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63. 지옥 훈련
집으로 돌아온 준영은 가족들만 모인 자리에서 오늘 레논을 만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우려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레논이 총에 맞아 죽는다고?”
이야기를 듣고 제일 먼저 펄쩍 뛴 사람은 역시나 앤지였다.
비틀즈의 광팬인 그녀의 입장에선 충격적인 정보가 아닐 수 없었다.
“왜 그 이야기를 지금까지 안 해 준 거야?”
“그야 내가 아는 역사의 흐름과 달랐으니까. 당연히 레논의 운명도 바뀔 거라고 생각했지.”
실제로 꽤 바뀌었다.
일본 마녀와 일찌감치 손절했으며, 암페타민이나 대마초 같은 환각제도 준영의 엄격한 지도를 받고 끊었다.
음악적인 역량에 있어서도 준영을 통해 미래의 장르들을 접하며 한층 풍부해졌다.
“근데 어쩌다가 총에 맞는 거야?”
10대 소녀로 훌쩍 자라난 카린도 또래 친구들처럼 유명 아이돌 가수에 호기심을 가졌다.
더구나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어릴 때 저택에 곧잘 찾아왔던 준영의 동료가 아니던가.
“마크 채프먼이라고, 정신이 이상한 작자가 쐈어. 살해 동기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썰이 있는데, 정확하게 밝혀진 건 없어.”
“그랬단 말이지? 그럼 미리 정신병원에 가둬 둔다면…….”
“애석하게도 암살범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잘 몰라. 그리고 앞서 말했지만, 이젠 정치적인 문제로 살해당할 수도 있지.”
비틀즈가 미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보수적인 계층에선 그들의 음악과 사상을 탐탁잖게 여겼다.
그런데 미국의 인종 분리 정책에 반하는 언행을 하고, 마틴 루터 킹과 친분을 나누었으니 인종 차별주의자에게 총을 맞게 될 위험도 커지게 되었다.
“그냥 조심할 수밖에 없는 거네.”
“안 그래도 광적인 팬들의 돌발 행동이나, 인종 차별주의자들의 습격에 주의하라고 일러 놓았어.”
“잘했어, 형부. 근데 폴은 어때? 혹시 폴도 나쁜 일을 겪는 건…….”
“걱정 마. 내가 1957년에 올 때도 팔팔하게 장수하고 있었으니까.”
그 말에 앤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준영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근데 레논 녀석, 흥미로운 제안을 하더군.”
“무슨 제안이요? 혹시 라이브 콘서트에 당신도 참석시키고 싶대요?”
리즈의 물음에 준영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고, 자신의 인기를 이용해서 미국의 축구 저변화에 힘을 실어 주고 있는데, 날더러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묻더라고.”
레논이 생각하고 있는 건 비시즌에 맨유의 미국 투어였다.
그 이벤트 경기에 자신뿐만 아니라, 여러 유명인들을 뛰게 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와 관련해서 미국 축구 연맹 쪽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고 있다고 하더군. 참고로 우리 제임스 본드 요원께서는 이미 참여 의사를 밝혔다고 해.”
007시리즈로 엄청나게 주가를 높인 숀 코너리는 이제 누구나 다 아는 할리우드 스타.
그는 자신의 할리우드 인맥으로 여러 배우들에게 참여 제안을 하고 있단다.
“일단 오마 샤리프도 끼고 싶다고 했나 봐.”
“오마 샤리프라면, 재작년에 개봉한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나온 배우죠?”
“응, 어릴 때 축구를 했다고 해.”
유명 배우들에 비틀즈의 리드 보컬까지 참여하면 꽤 흥미로운 이벤트 경기가 될 게 틀림없다.
하지만 리즈는 준영이 그 경기에 뛰는 게 마땅찮았다.
흑인이나 동양인을 차별하고 린치와 테러를 가하는 나라에 갔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던 것.
“아직 결정된 건 아니야. 결정이 되더라도 허술하게 준비하지는 않을 거고.”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당신도 혼자가 아니니, 항상 조심해요.”
“명심하겠습니다, 여왕님.”
이미 여러 차례 위험을 겪은 바 있었던 준영은 리즈의 주의를 흘려듣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게 운명이니까.
***
찬바람이 쌩쌩 부는 12월.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효창 운동장에서는 후끈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패스! 패스해!”
“공이 오기를 기다리지 마! 미리 빈 공간으로 움직이라고!”
필드에서 뜨거운 숨을 토하고 있는 이들은 내년 월드컵 예선에 대비해 선발된 국가대표 상비군 선수들.
그들의 훈련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벽안의 감독이 있었다.
그는 얼마 전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월터 윈터보텀.
