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71. 호랑이와 천리마
방콕에서 비행기를 갈아탄 준영 일행은 약 한 시간 후 결전지인 프놈펜에 도착했다.
“휴, 덥다, 더워…….”
비행기에서 내린 준영은 뜨거운 햇살에 재킷을 벗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무더위가 참 낯설게 느껴지는군.’
21세기에서 1957년에 떨어진 이후로 영국 기후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모양.
그렇게 기후에 적응 못하는 건 조윤옥과 차태성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고, 이 나이에, 이런 날씨에 공을 차야 한다니…….”
“태성이 너 왜 노인네같이 구시렁거리냐?”
“이봐, 캡틴 리, 우리 나이면 축구계에서 충분히 늙다리라고.”
준영과 차태성은 서른이 넘었다.
여전히 대다수 선수들이 30대 초반에 은퇴하는 게 현실이다 보니 이들도 팀에서 왕고로 대접받고 있었다.
물론 진짜 앓는 소리를 해야 할 정도로 체력이 떨어지진 않았다.
준영은 물론 차태성도 소속 팀이나 대표팀에서 체력 상위권을 달리고 있으니까.
“캡틴 리다! 캡틴 리가 왔다!”
“캡틴 리, 인터뷰 좀 부탁합니다.”
준영 일행이 공항 입국장을 통과하자, 기자들이 벌 떼같이 몰려왔다.
이번 아시아 예선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로 한국과 호주, 일본 외에도 다른 나라 기자들도 제법 많았다.
자국 대표팀이 출전하지 않는 캄보디아 기자들 역시 취재에 열을 올렸다.
“역시 우리 캡틴 리 선생께서는 국제적 인사란 말이지.”
“어, 근데 우리 쪽으로도 몰려오는데요.”
준영보다 인지도는 낮았지만, 차태성이나 조윤옥도 아시아 올스타로 선정된 적이 있는 스타 선수.
여기에 이희택 역시 아시아 축구의 떠오르는 별로 주목받고 있었다.
덕분에 다들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대답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리희택 선수, 선수의 부친은 의용대 출신으로 월북을 했지요?”
북한 기자가 불쑥 건넨 질문에 이희택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부친의 월북 문제는 그에게 있어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는 것이었으니까.
‘저 자식, 예전에 도쿄에서 봤던 놈이잖아.’
준영은 희택에게 질문을 건넨 북한 기자를 노려보았다.
이름이 문상철이라고 하던가.
분명 칠레 월드컵 아시아 예선이 끝나고 자신에게 질문을 건넸던 작자였다.
“부친을 만나고 싶지는 않습네까? 지금 부친 리용진 씨는 황해도 신계군에서…….”
“만나고 싶다고 하면 만나게 해 줄 겁니까?”
기자의 물음에 대답하고 나선 건 이희택이 아니라 준영이었다.
“어떤 식으로 만나게 해 줄 겁니까? 도쿄 올림픽 직전에 신문준, 신금단 부녀가 그랬던 것처럼 딸랑 7분 상봉시켜 주고 애간장을 끓게 하려고?”
“그건…….”
“일개 기자 주제에 권한이 있기나 합니까?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면 언급하지 마십쇼. 희망 고문이 제일 나쁜 짓이니까.”
말을 마친 준영은 선수들을 데리고 바로 차에 올라탔다.
무안을 당한 문상철은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준영을 노려보았다.
‘뒤넘스러운 간나 새끼 같으니! 우리 공화국 축구단에 박살이 난 뒤에도 으스댈 수 있는지 두고 보갔어!’
그때 구겨진 낯짝을 반드시 카메라에 담아 주리라.
그리 다짐하는 문상철은 이를 빠득빠득 갈아붙였다.
***
공항을 떠난 준영 일행은 한국 대표팀이 묵고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월터 윈터보텀 감독을 필두로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나와서 반겼다.
“오는 동안 별일 없었고?”
“북쪽에서 온 개 한 마리가 좀 짖더군요.”
“개?”
“그런 게 있습니다. 그보다 다들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준영의 물음에 월터는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문제없어. 한국의 여름도 이 정도로 더운 데다, 8월에 말레이시아 메르데카 컵에 출전하면서 동남아 기후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해 봤으니까.”
물과 음식이 좀 낯설긴 하지만, 한국에서 실어 온 음료와 통조림 식품들이 있어서 그럭저럭 해결되고 있다고.
“그 통조림 식품들, 한국에 있는 자네 회사에서 만든 거지?”
“예, 고국의 음식을 그리워할 미국과 일본의 교포들을 위해 소량으로 생산하고 있죠.”
소고기 장조림, 두부 꽁치조림, 콩자반, 멸치볶음, 김치와 장아찌, 된장과 고추장 등등.
