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73화 (373/400)

Round 373. 가시덤불을 뚫고서

1965년 11월 21일.

프놈펜 경기장에서 아시아-오세아니아 예선 토너먼트 결승 1차전이 열렸다.

경기 시작 한 시간 전, 남북한 양 팀의 감독은 최고의 활약을 보여 줄 것을 기대하는 선수들로 출전 명단을 꾸렸다.

<대한민국>

GK:함흥철

DF:박중환, 김효, 김청남, 조정수

MF:이준영(주장), 임국천

FW:차태성, 이희택, 조윤옥, 정강지

<북한>

GK:리창명

DF:하정원, 신영규, 림중선, 오윤경

MF:한봉진, 림승휘

FW:박승진(주장), 박두익, 김승일, 리동운

양 팀 모두 4-2-4 포메이션으로 나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원로(?)급인 함흥철을 필두로 신구 조화를 이룬 한국과 다르게 북한은 대부분 20대 초중반의 선수들이 주축이라는 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30년대 출신 선수들이 대부분 전쟁 중에 월남을 해 버린 탓이다.

대표적으로 현재 한국 팀 코치인 최정민이나 현역 선수인 차태성, 박중환은 이북이 고향이었다.

“왜 그리 뜨거운 눈길로 바라보냐? 난 유부남이야. 이상한 취향 없다고.”

선수 대기실에서 신영규가 무섭게 노려보자 준영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북한 주장인 박승진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닥치라우, 종간나 새끼야! 시답잖은 이간질이나 하고, 덩치가 아깝구만!”

“오, 네가 지주의 자식이었냐?”

“무슨 개소리를 하는 기야! 내래 뼈대 있는 로동자 집안 출신이야!”

“그러셔? 큰소리치는 놈이 범인이라고 하던데?”

박승진이 발끈해서 고함치려는데, 박두익이 그를 만류하고 대신 준영에게 쏘아붙였다.

“이보라, 리준영이, 우릴 건드려서 임자에게 좋을 거 없어. 발모가지 무사하고 싶거든 주둥이 조심하라.”

그 협박에 준영이 받아치려는 순간, 김효와 박중환이 나서서 쏘아붙였다.

“뭐라고 씨불여 쌌노, 이 빨갱이 새끼가. 뚝배기 한번 박살 나고 싶나?”

“너희 발목이나 조심해. 난 오늘 한 놈 확실히 담가 줄 작정을 하고 나왔으니까.”

언쟁이 격해지다 급기야 드잡이 일보 직전까지 갔다.

결국 심판과 경기 진행 요원들이 나서서 양 팀 선수들을 뜯어말려야 했다.

“또 한 번 이러면 양 팀 모두 실격시킬 테니 알아서 처신하도록!”

심판의 엄포에 양 팀 선수들은 말다툼을 멈췄다.

경기 시작 시간이 다가오자 그들은 심판의 인솔을 받아 필드로 입장했다.

그리고 군복에 훈장을 건 중년의 사내가 양 팀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해 주며 선전을 기원했다.

고개를 갸웃한 조윤옥이 준영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누구죠? 높으신 양반 같아 보이기는 한데요?”

“캄보디아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일 거다.”

시아누크는 한국 선수들에게는 건성으로 악수를 해 준 것과 달리, 북한 선수들은 마치 자국 선수인 양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그 모습을 본 한국 선수들은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무슨 왕이 빨갱이들을 좋아하죠?”

“아직 빨간 맛을 제대로 못 봐서 저러지.”

앞으로 피로 물들 캄보디아의 미래, 그리고 자식과 손자들이 살해당하는 국왕의 비참한 운명.

이를 떠올린 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

양국의 국가 제창 후, 양 팀 주장은 동전을 던져 진영을 정했다.

경기 시작 직전 준영은 선수들과 둥글게 어깨동무하고 전의를 고양시켰다.

“자, 곧 있으면 휘슬이 울린다. 여기서 승리하는 팀이 본선으로 간다.”

준영의 말에 선수들은 들뜬 기색을 보였다.

아프리카 축구 연맹이 끝내 예선을 보이콧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

‘루스 영감탱이가 이런 식으로 도움(?)을 주다니…….’

아프리카 축구 연맹은 인종 차별 국가 남아공을 두둔하는 FIFA와 그 수장인 스탠리 루스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문제는 루스가 이를 달래기는커녕, 남아공을 중심으로 남아프리카 축구 연맹을 발족시키려 한 것.

여기에 출전 티켓을 0.5장으로 해서 아시아-오세아니아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하는 점도 아프리카 축구 연맹에게 큰 불만이었다.