그의 한국행은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축구 종가를 월드컵에서 우승시킨 명장이 아시아 변방 국가로 간 것이니까.
그 때문에 유럽과 남미에서는 갑작스럽게 한국이 주목받기도 했다.
“체격은 나쁘지 않은데…….”
“훈련 방식도 나름 최신이긴 해요.”
“문제는 선수들 수준이로군.”
월터를 보좌하는 코치들은 선수들을 체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수석 코치인 톰 피니, 필드 코치 대니 블란치플라워, 골키퍼 코치 버트 트라우트만, 전력 분석관 로저 바인.
이들은 월터가 영입하거나, 준영이 친분 있는 이들에게 요청해서 합류시켰다.
통칭 ‘월터 사단’에는 이들 외에도 김용식, 박병석, 최정민 이 3명의 한국인 지도자들도 합류했다.
여기에 한국 정보부에서 대표팀 지원단까지 배정했다.
“국가 정보부까지 나서다니……. 왜 이렇게 월드컵 진출에 매진하는 걸까?”
“아직 못 들었어요? 북쪽에 있는 적성 국가랑 경쟁이 붙어 그렇다잖아요.”
“거기다 지난 올림픽에서 부진했던 성적도 만회해야 한다고 하고…….”
민관이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상황이라 책임은 막중했다.
거기다 대중의 관심도 높아서 훈련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취재하던 기자들을 정보부 지원단 요원들이 갑자기 경기장 밖으로 내보냈다.
“자, 오늘 훈련은 여기까집니다. 기자분들도 돌아가십쇼.”
“벌써 끝이라고?”
기자들은 어리둥절해했다.
영국인 감독이 부임하고 훈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종료한다니?
“첫날이라 가볍게 하고 끝내는 건가?”
“스파르타식으로 굴리는 게 다가 아니라고 보나 보죠.”
“그래도 뭔가 좀…….”
의아해하던 기자들이 퇴장하는 사이, 선수들은 목을 축이며 휴식을 취했다.
처음엔 진짜 오늘 훈련이 끝인가 했는데, 최정민 코치의 말에 따르면 그렇지 않고 특별히 비밀 훈련을 할 거라고.
“비밀 훈련? 무슨 비밀 훈련을 할라 카노.”
의아해하던 김효는 옆에 있던 김청남에게 말을 건넸다.
“보이소, 뭐 할라 카는지 알 것 같습니꺼?”
“글쎄, 전혀…….”
선수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코치들은 거리와 간격을 두고 필드에 콘을 세웠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라디오 비슷한 기구를 하나 꺼내서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러니까 여기 빨간 불이 들어오면서 휘슬 소리가 난다는 건가?”
대니의 물음에 로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냥 스톱워치를 써도 되지만, 정확하게 측정하는 게 좋다고 존이 따로 주문해서 만든 거예요.”
“존 Y. 리 그 녀석이 말인가. 유나이티드에서도 이걸로 훈련하는 거야?”
“예, 어찌나 힘든지 하고 나서 다들 학을 뗄 정도죠.”
대신 효과는 탁월하다고.
톰 피니나 대니는 어리둥절했지만, 맨유의 최신식 훈련법이 어떤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뭐, 감독님이 수락한 걸 보면 영 허튼짓은 아니겠지.’
효과가 있다면 배워서 써먹어야 한다.
대니가 월터 사단 합류를 결정한 것은 경력을 쌓기 위함도 있지만, 스승인 빌 니콜슨의 조언도 한몫했다.
명장 밑에서 배울 만한 것은 다 익혀 두라고.
아무튼 준비가 끝나자 선수들이 필드에 자리를 잡았다.
“자, 시작 휘슬이 울리고 다시 휘슬이 울리기 전에 20미터 구간을 왕복하면 된다. 그리고 10초의 휴식 시간을 주고 다시 반복할 건데, 중간에 세 번 이상 낙오되면 탈락이다. 통제에 잘 따르도록.”
최정민의 설명이 끝나고 바로 훈련이 시작되었다.
기구에서 휘슬 소리가 울리자 선수들은 재빨리 20미터 앞에 있는 콘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처음부터 전력 질주하지 마! 나중에 가면 지쳐!”
김용식 코치의 주의에 선수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지시하는 대로 따랐다.
그렇게 10회 넘게 20미터 왕복 달리기가 진행되었다.
“별로 힘들지도 않네. 이기 무슨 특별 훈련이고.”
김효는 코웃음을 쳤다.
다른 선수들도 희희낙락하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그 웃음이 지워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휘슬이 울리는 간격이 점점 짧아졌기 때문.
즉, 줄어드는 제한 시간 안에 왕복을 하려면 진짜 전력 질주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헉! 헉! 아이고, 죽겠다…….”
