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67화 (367/400)

Round 367. 독재자와 떠돌이

“승리 이겨라! 승리!”

“무- 적 주공!”

서울 동대문 운동장.

준영은 승리제화와 주택공사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경기 시작 전에는 직접 시축도 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양 팀의 회사 직원과 가족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관중들이 경기장을 찾아와 마음껏 함성을 내질렀다.

“감독님이 보기에 우리나라 선수들의 기량이 어느 정도 되는 것 같습니까?”

준영은 자신의 옆자리에 있는 월터 윈터보텀에게 말을 건넸다.

대표팀 상비군에 소속된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러 왔던 월터는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좋게 봐 줘도 잉글랜드 풋볼 리그 3, 4부 리그 수준 정도로군.”

“제가 볼 땐 그보다 조금 더 높지 않나 싶은데요? 특히 스피드만 봐도…….”

“그 스피드가 평균점을 높여 준 거지.”

전술이나 기술적인 기량만 따지면 세미프로,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한 선수들도 많다.

하지만 측면을 활용한 빠른 속공과 때때로 보여 주는 과감한 플레이를 보자면 유고슬라비아가 왜 고전했는지 알 것 같았다.

‘거기다 습득 또한 빠르지.’

한국에 고문으로 온 미국, 영국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게 한국인들은 배우는 게 빠르다는 점이다.

서둘러 국가를 재건해 부유한 삶을 살고 싶어 그런지 몰라도 ‘빨리빨리’라는 단어를 흔하게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폐단도 있었다.

배운 것을 심도 있게 파고들지 못하거나, 자기 멋대로 과정을 생략해 버리곤 했던 것.

그 점은 축구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쯧쯧, 저게 문제야. 저렇게 빨리 속공으로 들어가 놓고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못하니…….”

“빨리 공격해야 한다는 마음에 그다음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까 생각을 못한 것 같군요.”

그게 아니면 생각은 했지만, 미처 정리하지 못했다든가.

“역시 세계 수준에 따라가기는 힘들군요.”

“그래도 점점 나아지곤 있지. 대표팀 소집할 때마다 선수들 기량이 향상된 게 보이거든.”

김용식을 비롯한 한국인 코치들은 이를 보고 무척 뿌듯해하고 있었다.

예전에 경기나 소집이 없을 때는 빈둥거리다 기량이나 몸 상태가 저하된 선수들도 많았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는 것.

“예전보다 뚜렷한 목표와 전망이 생겼기 때문일지도요. 요즘은 축구 잘하면 실업팀에서 보다 안정적인 선수 생활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해외 진출을 꿈꾸는 친구들도 있는 모양이더군.”

준영이나 조윤옥이 해낸 것처럼 잉글랜드 리그 진출을 꿈꾸는 이들도 있지만, 목표치를 낮춰서 홍콩 리그 쪽을 바라보는 선수들도 있었다.

영국의 영향 덕분에 홍콩 퍼스트 디비전은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출범했고, 꽤 선진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으니까.

영국이나 호주에서 온 선수들도 뛰고 있어 좀 더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아무튼 스피드가 빠른 건 확실히 맘에 들어. 공수 전환이 빠르니 지루하지 않으니까.”

“예, 관중들이 보기에도 꽤 흥미진진한 모양입니다.”

준영이나 월터의 입장에서는 이 전국축구연맹전 경기는 수준이 낮았다.

그럼에도 오늘 경기는 그리 따분하지 않았다.

눈치 안 보고 난타전을 벌이며 시원하게 슛을 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승리제화는 오늘 선발로 나온 선수의 활약이 좋군.”

“김재헌이라는 녀석인데, 제가 사흘간 특별 훈련을 좀 시켰습니다.”

준영과 월터의 눈에 들어온 김재헌.

그는 월등한 신장을 이용해서 포스트 플레이를 제법 잘 해내고 있었다.

덕분에 후방에서 곧바로 롱 볼을 보내는 승리제화의 단조로운 공격도 꽤 잘 먹혔다.

“장신 선수에게 너무 휘둘리는데… 아, 저런!”

“팔꿈치로 쳤군요.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막으려 들면 안 되죠.”

페널티 아크 부근에서 김재헌이 헤딩을 하려는 순간, 주택공사 수비수가 먼저 뛰어오르며 팔을 휘둘렀다.

