어떻게든 정상적인 플레이를 진행하려 애썼다.
‘개싸움에 휘말려서 득 될 거 없어. 상대의 의도에 넘어가지 않고 우리 경기를 하는 게 중요해.’
이에 선수들이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게 다독이는 한편으로, 상대 진영으로 부지런히 침투 패스를 뿌렸다.
“간나 새끼!”
“어억!”
준영이 찔러 준 패스를 보고 쇄도하던 이희택이 한봉진의 깊은 태클에 나동그라졌다.
바로 휘슬이 울렸고, 한봉진은 심판에게서 구두 경고를 받았다.
그러자 한봉진과 북한 선수들은 거세게 항의하고 나섰다.
“왜 우리 반칙만 잡아내는 거이야!”
“남조선 괴뢰 놈들도 똑같이 발로 까고 때리는 거 안 보이네?”
“Stop! Be quiet!”
사실 한국 선수들도 파울을 저지르고 심판에게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1차전에 패하면서 마음이 급해진 북한 선수들의 눈엔 주심이 편파 판정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아우성을 치거나 말거나 준영과 한국 선수들은 이희택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냐? 발목을 세게 차인 것 같던데?”
“문제없어요. 직격으로 차인 건 아니니까.”
적절히 몸을 날리며 태클을 흘려 낸 덕분에 타격을 줄였다.
이희택이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는 사이, 준영은 파울이 일어난 지점과 골대까지 거리를 가늠했다.
‘이 정도면 직접 처리할 수 있겠군.’
오늘 프리킥 전담을 맡은 건 김기복과 이준영.
김기복은 주로 골대와 거리가 멀어 한 번 거쳐 가는 플레이를 할 때 차기로 했고, 준영은 골대와 거리가 가까우면 나서기로 했다.
“어깨 바싹 붙이라우! 오른쪽으로 더! 더!”
리창명의 수비벽 조정이 끝난 후, 살짝 물러나 있던 준영이 달려들며 공을 후려 찼다.
전매특허인 무회전 슛.
1차전 때와 달리 이번엔 리창명의 손끝에도 스치지 않고 골망을 세차게 흔들었다.
“들어갔다!”
“좋았어! 이러면 오늘도 이겼다!”
신나게 골 세리머니를 펼치는 준영과 한국 선수들.
한봉진은 핏발 선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비열한 간나 새끼들, 내 그냥 두지 않갔어!”
벼랑 끝으로 몬 것도 모자라, 귀퉁이를 잡고 매달리게 만든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하리라 다짐했다.
***
준영의 선제골이 터진 후, 북한의 플레이는 더욱 거칠어졌다.
선제골을 얻은 한국이 적절히 몸을 사리는 사이, 북한은 대대적인 반격을 펼쳤다.
‘와, 이놈들, 완전 모 아니면 도로군.’
북한은 미드필더를 없애고 공격에만 무려 7명을 투입하며 동점 골을 노렸다.
골문으로 패스를 찔러 주면 많은 공격수들이 동시에 쇄도하며 한국의 수비를 무너트리려 했다.
하지만 크로스의 낙하지점이나 패스 루트를 사전에 파악한 이준영과 김정석, 김청남이 번번이 그들의 공격을 끊어 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북한의 박숭걸 문화상은 눈살을 찌푸렸다.
“뭘 하고 있는 거이야? 왜 머릿수도 많으면서 골을 못 넣고 있어?”
박숭걸은 1차전에서 패한 명례현을 경질시켰다.
전술을 잘못 짠 데다, 선수 선발과 관리에도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
더구나 수령님이 하사하신 귀한 약을 부작용이 많다는 핑계를 대며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죄도 있었다.
그렇게 명례현을 끌어내린 후, 직접 대표팀을 지휘하며 전술을 짰다.
당연하게도 축구에 문외한인 그의 지도력과 전술이 먹힐 리 만무했다.
하지만 본인은 자신이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선수들이 불성실하다고 여겼다.
“비싼 밥과 약을 먹고도 힘을 쓰지 못하다니……. 이 반동 새끼들, 오늘도 지면 몽땅 교화소로 보내 버리갔어!”
박숭걸이 ‘아오지 드립’을 내뱉은 순간, 북한의 일점 집중식 공격이 마침내 빛을 발했다.
김정석이 걷어 낸 공이 멀리 가지 않고 북한 박승진의 발에 걸렸던 것.
망설이지 않고 때린 박승진의 슈팅은 그대로 골대 구석으로 날아갔다.
까앙-!
“어이쿠!”
골대를 맞고 나온 공을 박중환이 황급히 걷어 냈다.
그가 내찬 공은 차태성이 잡아 북한 진영으로 몰고 들어갔다.
수비가 별로 없었기에 그는 순식간에 상대 페널티 박스에 도달했다.
‘직접 처리할 수 있지만…….’
허둥지둥 달려 나오는 리창명 골키퍼를 본 차태성은 슬쩍 옆으로 패스를 흘려 주었다.
그러자 뒤따라 쇄도해 왔던 조윤옥이 무인지경이 된 골대 안으로 공을 밀어 넣었다.
“2 대 0이다!”
“이러면 이겼어! 본선 진출이라고!”
한국 선수들은 물론 취재하러 온 기자들도 신나서 방방 뛰었다.
벌어진 점수 차만큼 경기 흐름은 한국 쪽으로 기울었다.
더구나 흥분한 북한은 더욱 거칠게 대응하면서 연달아 파울을 냈다.
당연히 앞서가는 한국 쪽에선 이를 적절히 이용했다.
“아이고, 빨갱이 놈들이 사람 잡네.”
“엄살 부리지 말고 날래 일어나라!”
