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72. 불순분자
“この野郎!”
수비수 카타야마 히로시가 박승진을 막아섰다.
하지만 가볍게 페인트를 넣은 박승진은 그를 간단히 제쳐 버렸고, 카타야마는 뒤쫓다가 그만 발이 꼬여 넘어졌다.
그렇게 박승진이 박스 안으로 들어오자, 골키퍼 호사카 츠카사가 황급히 각을 좁혔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박승진이 휘어 찬 슈팅은 호사카의 손끝을 스치며 골대에 꽂혔다.
“와, 저 자식 저거…….”
“보통 발재간이 아니구만.”
한국 선수들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일본 수비수들이 일부러 놔준 것도 아닌데, 그걸 혼자서 뚫고 들어가 골까지 성공시켰으므로.
“결승전에서 만나면 골치 아프겠어.”
“흥, 그래 봤자 준영 형님 앞에서라면 고양이 앞의 쥐가 될걸. 안 그래요, 형님?”
조윤옥의 말에 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진지한 눈길로 박승진의 플레이를 지켜볼 뿐.
‘한 번에 빠르고 간결하게 휙휙 제치고 나가는군. 근육의 탄력이 좋으니 저런 움직임이 나오는 거겠지.’
신장이 작은데도 점프력이 좋은 이유 역시 탄력이 좋아서였다.
마치 아시아 선수가 아닌 아프리카 선수를 보는 듯했다.
“우와, 또 골이다! 해트트릭이야!”
“중거리 슛 능력도 좋구나.”
박승진이 중거리 슛으로 또 한 골을 추가하며 북한은 6 대 1로 점수 차를 벌렸다.
그리고 이후 북한의 일방적인 공세가 계속되었다.
지친 데다 사기가 떨어진 일본 선수들은 역습은커녕 황급히 공을 걷어 내는 데 급급했다.
필드 밖에서 오카노 슈니치로 감독이 목이 쉬어라 다그쳐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경기 종료 직전, 한봉진의 슈팅이 골대를 맞고 나온 것을 박두익이 머리로 밀어 넣으며 최종 스코어 7 대 1로 경기가 끝났다.
준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력 분석관인 로저 바인에게 다가갔다.
“로저, 전부 녹화해 뒀죠?”
“물론이지. 반대편에서도 박 코치가 찍고 있어.”
당장 사흘 후에 있을 호주와의 2차전을 준비해야 하지만, 결승전도 대비해 둬야 했다.
시간은 많지 않고, 상대는 예상했던 것보다 강했으므로.
***
“관중석에 있는 남조선 아새끼들 표정 봤네?”
“크크크, 입을 다물디 못하더구만기래.”
시원하게 일본에 대승을 거두고 라커룸으로 돌아온 북한 선수들.
그들이 희희낙락하고 있을 때, 선수단 호위와 통제를 맡은 보안국 요원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깐깐한 인상의 사내가 뒤이어 나타났다.
‘박숭걸 문화상이다!’
‘캄보디아에 와 있었나? 우리 경기를 보러?’
북한의 예술과 체육, 관광 등을 담당하고 있는 문화성 최고 수장인 문화상.
이미 출국 전에 선수들은 그와 만난 적이 있었다.
“문화상 동지, 우리 공화국 선수들이 민족의 철천지원수 일본을 박살 내 줬습네다. 칭찬 좀 해 주시지요.”
명례현 감독의 요청에 박숭걸은 대꾸하지 않고 있다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남조선은 일본에게 10 대 0으로 이겼었다고 하던데?”
“예? 그거이 4년 전에…….”
“우리 공화국 선수단이 그때 남조선보다 더 강하지 않나! 남조선은 동경에서, 적의 심장부에서 대승했어. 그런데 동무들은 뭔가?”
중립 지역인 캄보디아에서, 그것도 캄보디아 인민들의 열성적인 응원을 받고도 남조선보다 골을 더 넣지 못하다니.
박숭걸은 그 점이 불만스러웠다.
“후반 시작할 때 얼 빼고 있다가 왜놈에게 한 골 얻어맞기도 했지. 그런 정신머리로 어케 본선에 가겠네?”
질책당한 수비수 신영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건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위대한 수령 동지께서 동무들에게 얼마나 많은 지원을 했나. 소련에서 귀한 약도 구해서 주시지 않았나. 그런데 남조선보다 못해 놓고 칭찬을 해 달라?”
“문화상 동지, 그 골이라는 게 그리 쉽게 들어가는 게 아니라…….”