심판은 곧장 파울로 판정, 승리제화에 프리킥을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승리제화 쪽의 키커가 멋진 감아 차기로 골망을 흔들었다.

“오, 제법 멋지게 넣는군.”

“하핫, 오늘은 진짜 승리를 따내겠는데요.”

이후에도 승리제화는 한 골을 더 넣었고, 경기 막판에 만회 골을 넣은 주택공사를 2 대 1로 무찔렀다.

“승리를 축하하네, 존.”

“감사합니다.”

준영이 월터와 악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누군가 다가와 뒷자리에 있던 차지철에게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야?”

“주택공사 사장이 자네랑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대.”

“상대 팀 물주도 와 계셨구만.”

잠시 만나는 정도는 어렵지 않았기에 준영은 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패배한 팀에 대충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넬지 생각해 보았다.

***

“반갑소. 주택공사 사장을 맡은 박정희요.”

“아… 예, 처음 뵙습니다.”

준영은 자신과 악수하는 사람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카리스마 있는 용모.

어딘가 본 적이 있다 싶었는데, 실제 역사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독재자 아저씨였다.

‘퇴역해서 공기업에 들어갔다더니 주택공사 사장일 줄이야.’

준영의 어색한 기분을 알 리 없는 차지철은 박정희에 대해 소개했다.

“박 중장님은 주공을 맡은 뒤로 도시 주거 개선 및 농어촌 근대화 사업을 진행하며 호평을 받고 있지.”

연립 주택과 아파트 단지를 많이 짓고, 실제 역사의 새마을운동 비슷한 걸로 지역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고.

이렇게 주거 문제를 개선해 가고 있는 덕분에 현 정부의 지지도도 높다고 했다.

“다음 대선에서 대통령 각하께서 재선되면, 박 중장님의 공로인 거지.”

“거참, 임자는 못 본 사이에 사람 낯 뜨겁게 하는 재주가 늘었군.”

손을 내저은 박정희가 다시 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경기는 이길 줄 알았는데……. 이 선수가 승리제화 선수들에게 특별 훈련이라도 시켰나 보군요.”

“예, 워낙에 성적이 안 좋아서요. 주택공사 선수들도 잘하더군요. 특히 주고받는 패스 플레이가 일품이었습니다.”

“이 선수가 칭찬해 줬다고 하면 우리 선수들도 영광스럽게 여길 거요.”

잠시 오늘 경기에 대해서 준영과 대화를 나눴던 박정희는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주택공사 사장으로 내 임기는 올해까지요. 내년엔 도로공사에 부임할 예정이지. 내가 고속도로 건설을 주청하니까 각하께서 직접 맡아서 해 보라고 하시더군.”

“고속도로라…….”

“우리나라엔 너무 이르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긴 한데, 내가 볼 땐 반드시 해야 하오. 교통 인프라를 구축하지 못하면 국가 근대화는 요원하니까.”

주공 사장으로 수완을 보였기에, 김홍일은 고속도로 건설도 박정희에게 맡기로 한 모양이다.

“도시와 농촌이 골고루 발전하기 위해서도 도로 정비는 필요하죠. 영국에서도 그 때문에 고속도로 공사를 계속 진행해 가고 있으니까요.”

“내가 듣자니 이 선수는 그 공사에 투자하고 있고, 토목 업체들과도 잘 안다고 들었소만?”

대규모 도로 건설에는 기술과 장비가 필수.

박정희는 준영이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보았다.

“소개해 드리는 거야 어렵지 않죠. 현지에는 영국 업체 외에도 한국 기업들도 있으니까요.”

처음에 인력 알선 수준으로 영국 건설 현장에 자리를 잡았던 한국 기업들은 야금야금 기술과 노하우를 습득하여 해외 건설 시장에도 진출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왕회장으로 유명한 사람의 업체도 있었다.

“도와준다니 고맙소.”

“나라에 득이 되는 일인데, 거들 수 있으면 거들어야죠.”

실제 역사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난관과 희생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끝내 완공시켰고, 이후 한국 경제가 활성화되는 혈맥이 되었다.

그렇게 결과가 확실한 사업이니 준영은 자신도 투자해서 득을 볼 생각이었다.

다만 하나 걱정이 있다면…….

‘박 씨가 계속 이렇게 실적을 높이다 출세하게 되는 거 아냐? 그러다 나중에 권좌를 잡으면…….’