결국 아프리카 국가들은 예선을 포기했고, 아시아-오세아니아 예선의 승자가 본선으로 직행하게 되었다.

“알겠나? 1차전에서 결정짓는 거다!”

“파이팅! 대- 한민국!”

우렁차게 함성을 내뱉은 선수들이 흩어져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윽고 휘슬이 울리며 북한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가자, 날래 한 골 넣어 보자!”

“남조선 아새끼들의 방자한 면상을 뭉개 주는 기야!”

탐색전은 불필요하다는 듯, 북한 선수들은 재빠르게 움직이며 한국 진영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미드필드 지역에서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오늘 경기 윙어로 출전한 차태성과 정강지는 미드필드 지역으로 내려와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했다.

위협적인 헤딩 경합과 높은 태클, 팔꿈치를 휘두르는 거친 플레이 등등.

양 팀 모두 상대에게 거친 마크를 펼쳤다.

이렇다 보니 패스가 세 번 이상 연결되기 힘들었다.

삑-! 삑!

연달아 울려 퍼지는 휘슬과 뚝뚝 끊어지는 경기 흐름.

준영의 눈살이 저도 모르게 구겨졌다.

‘휘슬을 너무 자주 부는 거 아냐?’

말레이시아 국적의 패트릭 니스 심판은 조금만 경합이 거칠다 싶으면 바로 파울로 판정했다.

이 점은 한국 선수들만 불만스러운 게 아니라, 북한 선수들도 그랬는지 짜증을 냈다.

“거참, 호각을 못 불어 죽은 귀신이 씌었나 보구만기래.”

“야 인마, 유물론자 빨갱이 주제에 웬 귀신 타령이야.”

준영은 불만스럽긴 했지만, 한편으로 이해는 되었다.

경기 전부터 양 팀이 과열되어 패싸움이 날 뻔했으니, 최대한 사전에 진화해야 한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시간이 흐르면서 거친 경합이 약간 줄어들긴 했다.

‘그나저나 북한 놈들 체격에 비해 힘이 세군. 어지간해선 밀리지 않으니…….’

고산 지대에서 특수부대 뺨치는 훈련을 했다는 정보를 들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강했다.

물론 그렇다고 준영이나 한국 선수들이 쉬 밀리지는 않았다.

관중들도 북한이 공을 잡을 때마다 환호성을 터트릴 정도로 일방적이었지만, 한국 선수들은 흔들리지 않고 경기를 이어 나갔다.

삐익-

전반 22분, 임국천이 찔러 준 패스를 받아 돌파하던 정강지가 림승휘의 팔에 잡혀 쓰러졌다.

북한 페널티 박스 외곽에서 얻은 프리킥 찬스.

준영이 킥을 처리하기 위해 공 앞에 섰다.

“직접 가능하겠어? 거리가 좀 먼데?”

“맡겨 두라고.”

차태성에게 자신 있게 미소를 지은 준영은 살짝 물러나서 발을 구르다 달려들며 슛을 때렸다.

뻐어엉-!

발등에 제대로 맞은 순간, 폭음과 함께 공이 북한 수비벽을 훌쩍 넘어갔다.

뚝 떨어지는 궤적의 무회전 슈팅에 깜짝 놀란 골키퍼 리창명은 황급히 공이 꺾이는 방향으로 왼손을 뻗었다.

‘걸렸…….’

그러나 왼손 펀칭만으로는 강력한 슈팅을 저지하기 힘들었다.

리창명의 손에 맞고 떨어진 공은 그대로 골라인 안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 안 돼!’

재차 몸을 날린 리창명은 바운드된 공을 쳐 냈다.

멀리 가지 않은 그 공을 신영규가 다가와 왼쪽 터치라인 밖으로 걷어 냈다.

“들어갔어. 골인이라고!”

“내가 들어간 거 봤다고!”

한국 선수들은 방금 준영의 슈팅이 골라인을 넘어갔음을 주장했다.

하지만 심판은 골로 인정하지 않았다.

골라인을 완전히 넘어간 건 아니라고 판단한 것.

그러자 차태성은 골을 도둑맞았다는 생각에 펄쩍 뛰었다.

“야! 들어간 거 맞는다고!”

“태성아, 그만해라. 야! 중환이, 심판한테서 떨어져!”

자칫하면 심판 멱살을 잡겠다 싶었던 준영은 차태성과 박중환을 만류하고 나섰다.

억울한 마음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꾹 눌러 참고 있었다.

이 논란으로 경기 흐름이 뒤틀려 버리면 그게 더 손해였으니까.

‘쳇, 본선으로 가는 길이 수월하지 않구만.’