돌파하다 걸려 쓰러진 준영이 일부러 드러누워 시간을 끌었다.
그러자 파울을 한 북한 선수가 준영의 다리를 걷어찼다.
“이런 개새끼가 돌았나?”
“멀쩡히 일어날 수 있으면서 왜 엄살 부리네?”
양 팀 선수들이 몰려들었다.
바로 난투극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황급히 호각을 불면서 달려온 심판이 간신히 사태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이미 부글부글 끓어오른 상황은 쉬 가라앉지 않았다.
전반 42분, 미드필드 지역에서 공을 몰고 가는 한봉진에게 김기복이 마크를 붙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정강지도 가세했다.
경합 과정에서 발을 밟힌 한봉진이 주춤하는 사이, 김기복이 잽싸게 공을 빼내 갔다.
“이 간나 새끼들!”
이미 경기 시작 때부터 화가 단단히 나 있던 한봉진.
마지막 남은 인내심이 증발해 버린 그는 눈앞에 있던 정강지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날벼락을 맞은 정강지는 얼굴에 연달아 주먹을 맞았다.
“뭐, 뭐야!”
“저게 미쳤나!”
준영과 한국 선수들은 깜짝 놀라 달려왔다.
북한 선수들도 몰려들면서 양 팀 간에 한바탕 드잡이가 벌어졌다.
“시벌 놈들, 실력으로 안 되니까 주먹질이냐? 진짜 한판 떠 볼까?”
“너희가 먼저 수작질을 부리지 않았네!”
“뭔 개소리하고 있어? 우리가 뭘 어쨌다고?”
언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심판이 나섰다.
삐익! 삑!
귀청이 나갈 정도로 휘슬을 날카롭게 분 실바 심판은 선수들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주동자인 한봉진에게 다가갔다.
필드에서 대놓고 상대 선수를 두들겨 팼으니 어떤 판정이 나올지는 뻔했지만…….
“지럴하지 말라! 퇴장시킬 거면 내 발을 밟은 아새끼부터 퇴장시키라우!”
심판의 멱살을 잡고 입에 문 휘슬을 낚아채 내던진 한봉진.
대차게 선을 넘은 그의 행동을 북한 선수들이 만류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지는 가운데, 경기장 통제를 하고 있던 캄보디아 경찰들이 달려 들어와 한봉진을 끌어냈다.
그 광경을 본 월터와 한국 대표팀 스태프들은 혀를 찼다.
“나 이거야 원…….”
“한국에선 이런 걸 두고 개판이라고 하죠.”
잠시 후, 실바 심판은 경기를 중단시켰다.
거칠어진 경기가 진정되기는커녕 점점 험악해지고 있는 터라, 이대로 진행이 불가능하다 보았기 때문.
그렇게 예선이 끝나며 월드컵 본선 티켓은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에게로 돌아갔다.
***
“이겼다!”
“드디어 본선으로 간다!”
숙소로 돌아온 한국 대표팀은 신나게 축배를 들었다.
12년 만의 월드컵 진출.
가장 기뻐한 사람은 최정민이었다.
4년 전 예선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던 그에게 함흥철이 놀리듯이 말을 건넸다.
“어이, 황금발, 울고 있냐?”
“안 울어. 이 기쁜 날에 왜 울겠어.”
“솔직히 말해 봐. 현역 은퇴한 거 후회되지?”
“후회는 무슨……. 너나 빨리 은퇴해. 동생들한테 민폐 끼치지 말고!”
“내가 왜? 난 아직 팔팔하다고!”
준영은 아웅다웅하는 형님들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때 정보부 요원이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이준영 선수, 맨체스터의 본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맨체스터의 본가에서요?”
“예, 이 선수에게 긴히 알릴 일이 있다고 하던데요.”
준영의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요원은 내심 그리 우려했지만, 준영은 그리 여기지 않았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모즐리의 본가’로 연락이 왔을 테니까.
‘맨체스터의 본가’는 MI6 쪽에서 연락할 때 보내는 암호였다.
“예, 존 Y. 리입니다.”
준영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 선수, 월드컵 본선 진출을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축하해 주려고 연락한 건 아닐 터.
예상대로 MI6에서 새로운 정보들을 알려 주었다.
(최근 캄보디아 경찰과 북한 정보원들의 감시가 심해졌지요?)
“예, 한국 정보부에서는 혹시 우리 선수들을 납북할 목적이 아닌가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쪽에서 그럴 의도는 없습니다. 그들이 그런 행동을 취한 건 탈주자 때문입니다.)
“탈주자요? 그럼 혹시…….”
오늘 출전하지 않은 선수.
그리고 북한 선수들의 적대적인 반응과 이해할 수 없는 오해.
준영은 이내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 파악했다.
***
1. 실제 축구 경기 중에 죽빵 3연타를 날린 건 우즈베키스탄의 삼시디노프라는 선수입니다.
현재 포항에서 뛰고 있는 심상민 선수가 킹스컵 우즈벡전에 출전했다가 두들겨 맞았죠.
저 사건으로 삼시디노프는 1년간 경기 출전 금지를 당했고, 우즈벡 감독도 선수 관리를 못했다고 경질당했습니다.
삼시디노프는 징계가 끝난 후에 다시 선수 생활을 하고 있는지, 현재는 FK 네프치 페르가나라는 우즈베키스탄 리그 팀에서 뛰고 있더군요.
2. 북한 축구 선수들은 실제로 판정 문제 때문에 주심에게 손찌검을 한 적이 있고, 이 때문에 퇴출 징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 바람에 1983년 멕시코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할 수 없어 출전 티켓이 우리나라에게 돌아갔었죠.
그리고 당시 박종환 감독은 U-20 대표팀을 4강에 올려놓으며 명장 반열에 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