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64. 권력자의 교시
학연, 지연, 혈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국가에든 존재하고 있다.
영국 역시 예외는 아니라, 명문 대학 출신이나 유력 가문의 후계자, 특정 지역 인사들이 정치와 경제에 영향을 끼치곤 했다.
그 점은 축구도 마찬가지.
감독들은 자신이 뛰었던 팀의 선수나 자신과 친분 있는 지도자가 추천하는 유망주에 눈길을 두기 마련이다.
“그런 건 나도 마찬가지이지. 잉글랜드 축구대표팀에 발탁되었던 일을 생각하면…….”
“당신은 실력으로 선발된 거잖아요.”
늦은 밤, 머리맡에서 준영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즈가 반박하고 나섰다.
준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그 점이 크지. 하지만 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이라는 점도 윈터보텀 감독님의 관심을 끌게 만든 요인일 거야.”
월터 윈터보텀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거기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프레드로 가문과 인연이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을 터.
“이런 인연이 있으면 좀 더 친근하고 호의적으로 보게 되기 마련이거든.”
“확실히 그렇긴 하죠.”
“그래, 그러니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어. 하지만 단지 그런 관계를 이유로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서는 곤란해.”
현재 한국 대표팀을 맡은 월터가 찝찝하게 여기는 일.
그건 대표팀 상비군에 특정 팀, 특정 지역 선수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나마 실력이 있으면 괜찮은데, 국가대표 수준에 미흡한 선수도 있으니 문제였다.
“감독님이 한국 선수들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그래서 기술위원회에서 선수들을 추천해서 선발하는데… 아무래도 영 껄끄러운 모양이야.”
직간접적으로 이 선수를 주전으로 쓰라는 둥, 다음 합숙 훈련 때도 선발하라는 둥, 간섭하고 있다고.
사실 월터 입장에선 이런 간섭이 낯설지는 않았다.
잉글랜드 축구대표팀의 선수 선발도 기술위원회가 결정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봐도 아니다 싶은 것을 강요에 가깝게 요구받으면 불쾌감이 들기 마련이다.
“안 그래도 기술위원회가 날 뽑지 않는 바람에 칠레 월드컵 우승에 실패했다고 보고 계셔서 말이지.”
“그런 일을 겪었으니 더욱 거북할 수밖에 없겠네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기술위원회와 단절할 수도 없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봄에 시즌이 개막하면 직접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면서 평가할 거래.”
가장 좋은 건 기술위원회가 추천만 하고, 선수 선발의 최종 권한은 감독이 가지는 것.
하지만 그리하자면 협회 내부에서 분쟁을 피할 수 없다.
외국인인 월터 혼자서는 이런 다툼에서 이겨 내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대표팀 물주는 나고, 대통령 각하께서도 관심을 두고 있으니까 몇몇 떨거지들이 간섭할 수 없게 막을 거야.”
“후후후, 확실히 돈과 권력의 힘은 무시 못하죠.”
21세기였다면, 권력자가 축구에 간섭한다고 해서 바로 FIFA의 비판과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 축구는 아직 정치권력과 단절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러니 준영은 이 시대적인 상황을 제대로 활용해 보기로 했다.
“아무튼 정이라는 게 너무 지나쳐서 좋을 게 없네요.”
“뭐, 그렇지. 하지만 정이 지나쳐도 상관없는 관계도 있는 법이니까.”
그리 말한 준영은 리즈를 바싹 끌어안았다.
그의 손길이 무엇을 원하는지 눈치챈 리즈는 발갛게 낯을 붉혔다.
“지나치면 다음 경기에 지장이 생길지 몰라요.”
“걱정 마. 다음 경기까진 아직 일주일은 더 남아 있으니까.”
“그렇다면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리즈는 달려드는 준영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은 늦잠을 자게 될 것 같았다.
***
“허억! 헉……!”
개마고원.
수북하게 쌓인 눈 위로 모래주머니를 찬 선수들이 거친 숨을 토하며 달려가고 있었다.
“더 빨리! 더!”
“아직 5킬로미터 더 남았다. 날래날래 뛰라!”
선수들 주변에선 군복을 걸친 조교들이 쉴 새 없이 윽박지르며 몰아붙였다.