마치 가시덤불로 뒤엉킨 길을 전진해 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준영은 조금씩 그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리라 마음먹었다.

***

준영의 프리킥 이후, 양 팀의 공방은 계속 이어졌다.

한국이 조윤옥과 이희택의 빠른 발과 돌파력으로 수비를 흔들면, 북한은 박두익과 박승진의 날카로운 슈팅으로 응수하곤 했다.

“유효 슈팅은 많이 나오지 않는군.”

“양쪽 다 마크와 견제가 심해.”

“이건 뭐 축구인지, 격투기인지…….”

양 팀 수비수들의 활약도 뛰어났다.

신영규는 마치 예측한 것처럼 한발 앞서서 조윤옥과 이희택의 패스와 돌파를 끊어 냈다.

한국 대표팀의 공수를 조율하는 준영은 쉴 새 없이 소리를 치고 선수들을 지휘하며 북한의 공격을 차단했다.

“강지야, 좀 더 앞쪽에서 압박해! 패스가 자꾸 들어오잖아!”

“너무 물러서지 말고 라인 맞춰!”

“야! 박두익이 혼자 있잖아! 빨리 마크 붙어!”

그렇게 조율하면서 북한 공격진들에게 패스를 뿌리는 한봉진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에이스인 박승진 역시 위험한 지역에서 찬스를 잡지 못하게 단단히 견제했다.

“썅, 비키라!”

“GR 말고 네가 직접 빠져나가 봐.”

패스받은 박승진은 앞을 가로막은 준영을 제치려 애썼다.

하지만 페인트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고, 잽싸게 좌우로 치고 나갔다 싶더라도 또 그 앞에 떡하니 막아서 있곤 했다.

‘덩치는 곰 같은 게 왜 이리 빨라?’

‘네가 보통내기는 아니다만, 펠레나 에우제비우, 디 스테파노에 비하면야…….’

박승진의 탄력적인 움직임은 확실히 세계 수준.

하지만 경험적인 측면에서 월드 클래스 선수들에 부족한 면이 있었다.

준영의 입장에선 방심하지 않으면 충분히 마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안 되갔어. 나 혼자서 이 작자를 뿌리치긴 무리다.’

이렇게 판단한 박승진은 뒤쪽에 접근해 오던 림승휘 쪽으로 공을 보냈다.

그리고 리턴 패스를 받기 위해 재빨리 한국 문전으로 달려 들어갔다.

하지만 패스는 오지 않았다.

림승휘가 직접 공을 몰고 페널티 박스로 돌진했기 때문.

“야! 저 자식 막아!”

“슛하라! 슛!”

림승휘가 슛을 시도하는 순간, 오른쪽 풀백 박중환의 태클이 들어왔다.

발목을 제대로 걷어차인 림승휘가 필드에 나동그라졌다.

삑!

“아싸, 벌칙차기다!”

림승휘는 발목이 아픈 것도 잊고 쾌재를 불렀다.

사고를 친 박중환은 어쩔 줄을 몰랐다.

“신경 쓰지 마. 경기하다 보면 이럴 수도 있지.”

준영은 박중환을 다독이는 한편, 급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호전시키려 애썼다.

“아직 시간 많아. 더구나 우리에겐 백전노장 철벽 수문장인 함흥철 형님이 있잖냐.”

준영에게 지목당한 함흥철은 맡겨만 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감이야 있었지만, 그래도 떨쳐 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페널티킥 잘 막는 비법? 딴거 없어. 그냥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움직임을 봐.’

대표팀 골키퍼 코치 버트 트라우트만이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페널티킥은 키커 쪽이 유리하다.

그만큼 키커의 부담이 크고, 골키퍼는 못 막아도 그만이다.

‘물론 막으면 영웅이 되지!’

키커로 나온 박두익을 주시하던 함흥철.

박두익이 슛을 하는 순간, 그는 곧장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힘차게 뻗은 두 팔이 맹렬히 날아가던 공을 공중으로 튕겨 냈다.

그리고 남북의 희비가 교차되었다.

***

다들 아시겠지만, 골라인을 완전히 넘어야 골인입니다.

오랜 세월 이걸 판단하는 건 전적으로 심판의 몫이었습니다.

촬영 기술이 진일보된 21세기에 와서도 공이 분명 골라인을 넘었음에도 인정받지 못한 경우가 있었지요. 그것도 월드컵에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램파드의 골이 그렇게 오심으로 판정되어 버리면서 논란이 됐었지요.

1966년 월드컵 서독과 잉글랜드의 결승전에서 제프 허스트의 골이 골라인을 넘지 않았는데 골로 인정된 적이 있어, 이때 업보를 2010년에 받은 거라고들 얘기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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