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65. 영웅이 떠나는 날
사람들은 그를 살아 있는 전설로 여겼다.
아니, 이제는 거의 신화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만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잉글랜드 축구의 영웅은 필드를 힘차게 내달렸다.
「매튜스가 유나이티드 오른쪽 측면을 파고듭니다. 이를 추격하는 북아일랜드의 천재 악동 조지 베스트…….」
1964-65 시즌 FA컵 4라운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스토크 시티의 경기의 주인공은 스탠리 매튜스.
50세 생일을 이틀 남겨 둔 이 신화의 영웅은 오늘도 잉글랜드 축구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할배, 그만 은퇴하시죠!”
“천만에! 난 아직 2년은 더 뛸 수 있어.”
거칠게 달려드는 조지 베스트를 교묘하게 뿌리친 매튜스는 곧장 맨유 페널티 박스로 접근했다.
우측면을 막고 있던 던컨은 난감한 표정으로 매튜스를 맞았다.
“어휴, 함부로 태클을 할 수도 없고…….”
“봐줄 필요 없으니 마음껏 덤벼 보라고!”
매튜스는 자신만만하게 헛다리 짚기를 시도했다.
던컨은 위험보다 걱정이 앞섰다.
나이도 지긋한 어르신이 저러다 관절이 나가지 않을까 하고서.
예상대로 매튜스는 도중에 비틀거렸다.
“으윽!”
“어휴, 내 이럴 줄 알았…….”
던컨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쓰러질 것 같던 매튜스가 잽싸게 몸을 튕기며 자신을 제쳐 버렸기 때문.
“하하핫! 방심했구나, 던!”
던컨을 속여 넘긴 매튜스는 절호의 찬스를 잡았다.
하지만 그가 찬 슈팅은 준영의 몸에 맞고 라인 밖으로 나갔다.
‘아오… 이 아저씨, 슈팅이 아직 매운걸.’
공을 맞은 옆구리 부위를 매만지던 준영은 바로 상대의 코너킥 공격에 대비했다.
정규 시간이 끝난 상황에서 스토크 시티가 잡은 마지막 기회.
2 대 1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동점 골을 따내기 위해서 수비수들뿐만 아니라 골키퍼까지 공격에 가세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포기하지 마라!”
“마지막까지 방심하면 안 돼!”
양 팀 선수들이 페널티 박스에서 다투는 가운데 코너킥이 날아왔다.
공을 향해 훌쩍 뛰어오른 스탠리 매튜스.
하지만 그가 헤딩을 노린 공은 준영의 머리에 먼저 걸렸다.
간발의 차이로 기회를 놓친 매튜스는 준영과 부딪친 후 필드에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길게 울렸다.
“괜찮으세요?”
“그래, 침대에 누워 있을 정도는 아니야.”
준영의 손을 잡고 일어난 매튜스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기고 싶었는데… 자네들을 상대론 역시 어렵군.”
“저희도 힘들었죠.”
이틀 후면 50세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스탠리 매튜스는 여전히 활력이 넘쳤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이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젊은 선수들과 계속 부딪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무튼 좋은 경기였어. 자네 팀이 정상에 오르기를 기원하지.”
“감사합니다, 선배님.”
준영과 악수를 나눈 스탠리 매튜스.
일주일 후인 2월 6일, 그는 풀럼과의 리그 경기에 출전하여 팀에 3 대 1 승리를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 경기를 끝으로 파란만장한 35년의 프로 경력을 끝냈다.
***
“United! Oh, Glory United!”
“Manchester is Wonderful!”
따스한 4월의 마지막 월요일.
흥에 겨운 관중들의 함성이 올드 트래퍼드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홈팀 맨유와 아스날의 경기는 2 대 0으로 맨유의 리드로 진행되고 있었다.
전반 10분 만에 레이 윌슨의 크로스를 조지 베스트가 헤딩으로 밀어 넣으며 선제골을 기록, 경기의 주도권을 잡아 갔다.
후반전에는 문전 혼전 상황에서 데니스 로가 아스날의 수비수 도널드 하우에게서 공을 빼앗아 추가 골을 넣으며 점수 차를 더 벌렸다.
“하하핫! 이러면 경기 끝난 거지!”
“내 눈에 승리의 여신이 미소 짓고 있는 게 보여.”
우승이 코앞까지 왔다!
맨유 팬들이 잔뜩 들떠 있을 무렵, 아스날이 반격에 나섰다.
