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61. 새로운 모험
‘이런, 안 돼!’
론 예이츠와 골키퍼 토미 로렌스가 황급히 게르트 뮐러를 둘러쌌다.
하지만 그들의 대응보다 앞서 뮐러는 슛을 쏘았고, 공은 로렌스 골키퍼의 다리를 살짝 스치며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골! 유나이티드, 선제골! 19살 독일 공격수가 리버풀의 골문을 뚫어 버렸습니다!」
“우와아아아!”
“뮐러 녀석, 굉장한데!”
뒷덜미를 잡거나 머리를 움켜쥐는 콥스와 달리, 맨유 서포터들은 신이 났다.
그들이 집어 던진 두루마리 휴지 폭탄 덕분에 한동안 경기가 중단될 정도였다.
“이 매정한 놈, 또 내 뒷덜미를 잡게 하는구나.”
섕클리 감독은 어시스트를 기록하고 뮐러와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준영을 서운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도대체가 리버풀과 무슨 원수를 졌다고 경기만 하면 공격 포인트를 적립하는 건지!
선수로서 최선을 다해 활약하는 자세는 기특하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쳇, 안 좋은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니까.”
잠시 후, 킥오프가 되자 펠레가 투덜대며 공을 몰고 들어갔다.
좀 전에 독일 골키퍼 녀석이 자신이 날린 회심의 일격을 막아 내는 걸 보고 불길한 느낌을 받았는데, 결국 제대로 한 방 얻어맞고 말았다.
‘뭐, 유나이티드와의 경기는 항상 힘들잖아. 잊어버리고 얼른 동점 골을 만들어야지.’
마음을 가라앉힌 펠레는 자신에게 발을 뻗는 노비 스타일스를 제쳐 냈다.
하지만 뒤이어 달라붙은 던컨을 뚫지 못하고 다른 방향으로 공을 돌렸다.
「홈에서 얼얼한 일격을 맞은 리버풀. 부지런히 패스를 주고받으며 유나이티드의 수비진을 들쑤시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그때 부지런히 박스 안팎을 오가던 쿠티뉴가 번쩍 손을 들었다.
이안 캘러헌의 패스가 들어오자, 그는 곧장 골대 구석을 보고 휘어 찼다.
멋지게 골망을 흔드는 논스톱 발리슛.
그러나 애석하게도 선심이 깃발을 든 후였다.
‘오프사이드였나? 어쩐지 그 독일 수비수 놈이 안 붙더라니.’
불발로 끝났지만, 쿠티뉴는 실망하지 않고 계속 맨유 수비진을 흔들어 댔다.
선배인 펠레도 그에 호응, 피터 톰슨에게 받은 패스를 침투하는 쿠티뉴에게 밀어 주었다.
그러자 곧장 베켄바워가 마크를 붙었다.
‘내 움직임을 파악해서 막아 내는 모양인데, 이번엔 그렇게 못할 거다.’
머리가 안다 해도, 몸이 반응하는 시간은 그보다 늦다.
템포를 좀 더 끌어 올린 쿠티뉴는 순식간에 방향을 전환하며 베켄바워를 제쳐 냈다.
‘좋아… 윽!’
슛을 시도하려는 순간, 앞으로 내디딘 다리의 무릎에서 지끈거리는 통증이 일어났다.
그 바람에 슈팅 찬스를 놓쳤고, 잽싸게 박스에 들어온 준영이 공을 멀리 걷어 냈다.
“야, 너 괜찮냐?”
“Yes, I’m fine.”
준영의 물음에 짧게 답한 쿠티뉴는 박스 밖으로 물러났다.
그의 모습을 준영은 유심히 살펴보았다.
절뚝이지는 않았지만, 뭔가 불편한 구석이 있었다.
‘아무래도 부상당한 것 같은데…….’
갑작스럽게 속도를 높이거나 방향을 전환하다 보면 근육이나 관절에 무리가 간다.
평소에 훈련을 해 둔다 해도 일정 선을 넘게 되면 탈이 나기 마련.
그러므로 이상을 감지하면 바로 조치를 받는 게 좋다.
하지만…….
‘중요한 시합이야. 무릎 좀 아프다고 이탈할 수는 없지.’
하필이면 2년 전, 월드컵을 앞두고 부상당한 부위에서 통증이 일어났다.
다행히 못 뛸 정도로 심각하진 않았지만, 달릴 때마다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쿠티뉴의 상태를 선배인 펠레가 제일 먼저 눈치챘다.
“2선으로 내려가서 패스를 줘. 놈들 골문을 따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전 괜찮아요.”
“그래, 내가 그냥 유나이티드 놈들을 한 방 먹이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까 패스 좀 잘 밀어 달라고.”
이런 선배의 배려를 쿠티뉴도 거절할 수 없었다.
현재 무릎 상태로는 기회가 와도 살리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선배에게 맡기는 편이 나으리라.
‘질 순 없으니까. 우리가 챔피언이어야 하니까.’