북한 축구대표팀을 맡은 명례현 감독은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대표팀 단독 취재를 온 로동신문의 문상철 기자가 명 감독에게 말을 건넸다.
“훈련 상황이 순조로워 보이는데, 이번 특별 훈련으로 선수들의 기량이 어느 정도까지 향상될 거라 보십네까?”
“위대한 수령께서 지시하는 대로 따르고 있으니, 세계 최고 수준의 체력이 만들어질 것이라 예상합네다.”
명례현은 꼬투리를 잡히지 않게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대답을 내뱉었다.
김일성은 이번 축구대표팀에 관심이 많았다.
제국주의의 한 축이자, 축구 종가인 영국의 심장부에서 조선 축구의 힘을 만방에 과시하기를 바랐던 것.
물론 그 성과는 궁극적으로 수령 자신의 것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명례현을 불러다 근황을 묻거나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곤 했다.
‘최고 지도자를 만나는 건 영광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도 어디 한두 번이래야지.’
지나친 관심에 명례현은 적잖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수령이 축구를 제대로 알고 훈련에 참견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지치지 않는 강철 같은 체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한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고산 지대에서 특수부대처럼 혹독한 훈련을 한다고 될 일인가.
“체력이 중요하지만, 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하오. 소련이나 체코 등 축구 강국과의 교류를 더 넓히고 싶은데…….”
“이미 몇몇 선수들이 모스크바나 프라하에 가서 활약하고 있지 않습네까?”
“물론 그렇습니다만, 기왕이면 현지에서 전지훈련도 하고, 외국인 지도자도 초빙해서…….”
명례현의 말이 사그라졌다.
문상철의 눈꼬리가 휘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
“동무는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당의 지원이 불만스럽다 이거요?”
“불만스럽다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배울 것은 배워야 하지 않냐는…….”
“배울 게 뭐 있소? 위대한 수령 동지의 교시대로만 훈련하고 전술을 짜면 사상과 속도, 투지와 기술에서 최강이 될 게 아니오!”
“아, 예. 물론입네다. 내래 잘못 생각했습네다.”
명례현은 자아비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시국이 그런 상황이니까.
김일성은 1인 지배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소련파와 연안파뿐만 아니라,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유학생이나 학자들도 숙청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주체다 뭐다 떠들며 소련, 중국과도 거리를 두고 있을 뿐 아니라, 민족 자주성을 운운하며 귀화 외국인들이나 혼혈아들도 내쫓고 있었다.
심지어 중국이나 일본에서 살다 온 교포들도 차별하는 상황이었다.
‘나도 미쳤지. 이런 시국에 함부로 그런 말을 하다니.’
자칫하다간 현재 해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은 물론 자신의 대표팀 감독 직책도 날아갈 판.
이런 상황에선 그냥 눈, 코, 입을 닫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최선이다.
‘근데 시키는 대로 했는데도 만약에 성과가 나지 않으면 어쩌지?’
과연 수령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겠는가.
자신의 교시는 옳았는데, 아랫사람들이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고 하지 않겠는가.
명례현은 남몰래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12월 28일.
맨유의 1964년 마지막 경기 상대는 셰필드 유나이티드였다.
26일 셰필드 원정에서는 조지 베스트의 선제골과 데니스 로의 연속 골에 힘입어 3 대 0으로 가볍게 승리했다.
28일 홈에서 열린 경기에서도 맨유는 시종일관 우세를 이어 갔다.
그러다 후반 8분, 던컨의 패스를 받은 조지가 골대 구석으로 슛을 박아 넣으며 선제골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멋진 텀블링으로 골 세리머니를 펼쳤다.
“꺄아아악! 조지! 조지 베스트!”
“조지가 날 봤어! 나한테 윙크했다고!”
“아냐. 나한테 한 거야! 끝나고 나한테 유니폼을 던져 줄 거야!”
이렇게 아우성을 치는 소녀 팬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그란 인상의 노신사가 있었다.
귀빈석에서 시가를 피우며 경기를 바라보는 그 노신사는 바로 영국의 전 총리였던 처칠이었다.
“록밴드 콘서트장 같군.”
“그렇지 않아도 그런 소릴 많이 듣고 있습니다.”