쿠데타가 아닌 선거를 통한 정상적인 당선이 되더라도 껄끄러웠다.

헌법까지 손대며 장기 독재를 했던 인물이었으니까.

‘경제적인 성과는 있으니 관료 정도는 괜찮겠지. 하지만 권좌에 앉혀서는 위험할지 몰라.’

다음에 대통령 각하를 만나면 말씀드리든, 앞으로 대통령이 될 사람들을 대항마로 키워 두든 대책을 세워 놓아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 설계하고 바뀌어 갈 한국 축구가 독재자의 간섭을 받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

며칠 후, 준영은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갔다.

미국 LA 메모리얼 콜로세움에서 열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미국 축구대표팀의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서였다.

이 특별 경기는 일전에 레논이 제안했던 경기로, 축구 선수들 외에 유명 영화배우들과 로커들도 출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렇게 LA에 도착한 준영을 할리우드 대스타가 마중을 나왔다.

“존, 여기야!”

준영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반기는 숀 코너리에게 다가가 안부를 물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하하핫, 그런 건 뭐 하러 물어? 뻔히 잘 알면서.”

“그렇긴 하죠.”

공항에는 숀을 쫓아온 기자와 극성팬들이 많았다.

숀은 그들에게 준영을 소개했다.

“자, 여기 이 친구가 닥터 리입니다.”

“으하하하핫!”

바뀐 역사의 007시리즈 살인 번호에 나오는 악당 닥터 리.

본의 아니게 모델이 된 건 사실이기에 준영은 카메라 앞에 악당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팀 선수들이랑 레논은 도착했습니까?”

차에 올라탄 준영의 물음에 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엊그제 와서 산타모니카 해변이랑 파라마운트 스튜디오를 둘러봤지. 조지 녀석, 일반인 취급을 당했다고 굉장히 투덜대더군.”

“어쩌겠어요. 여긴 미국인데.”

조지 베스트가 영국에선 10대 소녀들의 아이돌일지 모르지만, 미국에선 듣보 수준의 운동선수일 뿐.

숀의 차를 타고 호텔에 도착한 준영은 팀원들과 재회했다.

“주장 형, 형수님과 안나는요?”

“한국에 있어. 피곤하게 태평양을 오가느니 한국에서 봉사 활동을 하겠대.”

그렇게 리즈가 남으면서 안나도 덩달아 남았다.

그 바람에 귀염둥이 안나와의 재회를 기대한 팀원들은 아쉬워했다.

“그건 그렇고 미국 사람들, 진짜 축구를 모르더군요. 무슨 럭비 같은 걸 축구라고 알던데…….”

“그게 미국식 축구라는 거다. 미국에서만 엄청 인기가 많은 거지.”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레논이 찾아왔다.

그는 준영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청년 한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왔습니까, 주장.”

“안녕, 레논. 그쪽의 머리 길고 입술 두꺼운 애는 누구지? 미국에서 사귄 친구야?”

“아뇨. 영국인이에요. 저희처럼 미국 가요계를 한바탕 쓸고 다니고 있죠.”

준영의 시선을 받은 청년이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믹 재거라고 해요.”

“오, 누군가 했더니 떠돌이들(Rolling Stones)의 보컬이었군.”

영국을 대표하는 록스타 중 한 사람.

준영이 아는 척하자, 믹은 무척 좋아했다.

그는 축구를 무척 좋아해서 이번에 특별 경기에도 출전할 거라고 했다.

“공을 좀 찰 줄 아나?”

“에, 그게… 많이 좋아하고 있죠. 하하하.”

레논처럼 발재간이 좋지는 못한 모양.

아무튼 믹 재거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밖에서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총성이 울렸다.

‘이건 또 무슨 소란이람.’

총기 보유가 자유인 나라라지만 함부로 방아쇠를 당길 수는 없을 터.

준영과 선수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비틀즈와 경쟁 관계인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는 존 레논을 존경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서로 대소사를 챙겨 줬다는 걸 봐서는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믹 재거는 최근 코로나 사태 때도 방역 수칙을 어기고 축구를 보러 다닐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습니다.

번외로 브라질 월드컵 당시에는 믹 재거가 지목한 팀들은 죄다 져서 펠레 이상의 흑마법사(…)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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