김치같이 소금기가 많은 음식은 깡통을 녹슬게 해서 골치였지만, 기술자들이 플라스틱 수지를 깡통 안쪽에 코팅하는 걸로 해결했다.
그럭저럭 맛도 괜찮고 오래 보관할 수 있어 현재는 월남 파병 부대 전투 식량 메뉴로도 납품하고 있었다.
“아무튼 실전 대비 훈련만 하면 되겠군요.”
“그래, 자네들이 합류하면서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게 되는 셈이지.”
다음 날, 준영과 해외파 선수들은 바로 팀 훈련에 가세하여 발을 맞췄다.
이전부터 대표팀에 차출되어 함께 뛰어온 터라 호흡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저 첫 경기에 어떤 포메이션으로 어떤 선수들을 출전시켜야 하는가 고민을 해야 할 뿐.
‘일단 우리 첫 상대인 호주에 집중해야겠군.’
아시아-오세아니아 예선은 두 그룹으로 나눠 두 경기씩 치러 승패를 가리고, 그 승자들이 결승 2연전을 벌이는 토너먼트 방식이었다.
한국은 호주, 북한은 일본과 짝을 이뤘다.
먼저 호주를 쓰러트리고 결승에 올라가야 북한과 맞붙든, 일본을 박살 내든 할 것이다.
***
11월 15일 오후 3시.
프놈펜 국립 경기장에서 한국과 호주의 1차전 경기가 열렸다.
선발 출전한 준영은 4-2-4 포메이션의 하프백을 맡았다.
그와 함께 하프백을 맡은 선수는 임국천.
올해 25세인 그는 발재간이 좋고 슈팅 능력도 뛰어나 윈터보텀 감독의 간택을 받았다.
그런데 임국천은 실제 역사에서 흑역사를 쓴 인물로 유명했다.
‘멕시코 월드컵 예선 호주와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해 버렸다지.’
그의 실축으로 한국은 예선 탈락, 온 국민이 그를 대역 죄인으로 취급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임국천은 미국 이민을 떠나고 말았다.
‘바뀐 역사에선 과연 어떤 활약을 보여 주려나? 원래 역사에서처럼 실수하는 건…….’
그러나 준영의 우려는 전반 10분도 안 되어 날아갔다.
수비수 김효가 끊어 낸 볼을 잡아챈 임국천이 우측면 뒷공간을 노리고 달려가는 이희택에게 정확히 패스.
이희택은 여유롭게 호주 수비수들을 따돌리고 선제골을 때려 넣었다.
“좋았어!”
“나이스 패스에 원더풀 골이야!”
기세가 오른 한국은 계속해서 찬스를 만들어 내며 호주를 밀어붙였다.
그리고 전반 26분, 첫 골을 어시스트했던 임국천이 조윤옥과 패스를 주고받으며 호주 페널티 박스로 돌파, 두 번째 골을 성공시켰다.
‘괜히 걱정했구만.’
임국천의 대활약에 준영은 머쓱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역사가 바뀌면서 임국천의 운명도 달라진 모양이었다.
“호주 놈들이 맥을 못 추는구만기래.”
“덩치만 컸지 느려 터졌어.”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북한 선수들은 호주의 경기력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스피드와 기동력에서 한국보다 떨어지는 호주는 공격도 느리고, 매번 뒷공간을 허용하곤 했다.
거기다 무더운 동남아 기후에 적응이 안 되었던지, 후반전에는 눈에 띄게 지친 기색을 보였다.
한국 선수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후반전에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한 준영이 코너킥 세트 플레이에서 헤딩골을 작렬하며 세 번째 골을 만들었다.
이후 선제골의 주인공 이희택이 또 한 차례 멋진 돌파로 추가 골을 넣었고, 임국천의 패스를 받은 준영이 무회전 중거리 슛으로 호주 골망을 시원하게 흔들었다.
5 대 0으로 뒤지던 호주는 후반 42분, 왼쪽 풀백 조정수의 파울로 얻은 페널티킥을 공격수 샤인플러그가 깔끔하게 처리하며 간신히 0패를 면했다.
그렇게 아시아의 호랑이는 1차전에서 5대 1 대승을 거두며 결승 진출에 유리한 고지에 올랐다.
***
한국과 호주의 경기가 끝나고 1시간 30분 후.
북한과 일본의 경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샤워를 마친 준영과 한국 선수들은 북한 선수들이 그랬던 것처럼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았다.
“어럽쇼, 관중이 왜 이리 많아?”
“그러게요. 우리랑 호주가 경기할 때보다 훨씬 많은데요.”
“빨갱이랑 친한 나라라더니 진짜 그런 모양일세.”
한국 선수들이 투덜대건 말건, 캄보디아 관중들은 북한을 열렬히 응원하기 시작했다.
국왕인 시아누크처럼 공산 국가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2차 대전 때 자국을 침공한 일본이 싫었기 때문.