그러니 유나이티드가 다시 일어날 기회를 주지는 않겠다.
그리 마음먹은 쿠티뉴는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플레이를 펼쳐 보였다.
***
“쿠티뉴가 뒤로 빠졌는데?”
“감독이 지시를 내렸겠지.”
“베켄바워를 뚫지 못하니…….”
쿠티뉴와 펠레가 위치를 바꾼 것을 보고 관중과 기자들은 이런저런 추측을 늘어놓았다.
정작 지시했다고 추정되는 섕클리 감독도 의아해하고 있었지만, 딱히 지적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어차피 두 선수의 플레이 스타일은 비슷하니까.
거기다 경기가 풀리지 않으니 역할을 바꿨으리라 판단했다.
「쿠티뉴가 로저 헌트에게, 로저가 다시 쿠티뉴. 쿠티뉴, 잡지 않고 힐킥으로 방향을 살짝 바꿔서…….」
빌리 맥닐이 강하게 마크를 시도한 순간, 쿠티뉴가 박스 안으로 달려 들어오는 펠레 쪽으로 절묘하게 패스를 넘겨주었다.
준영이 곧장 마크에 나서려고 했지만, 로저 헌트가 슬그머니 진로를 막았다.
그렇게 아주 잠깐 지체된 사이, 펠레가 찬스를 잡았다.
베켄바워가 재빨리 마크에 나섰지만, 펠레는 그보다 반 박자 빠른 슈팅으로 맨유의 골망을 흔들었다.
“동점 고오- 오오올!”
“그렇지! 역전으로 가즈아!”
콥스의 신명 난 환호성이 안필드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삽시간에 실점을 해 버린 베켄바워와 제프 마이어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가 저렇게 빨라?”
“슛을 때릴 거라 생각은 했지만…….”
앞선 상황에서도 펠레의 공격을 몇 차례 막아 봤지만, 이번엔 그때와 완전 달랐다.
사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애들의 체력과 집중력이 느슨해진 시점에 정확히 파고들었군.’
펠레도 펠레지만, 그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패스를 넣어 준 쿠티뉴나 수비수의 대응을 지연시킨 로저 헌트에게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얼빠진 채 감탄하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 방금 먹은 거 갚아 주러 가자!”
“주장 형, 나한테 공을 줘요! 내 손, 아니 내 발로 끝장낼 테니!”
준영의 독려에 조지 베스트가 가장 먼저 호응하고 나섰다.
그는 공을 잡자마자 번개같이 리버풀 진영으로 치달려, 측면을 허물며 결정적인 기회를 만들어 냈다.
깡-!
“어우 씨!”
골대에 맞고 나가는 공을 보며 조지가 펄쩍 뛰었다.
아쉽게 노골이 되어 버렸지만, 방금 돌파와 슈팅은 리버풀 측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저 벨파스트 애송이, 진짜 장난이 아닌데?”
“이름이 괜히 베스트가 아닌가 봐.”
“저런 놈은 더 크기 전에 밟아 줘야 하는데……. 안 그러면 앞으로도 내내 골칫덩이가 된다고.”
후반전 남은 시간, 맨유는 조지 베스트를 활용해서 공격을 진행해 나갔다.
이전보다 훨씬 기회가 많아지자, 조지 역시 아껴 둔 체력을 마음껏 소진하며 리버풀 수비진을 계속 흔들었다.
“조지 녀석, 잘하는데? 전반부터 적극 활용하는 게 나았으려나?”
던컨의 말에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럴지도. 하지만 히든카드는 아껴 뒀다가 막판에 사용하는 게 효과가 커.”
너무 아껴 뒀다간 똥이 되곤 하지만, 적당한 시점에 끄집어내면 아주 좋은 패가 된다.
바로 지금처럼.
“7번 애송이를 조심해!”
“뭐 하고 있어? 바싹 붙어서 막아!”
조지가 박스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리버풀 수비수들의 심장 박동이 올라갔다.
이준영이나 펠레와 다르게 녀석은 플립플랩이나 사포 같은 화려한 발재간을 부리지 않았다.
그저 발끝과 발바닥으로 공을 툭툭 굴리며 빠르게 치거나 전환해 나가는데, 오히려 그런 단순한 드리블이 막아 내기 힘들었다.
‘이 자식은 발에 공이 붙는 자석을 달고 다니나!’
‘잡았… 아악! 놓쳤어!’
이리 휘청, 저리 휘청.
리버풀 수비수들이 계속 조지의 발재간에 고전하자, 미드필더는 물론 공격수들까지 측면으로 내려와 수비를 거들어 줘야 했다.
이렇게 견제한 덕분에 급한 불은 끌 수 있었지만, 공격의 무게감은 떨어졌다.
그리고 그 틈을 노리고 준영과 던컨, 베켄바워가 번갈아서 리버풀 진영으로 전진해 들어왔다.
「유나이티드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전진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무승부로 끝낼 생각은 없어 보이는데요.」
‘앞으로 남은 시간은 5분…….’