「암스트롱이 전진하며 패스, 데이비드 코트가 받아서 베이커에게 밀어 줍니다. 베이커, 박스 안쪽에서 슛… 하지만 튕겨 나갑니다.」
아스날의 공격수 조 베이커의 슈팅은 프란츠 베켄바워의 육탄 방어에 막혔다.
그런데 심판이 바로 휘슬을 불었다.
공이 베켄바워의 손에 맞았다고 판정한 것이다.
“쩝, 고의가 아닌데…….”
“신경 쓰지 마. 끝까지 하던 대로 플레이해.”
준영이 베켄바워를 다독이는 사이, 아스날의 조지 이스트햄이 깔끔하게 페널티킥을 성공시켰다.
스코어는 2 대 1.
만회 골에 성공한 아스날은 내친김에 동점 골을 따내기 위해 연방 맨유 골문을 두들겼다.
“젠장, 리그 13위면 13위답게 굴라고!”
“강등권도, 우승권도 아닌데 왜 저리 열심이야?”
“그렇게 우리 잔치에 초 치고 싶냐!”
실제로 아스날은 초를 치는 게 목적이었다.
현재 리버풀이 2위로 맨유를 바싹 추격하고 있는 상황.
맨유가 오늘 경기에 발목이 잡히고 마지막 아스톤 빌라 경기까지 패하면, 그리고 리버풀이 남은 경기 전승을 하면 우승컵은 날아가 버리게 된다.
‘이놈들, 완전히 못 먹는 감 찔러 보자는 심보로군.’
눈살을 찌푸리던 준영은 박스로 돌진해 오는 조지 이스트햄을 막아 세우고는 공을 가로챘다.
그리고 재빨리 오버래핑을 시도하는 던컨에게 패스를 밀어 주었다.
「유나이티드, 반격! 빅 던이 노비 스타일스에게 패스, 다시 되받아서 측면을 내달립니다. 아직 힘이 남아도는 것 같은데요?」
아스날의 마크를 연달아 뿌리친 던컨은 손을 들고 있는 바비 찰튼 쪽으로 공을 넘겨주었다.
가볍게 툭 치며 수비수 프랭크 맥린톡을 제친 바비는 조지 베스트 쪽으로 패스를 건넸다.
조지는 수비수를 끌고 가며 그 패스를 흘렸고, 데니스 로가 달려들며 그대로 골로 성공시켰다.
「골! 유나이티드, 추가 골! 아스날의 추격을 뿌리치며 우승을 향해 성큼 다가섭니다!」
TV 중계 캐스터의 말대로 사실상 승리와 우승을 확정 지은 골이었다.
맥이 풀린 아스날은 의욕을 상실했다.
그리고 약 10분 후,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리며 올드 트래퍼드에 우레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우승! 유나이티드 우승!”
“드디어 정상을 탈환했다!”
퍼펑! 펑! 펑!
필드 밖에 설치된 폭죽이 터지는 가운데, 흥분한 관중들이 우르르 필드로 난입했다.
그들은 샴페인을 터트리는 선수들을 얼싸안고 춤을 추며 함께 기쁨을 만끽했다.
준영과 던컨, 바비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휴, 이제 숨 좀 돌릴 수 있게 되었군.”
“그러게. 매튜스 아저씨 은퇴 경기에 홀가분하게 참가할 수 있겠어.”
이틀 후에 열리는 스탠리 매튜스의 은퇴 경기.
그 경기에는 맨유의 삼총사들도 초청받았다.
“나도 은퇴할 때 화려한 이벤트 경기가 열렸으면…….”
“하하핫, 매튜스 아저씨처럼 50살까지 뛰어야 할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뛰어 줄게.”
동료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준영의 눈에 가족들이 보였다.
관중들이 난입한 김에 은근슬쩍 필드로 들어온 것 같았다.
“아빠-!”
“오, 우리 공주님!”
안나를 안아 든 준영은 잠시 후, 우승 트로피를 전달받았다.
딸을 안고 리그 트로피를 번쩍 들어 올린 그를 향해 쉴 새 없이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인생과 리그에서 모두 승리한 챔피언.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역사에 남았다.
***
1965년 4월 28일.
스토크 시티의 홈경기장인 빅토리아 그라운드.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은 환한 조명이 비춰지는 필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벤트 경기라고 하지만, 참 으리으리한 구성이로군.”
“이 정도 라인업은 월드컵에서도 쉽게 보지 못하니까.”
축구 영웅 스탠리 매튜스의 은퇴 경기.