그래서 일본 선수가 공을 잡을 때마다 거세게 야유가 쏟아졌다.
‘진짜 북한 홈 같구만. 이러면 일본 애들이 주눅이 들겠어.’
경기 흐름은 준영이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그리고 그 결과가 경기 시작 5분 만에 나타났다.
수비수 야마구치 요시타다가 문전으로 빠르게 돌파해 들어온 박승진을 막으려다 그만 페널티킥을 내준 것.
박두익이 이것을 깔끔하게 처리하며 북한이 1 대 0으로 앞서갔다.
“저 박승진이란 놈, 장난 아닌데요?”
“체코슬로바키아 리그에서 꽤 날아다닌다고 하더군.”
북한은 엄청난 전력을 가졌다는 소문대로 시종일관 일본을 몰아붙이며 경기를 주도했다.
일본도 마냥 밀리지는 않았다.
젊은 장신 공격수를 앞세워 꽤 날카로운 역습을 펼쳤다.
“저 가마모토 구니시게라는 놈, 왜놈치고 키가 꽤 큰데?”
“오, 슈팅도 상당히 날카로워.”
그러나 일본의 역습은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북한 수비수 신영규가 침착하게 패스를 끊어 내고 돌파를 저지해 냈기 때문.
이렇게 신영규가 뒤를 든든하게 잠가 버리자, 북한 공격수들이 마음껏 활개 치고 다녔다.
특히 전반 30분대부터 박승진과 한봉진, 림승휘가 연달아 골을 넣으며 순식간에 점수를 4 대 0으로 벌렸다.
‘맙소사… 내가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건가?’
일본 감독 오카노 슈니치로는 자신이 본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1961년 한국전 대참패 이후로 대표팀은 와신상담하며 데트마어 크라머 고문의 지도를 받으며 착실하게 전력을 높여 왔다.
그 결과 도쿄 올림픽에서 아르헨티나를 꺾고 8강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성과에 대한 자부심이 오늘 처참히 박살 나고 있었다.
‘테크닉, 몸싸움, 기동력, 순발력… 어느 하나 우리가 앞서는 게 없다니!’
그동안 정말 절치부심해 왔다.
실업 리그가 진행되는 중에도 종종 대표팀을 소집해서 손발을 맞췄고, 선수들 체력도 관리해 왔다.
그래서 비관적인 정부 관계자들에게 큰소리를 치고, 예선에 출전했건만…….
‘강하다고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수 있단 말인가!’
경악과 무력함에 저도 모르게 화가 날 정도.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
어떻게든 만회하지 않으면 일본 축구의 미래는 밝아 오지 않을 터.
“뒷공간을 막아! 테루키, 상대 미드필드를 좀 더 강하게 마크해!”
“물러나지 마, 히로시! 오프사이드 라인이 허물어진다고!”
오카노가 쉴 새 없이 고함을 친 덕분에 더 이상의 실점 없이 전반전을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하프타임에 심기일전한 후, 후반전을 시작한 일본은 절호의 찬스를 잡았다.
상대 수비진이 다소 느슨한 틈을 타서 측면을 돌파한 와타나베 마사시의 크로스를 가마모토가 헤딩으로 내리찍으며 골망을 흔든 것.
“良し! 훌륭한 골이다!”
“잘했어, 가마모토! 네가 일본 축구의 미래다!”
이제 경기 흐름이 바뀐다!
그렇게 생각하고 5분이 채 되지 않아 박승진이 일본 문전을 향해 무섭게 돌진해 왔다.
‘단독 돌파라고?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냐!’
분개한 일본 수비수들이 어깨로 밀치고, 태클로 저지하고 나섰다.
하지만 박승진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고, 태클을 비롯한 상대의 발길질도 귀신같이 뿌리쳤다.
‘저 자식……!’
다소 삐딱하게 몸을 젖히고 경기를 보고 있던 준영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하고 박승진의 플레이를 바라보았다.
거침없이 상대 진영을 달려가는 모습이 정말 전설에 나오는 천리마 같아 보였다.
***
임국천, 아니 임국찬 선수는 1960~1970년대 한국 최고의 미드필더로 꼽히는 실력자였습니다.
그만큼 기대를 받고, 믿음직했던 선수가 정말 중요한 기회에서 실수를 해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의 실망이 컸지요.
이렇다 보니 이후 중요한 경기에서 페널티킥이 나오면 다들 이 선수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2002 월드컵 스페인전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선 홍명보도 실축하면 이민 가야 하나 생각했다고 하니…….
지금도 같은 일이 벌어지면 똑같은, 아니 덜하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고작 몇 해 전에 평가전에서 자책골 2골을 넣은 실책으로 모진 비판을 받고 결국 이른 나이에 은퇴, 정신과 치료까지 받은 선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