힐끔 시계를 바라보던 버스비 감독은 될 듯하면서도 터지지 않는 공격에 조바심을 냈다.
기세 좋게 몰아붙이는 건 좋지만, 상대도 마냥 웅크리고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만약 이 상황에서 카운터펀치 한 방을 맞는다면 쓰러지는 건 우리 쪽이 될 거야.’
그리고 펠레가 그 카운터펀치를 날리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원에서 쿠티뉴가 공을 빼앗는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그는 맨유 진영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안 그래도 수비수들이 전진하며 방어가 헐거워진 상황.
정확하게 패스를 전달받은 펠레는 삽시간에 페널티 아크 부근까지 달려왔다.
하지만 슈팅은 때릴 수 없었다.
‘놓칠 것 같으냐!’
‘쳇, 이럴 줄 알았지.’
황급히 수비 지역으로 내려온 준영이 펠레의 앞을 가로막았다.
현란한 발재간을 부리며 수차례 페인트를 펼쳐 보인 펠레는 준영을 제쳐 내는 데 성공했다.
아니, 성공한 것처럼 보였을 뿐.
제치고 나간다 싶은 순간, 뒤쪽에서 쭉 뻗은 준영의 발이 아슬아슬하게 공을 빼내 갔다.
“좋아, 다시 가 보자!”
곧장 공을 몰고 리버풀 진영으로 넘어간 준영.
황급히 쫓아온 펠레가 인터셉트를 시도하자, 그는 빙글 돌며 제쳐 낸 다음 그대로 중거리 슛을 쏘았다.
“막아!”
론 예이츠가 몸을 던져 준영의 슛을 막아 냈다.
하지만 굴절된 공은 박스 안에 있던 조지 베스트 앞에 떨어졌다.
‘아, 안 돼!’
토미 로렌스가 각을 좁힌 보람도 없이 조지의 슛은 리버풀 골대 안에 꽂혔다.
경기 종료 2분 전, 역대급 7번이 골을 넣은 맨유가 결국 귀중한 승리를 따냈다.
그리고 깨어난 제왕의 호령이 다시 풋볼 리그 전체에 울려 퍼졌다.
***
맨유가 안필드 원정에 승리한 다음 날.
준영은 전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 월터 윈터보텀을 만났다.
칠레 월드컵 준우승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하차한 월터는 현재 스포츠 협의회 이사로 활동하며 대중적인 스포츠 인프라 확충에 매진하고 있었다.
“존, 자네 스포츠 용품 사업이 아주 잘된다고 하던데?”
“나날이 성장 추세죠. 사람들이 운동과 건강에 관심이 많아져서요.”
“좋겠군. 남들은 불황이라 앓는 소리를 하고들 있는데.”
월터의 말에 준영은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50년대 영국 경제의 대호황이 막을 내리고, 60년대부터 경기가 위축되기 시작했다.
여러 제조업 분야에서 경쟁 국가들의 도전을 받고, 에너지 시장이 석탄에서 석유로 넘어가면서 국내 탄광들이 점점 문을 닫고 있었다.
그러나 준영이 보기엔 ‘영국병’이란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악화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앞으로 10년은 넘게 두고 봐야겠지만… 그래도 실제 역사만큼 나빠지진 않을 것 같아.’
일찍 북해 유전 개발을 시작했고, 영국 정부에서도 적절하게 신규 산업 투자를 지원하고 재정 낭비를 지양하고 있었다.
MI6를 통해 준영이 알려 준 미래의 정보를 교훈 삼아 대처하고 있었던 것.
그 덕분인지 몰라도 영국 내수 시장은 크게 위축되지 않았고, 식품이나 의류 사업도 계속 잘되었다.
아니, 미국이나 유럽, 아시아 등 해외 시장에서 매출이 훨씬 늘어났기에 더욱 번창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지난번에 자네가 맨체스터 학생들에게 스포츠 용품을 지원해 줬다고 들었어. 협의회에서 감사의 뜻을 전해 달라고 하더군.”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나저나 일전에 제가 드린 제안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준영의 물음에 월터는 방금 전과 사뭇 다른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건넨 제안…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아 달라는 것 말인가.”
“네, 낯선 나라에서 불만족스러운 생활과 고난, 리스크는 크고, 월드컵 진출은 불확실합니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명예와 영광을 쟁취하겠죠.”
“어니스트 섀클턴처럼 말하는구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제안이란 생각에 월터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굳혀 두었기에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좋아, 새로운 모험을 해 보지.”
***
위험한 여행, 적은 급료, 혹한에 몇 달간의 어둠, 계속되는 위험, 불확실한 귀환, 성공 시 명예와 영광.
어니스트 섀클턴이 남극 횡단 탐험을 나갈 때 냈던 인력 광고입니다.
대놓고 안 좋은 조건이라고 적혀 있는데, 지원자가 굉장히 많았다고 하죠.
탐험 자체도 도중에 빙산에 난파하는 등 엄청난 난관이 많았지만, 다행히 모든 이들이 무사 귀환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