지금 진행 중인 이 경기에선 매튜스 팀과 세계 올스타 팀이 맞붙고 있었다.
매튜스 팀에는 데니스 로, 바비 찰튼, 던컨 에드워즈, 로저 헌트 등 영연방 선수들이, 이에 맞서는 세계 올스타 팀은 눈이 휘둥그레질 선수들로 채워져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페렌츠 푸스카스, 바르샤의 라슬로 쿠벌러, 원조 거미손 레프 야신, 브라질의 축구 황제 펠레…….
여기에 아시아의 거인 이준영도 세계 올스타 팀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다들 영웅의 마지막 경기를 위해 흔쾌히 초청에 응했다.
“힘내요, 매튜스!”
“존 Y. 리 따위 제쳐 버려!”
로저 헌트의 패스를 받은 매튜스는 과감하게 강슛을 날렸다.
준영의 다리 사이로 빠진 슈팅은 야신의 손에 맞고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건 몰라도 슈팅은 아직 날카로우시군.’
준영은 혀를 내둘렀다.
방금 슈팅은 진지하게 마크했어도 막을 수 있을까 싶었으므로.
야신도 그렇게 봤던지, 감탄한 기색이었다.
「4 대 4. 매튜스의 골로 다시 양 팀의 균형이 맞춰졌습니다. 다시 공격에 나서는 세계 올스타 선수들…….」
이벤트 경기다 보니, 양 팀 모두 공을 두고 진지하게 다투기보다 멋진 개인기나 연계 플레이를 펼쳐 보였다.
던컨의 과감한 돌파와 디 스테파노의 정교한 패스, 펠레의 화려한 개인기는 관중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준영도 스텝 오버를 가미한 팬텀 드리블로 한껏 눈길을 끌었다.
「캡틴 리, 과감하게 치고 들어와서 페널티 박스 중앙으로 패스. 수비를 등지며 가슴으로 받아 올린 펠레, 그대로 오버헤드 킥-! 골입니다! 그야말로 그림 같은 골!」
멋지게 골을 성공시킨 펠레는 준영과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댁의 패스를 받아 골을 넣을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우리 팀에 오면 맨날 넣을 수 있는데?”
“됐어. 그랬다간 섕클리 감독님에게 혼난다고.”
준영의 은근한 영입 제안을 거절한 펠레.
그는 경기 종료 직전, 라슬로 쿠벌러의 헤딩 패스를 받아 논스톱 발리슛으로 또 한 번 골망을 흔들었다.
최종 스코어 4 대 6.
세계 올스타 팀이 승리했지만, 오늘 경기에 승패 따위는 상관없었다.
끊임없는 노력과 초인적인 역량으로 축구계를 주름잡은 영웅 스탠리 매튜스.
양 팀 선수들 모두 그의 앞으로 모여 악수를 나누었다.
“마지막 경기 소감이 어때요, 매튜스 아저씨?”
“던, 이건 내 마지막 경기가 아니야. 지금은 그냥 프로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뿐이라고.”
매튜스는 앞으로도 축구를 계속할 생각이었다. 뛸 수 있을 때까지 뛰는 게 선수로서 사명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너희도 언젠간 그 무대에서 내려오는 날이 있겠지. 그날이 오면 또 재미나게 뛰어 보자고.”
“예, 그렇게 하죠. 기대하고 있을게요.”
준영은 야신과 함께 매튜스를 어깨에 태우고 필드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그 뒤를 따르는 선수들과 심판, 자리에서 기립한 관중들은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최초의 윙어, 드리블의 마술사.
축구라는 스포츠를 한 단계 발전시키며 불멸의 기록을 남긴 위대한 선수 스탠리 매튜스.
그가 남긴 족적은 준영은 물론, 새로운 시대의 레전드를 꿈꾸는 선수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
말년에 친정 팀 스토크 시티의 승격에 공헌한 스탠리 매튜스는 1965년 1월 1일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현역 선수가 작위를 받은 건 그가 최초였다고 합니다.
본인은 이를 부담스러워했고, 한편으로 나이 때문에 은퇴해야 하는 걸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본인이 생각하기로 2년은 더 뛸 수 있었다면서 말이죠.
이후에도 호주, 미국, 캐나다, 아프리카 등에서 축구를 가르치면서 종종 경기를 뛰었습니다.
1985년에는 브라질에서 브라질과 영국 재향 군인 축구 경기에 참여한 적도 있는데, 이때 나이가 무려 70세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