“아까 안 힘들다고 했던 놈 누구야?”
시간이 흐를수록 탈락자가 속출했다.
지켜보던 대니도 왜 맨유 선수들이 이 훈련에 학을 뗐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내심 자신의 현역 시절에 저런 훈련을 안 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
“쓸 만한 훈련이군. 선수들 지구력을 측정하는 데 딱 좋겠어.”
눈에 확실히 나타나는 결과에 만족의 미소를 지었던 월터가 로저에게 물었다.
“로저, 존은 이거 몇 회 정도 한다던가?”
“그 녀석은 150~160회가량 뜁니다. 체력이 강한 선수들은 보통 120회 이상을 뛰고요.”
“그럼 앞으로 평균 100회 이상 뛸 수 있게 만들어야겠군. 체력은 기본 중의 기본이니 말이야.”
이날 대표팀에 처음으로 시행된 셔틀런, 시간 왕복 달리기를 100회 이상 넘긴 선수는 김효와 김청남을 비롯해 5명에 불과했다.
앞으로 있을 험난한 훈련을 예상할 겨를도 없이, 가쁜 숨을 내쉬는 선수들은 노랗게 보이는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
12월에도 맨유는 순항을 계속했다.
리즈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무를 캐기도 했지만, 이후 웨스트 브롬위치와 버밍엄 시티를 잡아 내며 2위 리버풀과의 승점을 점점 벌렸다.
이렇게 팀 성적이 여유롭게 되자, 준영도 다른 일에 신경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본인의 사업이나 학업, 그리고 한국 대표팀 훈련 상황 등등.
안 그래도 오늘은 대표팀 근황이 궁금해서 한국에 있는 월터에게 연락을 했다.
“여보세요. 감독님, 접니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불편한 점들이 없진 않지만, 적응해 나가고 있어. 한국분들도 잘 챙겨 주고 있고.)
아직 음식은 적응이 덜 되었다고.
특히 대니의 경우엔 한국 사람들이 치킨을 잘 몰라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닭 요리를 시켰더니 튀긴 게 아니라 이상한 뿌리와 함께 익사시킨 걸 갖다 주더라고 투덜대더군.)
“하하하, 그게 원래 포계라고 하는 건데, 부유한 사람들이 먹던 거라서요.”
(어쩐지. 한국에선 대중화된 음식은 아니었다 이거군.)
준영이 둘러댄 말에 월터는 큰 의심을 하지 않고 넘어갔다.
사실 대다수 사람들이 잘 모를 뿐, 한국에서도 치킨 요리가 싹트고 있긴 했다.
미군 부대의 프라이드치킨이 알려지기도 하고, 시장통에서 통째로 튀기거나 꼬챙이에 꿰어 굽는 것들도 있었던 것.
여기에 최근 서울엔 미스터리 치킨 체인점도 생겼다.
“그건 그렇고, 훈련은 어떻습니까? 감독님 입장에선 성이 차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만?”
(뭐, 확실히 그렇지. 그래도 차차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
부족한 면이 많긴 하지만, 선수들의 하고자 하는 의욕이나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자세는 훌륭했다.
거기다 선수들은 예의 바르고, 감독과 코치들의 지시에 군말 없이 따르는 점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고.
(장난삼아 나무 위에 올라가 보라고 했더니 정말 올라가더군. 그땐 참 미안했지.)
“순박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더 정이 들죠.”
사실 준영이 이 시대의 한국을 쉬 등 돌릴 수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그 순박한 정 때문이었다.
이역만리에 있는 자신을 성원해 주고, 심지어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 준 적도 있었다.
(자네 말대로인 것 같아. 그런데 뭔가 좀 찝찝한 일도 있어 신경이 쓰이더군.)
“찝찝한 일이라니요?”
(그러니까 그게…….)
이어지는 월터의 말에 준영의 표정이 달라졌다.
***
1. 오마 샤리프는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닥터 지바고’라는 작품으로 유명세를 떨친 이집트 출신 배우입니다. 담배 이름 아닙니다(…).
이 사람이 어릴 때 축구를 좀 했는데, 당시 이집트에 주둔한 영국군에 톰 피니 선수가 있어 같이 공을 찬 적이 있다고 합니다.
2. 셔틀런은 1980년대 캐나다에서 스포츠 과학을 연구한 레거 박사가 개발한 훈련법입니다.
우리나라에선 2002년 히딩크 호에서 했던 파워 트레이닝 훈련법으로 알려져 있죠.
최근에도 하고 있지만, 강도는 낮추고 효율을 높이는 방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즘엔 체력 훈련을 선수 개개인이 자기 특성에 맞춰 진행하고 있기에 과거처럼 횟수에 연연하지는 않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