“어허-! 쉽게 넣을 수 있게 혁명 정신을 투철히 해서 노오오오력을 했어야지!”
높으신 분의 호통에 명례현은 더 이상 반박을 하지 못했다.
선수들 역시 불만을 누른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예선 끝날 때까지 지켜보갔어. 그러니 똑바로들 하라!”
한바탕 라커룸을 뒤집어 놓은 문화상이 떠난 후, 끝내 분을 참지 못한 한봉진이 맨주먹으로 철제 라커를 내리쳤다.
“썅, 종간나 새끼! 축구에 대해 뭘 안다고 시답잖은 훈수질이네!”
“참으라우, 봉진이.”
“참고 있는 겁네다! 마음 같아서는 문화상이고 뭐고 머리통을 박살 내 버렸을 거인데…….”
명례현은 길길이 날뛰는 한봉진을 만류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승하고도 분위기가 뒤숭숭해져 버릴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과연 이대로 예선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 불안해졌다.
***
사흘 후 2차전.
한국 대표팀은 일부 주전을 제외하는 등, 여유롭게 호주를 상대했다.
앞서 대패했던 호주는 어떻게든 선제골을 만들어 내려 애썼다.
하지만 조정수, 김효, 김청남, 박중환이 지키고 있는 한국 수비진은 견고했다.
오히려 공격에 너무 치중하다 번번이 한국 공격수들에게 뒷공간을 내주고 말았다.
“정강지의 활약이 좋군요.”
“체격이 좀 왜소하긴 해도 스태미나 하나는 굉장한 친구니까.”
박병석 코치의 추천으로 뽑게 된 고려대 출신의 공격수 정강지.
그는 대표팀의 셔틀런 훈련에서 김효나 김청남, 차태성, 이준영을 제치고 가장 마지막까지 남을 정도로 체력이 뛰어났다.
고려대에서는 센터 포워드를 맡았지만, 월터는 그의 체력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윙어로 기용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정확했다.
정강지는 측면을 활발히 오가며 호주의 빈 공간을 찾아 들어가고, 상대 수비수가 공을 잡았을 때는 적극적으로 견제했다.
수비 가담도 매우 적극적이라, 그에게 마크당한 호주 공격수 샤인플러그가 짜증을 낼 정도였다.
“근데 결정력은 좀…….”
“뭐, 많은 활동량으로 동료에게 좋은 기회들을 만들어 주고 있으니 된 거지.”
월터 감독은 결승전에서도 정강지를 기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왕성한 활동량으로 북한 수비진에 부담을 줄 수 있는 선수였으니까.
“차태성 대신 출전한 박중환도 잘하는데요?”
“저 친구 별명이 악바리라고 하더군. 투지나 근성은 정말 대단해.”
그 악바리 박중환이 공을 빼앗아 호주 진영으로 내달렸다.
그가 올려 보낸 크로스는 중앙으로 뛰어 들어오던 준영이 헤딩으로 내리찍으며 골문을 갈랐다.
“2 대 0인가. 이제 결승은 확정이군.”
조윤옥의 선제골과 이준영의 헤딩 추가 골, 그리고 이후 정병탁의 골까지 터지며 한국은 3 대 0의 완승으로 경기를 끝냈다.
경기가 끝나자 기자들이 공동 취재 구역으로 몰려들었다.
“윈터보텀 감독님, 북한과 결승에서 맞붙게 되었는데 어떻게 대비하실 생각이신지?”
“수비 중심으로 경기하실 겁니까?”
북한은 앞선 경기에서 일본을 무려 8 대 0으로 이겼다.
사흘 후에 있을 결승전은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그들은 주전을 풀가동하며 공격을 퍼부었다.
악착같이 득을 탐하는 그들의 모습에 월터는 저도 모르게 섬뜩함을 느낄 정도였다.
“상대가 골을 많이 넣었다고, 우리에게 그리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북한전에 최종적으로 어떤 작전을 짤지 코치들과 더 논의해 봐야 합니다.”
“아직 결정 난 게 없다는 말입니까? 대책이 없는 건 아니고요?”
빈정대듯이 물음을 건넨 기자는 로동신문의 특파원 문상철.
월터는 잠시 낯빛을 굳혔다가 대답했다.
“대책은 있습니다. 다만 결승 경기들이 끝나고 이야기할 수 있으니 양해 부탁합니다.”
“그 대책이란 게 리준영 선수인 겁니까?”
문상철은 집요하게 물음을 건네 왔다.