오늘 경기에 출전하지 않은 준영은 처칠의 옆에서 요즘 경기장 분위기에 대해 설명했다.
조지 베스트를 비롯한 10대 선수들 덕에 소녀 팬들이 폭증했다는 것과 청년들도 헌팅을 노리고 경기장에 많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 등등.
“콘서트장이라고 하셨는데, 실제 이번 시즌 끝나고 비틀즈 녀석들이 올드 트래퍼드에서 공연을 할 계획이라죠.”
“그 비틀즈란 녀석들, 참 대단하단 말이지. 총포가 아닌 음악으로 미국을 점령하다니……. 그놈들을 보자니 영국이 약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강해지더군.”
처칠만 그런 ‘국뽕’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의회에서도 비틀즈에게 훈장을 주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고.
“그래도, 나는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그 친구들 노래보다 좀 그럴듯한 음악이 더 좋더군.”
처칠의 말에 준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젊은이들도 각하처럼 나이가 들면 최신 가요보다 비틀즈 노래가 최고라고 할 겁니다.”
“후후, 노래는 몰라도 패션 취향은 달라졌으면 좋겠군.”
“미니스커트 말씀이시군요.”
미니스커트라는 충격적인 패션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올해 여름부터였다.
런던에서 젊은 아가씨들이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치마를 입고 돌아다니기 시작하자, 각계각층에서 성토를 쏟아 냈다.
“제가 보기엔 그리 짧은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던데……. 각하께서 보시기엔 민망하던가요?”
“훗, 나는 연설과 치마는 짧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구세대지만 미니스커트 지지자인 처칠.
그는 패션에서 무엇이 중한지 잘 알고 있었다.
“뭐, 지금이야 몰라도 저 아가씨들이 늙어서도 짧은 치마를 입고 돌아다녀서는 난감하지 않겠나.”
“그거야 본인들이 알아서 잘 할 거라고 봅니다.”
“그래, 노인네가 잔소리해 봤자 반발심만 더 일어날 테지.”
처칠은 피우던 시가를 끄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려고요?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충분히 볼 만큼 봤어. 좀 피곤하기도 하니 돌아가서 일찍 쉬고 싶구먼.”
준영은 경기장 밖으로 나가 처칠을 배웅했다.
차에 오르기 전, 처칠은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다보며 말했다.
“90년 동안 살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었고, 이런저런 사건들도 보았지.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했지만, 형편없는 결과가 나타나기도 했어.”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글쎄, 죽을 때가 다 되어 그런가? 갑자기 감상적이 되어 버렸구먼.”
전쟁의 암울한 현실에 남몰래 한숨도 내쉬고, 저물어 가는 제국을 보면서 우울함에 잠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거리엔 다시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저물어 가는 제국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은 새로운 번영과 밝은 미래를 꿈꾸며 저마다의 길을 개척해 가고 있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가기도 하고, 춥고 어두운 밤이 지난 다음에는 따스한 아침 해가 떠오르지.”
“예, 그런 굴곡이 있기에 인생은 따분하지 않은 거라 봅니다.”
“어허, 노인네가 할 말을 가로채면 어떡하나.”
준영을 나무란 처칠은 그의 등을 툭 치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충분히 흥미진진하게 살았어. 존 자네도 계속 재미있는 인생을 살게나.”
그 교시를 마지막으로 처칠은 차에 올랐다.
“안녕히 가십시오, 각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준영에게 처칠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나치 독일에 맞서 영국을 구한 윈스턴 처칠은 향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준영은 그와의 재회를 아주 먼 훗날로 미뤄야 했다.
***
2002년 월드컵 이야기를 보면 우리나라가 이렇게 세계 수준에서 뒤떨어져 있었구나 싶지요.
근데 현재도 축구 변방 국가들을 보면, 이 시대에 아직도 이렇게 모를 수가 있나 싶어 어리둥절한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거스 히딩크 감독이 중국 올림픽 대표팀을 맡았을 때 중국 축구협회는 상비군 명단을 준비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기술위원회도 없었다고 합니다.
중국 축구가 유소년 축구가 부실해서 축구 굴기에 실패했다고 하는데, 사실상 이걸 계획하고 관리해야 할 사람들도 없었단 소리죠.
시스템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