그는 다른 기자들의 눈총에 아랑곳하지 않고 감독의 옆자리에 있는 준영에게로 질문을 던졌다.
“리준영 선수, 우리 공화국 선수들의 실력을 본 소감이 어떠십네까?”
“정말 잘하더군요.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습니다.”
순순히 실력을 인정하는 그의 발언에 문상철도, 동정을 살피러 왔던 보안국 요원들도 어리둥절해했다.
대체 무슨 수작인가 싶던 가운데, 준영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듣자니 북한 대표팀도 차별 없이 선수를 선발했다고 하더군요. 하긴 지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배제하고 그랬으면 실력 있는 선수들이 모일 수 없었겠죠.”
“무슨 개소리야! 지주의 아들이 우리 공화국 축구단에 있다니!”
문상철이 저도 모르게 버럭 언성을 높였다.
격분한 그의 반응에 준영은 일부러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였다.
“어? 아니었습니까? 제가 듣기론 그랬는데…….”
“그런 일 없소!”
“아, 그랬군요. 지주의 아들은 선발이 안 되는 거군요. 혁명 사회라는 공산 국가에 연좌제 같은 봉건적인 악습이 남아 있을 줄이야.”
문상철의 얼굴이 또 한 번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지금 준영의 말을 인정하면 자신들은 봉건제의 악습을 유지하고 있는 놈들이 되는 거니까.
그것도 여러 외신 기자들 앞에서.
“그, 그런 게 아니오! 지주의 아들이라는 출신 성분을 가진 선수가 없다는 것뿐…….”
“출신 성분이요? 와, 그렇게 분류해 놓고 있는 겁니까?”
“아니요! 그런 거 없소!”
단단히 무안을 당한 문상철은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보안국 요원들 역시 마찬가지.
그들의 굳은 표정을 본 준영은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예상대로 MI6에서 알려 준 정보는 적잖은 파문을 일으킬 듯했다.
‘자, 이제 어떤 결정을, 어떤 대처를 하려나?’
불은 질러 놨으니, 이제 느긋하게 Good이나 보면서 떡이나 먹으면 되었다.
***
준영의 인터뷰는 북한 대표팀에도 알려졌다.
문상철 기자가 명례현 감독을 찾아와 추궁하면서 소문이 난 것.
“지주의 아들이 대표로 선발? 거 말도 안 되는 소리디.”
“그런 불순분자가 어케 뽑힌다고 기래? 시답잖은 소리로 흔들어 놓으려 들다니, 리준영이도 치졸한 잔꾀를 부리는구만.”
“하하하, 그만큼 우리가 무섭다는 뜻 아니갔어?”
대다수 선수들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이보라, 영규, 너는 어떻게 생각하네?”
“응? 뭐, 뭐가?”
동료들에게 지목당한 수비수 신영규는 화들짝 놀랐다.
그의 반응에 동갑내기 수비수 오윤경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왜 놀라고 기래?”
“그게… 딴생각을 좀…….”
“애인 생각을 하고 있었네? 하기야 외국에 나온 사이에 바람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갔지.”
아무것도 모르고 쿡쿡 찔러 대는 오윤경의 말에 신영규는 그저 웃음을 지을 뿐.
하지만 그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제길, 어떻게 안 거지?’
자신이 지주의 아들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전무했다.
비밀을 아는 부친의 지인들은 대부분 죽거나 숙청당해 소련과 중국으로 쫓겨났다.
‘생각해 보면 딱히 나라고 지목된 건 아니지.’
어쩌면 동료 선수들 중에 자신 말고도 지주의 아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려 해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반동의 자식이 공화국 대표로 선발된 것을 수치와 모독으로 여길 자들이 있을 테니까.
만약에 문화성에서 선수들의 출신 성분을 조사하기 시작한다면 자신의 운명은…….
‘이기면 돼! 이기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나중에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일단 승리하면 공화국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은 증명된다.
하지만 과연 남조선을 이길 수 있을지?
그 주장인 리준영은 레프 야신이나 소련의 유명 선수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할 정도의 월드 클래스 선수 아닌가.
본의 아니게 막다른 길에 몰린 신영규는 남몰래 탄식을 내뱉었다.
***
정강지 선수는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양지 축구단, 신탁은행 등에서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 한일전에서 대활약을 펼치며 당시에 명성을 날린 선수죠.
얼굴도 꽤 잘생겨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하는데, 현재 수원 삼성의 정승원 선수와 비슷한 미남 하드 워커 플레이어였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