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57화 (357/400)

Round 357. 시상식의 모욕

1964년 10월 14일 도쿄 고마자와 체육관.

이곳에선 올림픽 레슬링 남자 자유형 플라이급 결승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결승에서 맞붙은 선수는 개최국 일본의 요시다 요시카츠, 그리고 한국의 장창선.

미국과 소련, 프랑스 등 쟁쟁한 스포츠 강국의 선수들을 무찌르고 결승에 오른 두 사나이는 몸을 낮게 낮춘 상태로 연방 태클을 노렸다.

“がんばれ, 吉田!”

“あきらめないで!”

“힘내라, 장창선!”

“이겨라! 이겨라!”

체육관 안에서 일본 관중들과 재일교포들의 응원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하지만 막상막하인 상태에서 어느 쪽도 쉽게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1라운드는 물론, 2라운드에서도 둘 다 점수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3분의 시간도 거의 다 지나갈 무렵, 심판이 장창선에게 패시브를 주었다.

공격에 소극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아뿔싸, 너무 물러섰나.’

완벽한 찬스를 노리며, 달려드는 상대를 뿌리쳤던 게 화근이 되었던 모양.

장창선은 아쉬워하며 파테르 자세를 취했다.

‘어떻게든 이 위기에서 잘 벗어나야 해.’

조국의 첫 금메달이 걸려 있다. 여기서 허망하게 질 순 없다!

마음을 다진 순간, 경기가 재개되며 요시다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버텨야 해! 아니, 어떻게든 찬스를……!’

요시다가 장창선을 들어 점수를 내려는 순간, 찰나의 순간 상대의 빈틈을 찾아낸 장창선은 잽싸게 공수를 역전시켜 버렸다.

“우와아!”

양국 관중들이 토하던 우려와 환희의 탄성도 역전.

장창선은 탈출하며 1점을 딴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대로 요시다를 잡고 구르면서 2점을 추가했다.

그리고 잠시 후 경기 종료.

장창선은 어린아이처럼 껑충껑충 뛰며 기뻐했다.

“이겼다! 우승이야! 금메달이라고!”

해방 이후 첫 올림픽 금메달!

장창선과 코치들은 물론 목이 쉬어라 응원하던 재일교포들도 눈물을 글썽였다.

정말 누가 알았으랴.

일본의 심장부에서 일본 선수를 물리치고 금메달을 딸 줄은!

“하하핫, 북괴 놈들이 이걸 봤어야 하는데!”

“그놈들, 노메달로 끝날 것 같으니 꽁지를 말고 가 버린 거 아니야?”

북한 선수단은 도쿄까지 왔다가, 개막 직전 보이콧을 선언하고 돌아가 버렸다.

놈들에게 지지 않겠다고 태릉에 선수촌까지 만들었건만, 제대로 경쟁도 해보지 못한 것.

그래도 그 선수촌 덕분에 열심히 훈련했고, 이렇게 값진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다.

“돌아가면 카퍼레이드겠죠?”

“암, 너도 이제 이준영 선수 못지않은 영웅이 된 거야!”

잠시 후, 시상대에 오른 장창선은 환희의 미소를 지으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국기 게양식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지고 말았다.

태극기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 무슨…….”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국기가 올라가면서 흘러나오는 국가.

악단이 연주하고 있는 국가는 애국가가 아닌 일본의 기미가요였다.

은메달을 딴 요시다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고, 관중석에서도 와하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프닝.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장창선과 한국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야 이 개새끼들아-!”

극한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엄숙한 시상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

“이놈들이 정말 돌았구만.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나!”

격분한 김홍일 대통령의 앞에는 신문에서 오려 낸 사진들이 있었다.

거꾸로 게양된 태극기 아래 잔뜩 흥분한 금메달리스트의 모습과 대회 관계자들에게 삿대질하는 한국 코치들, 난입해서 항의하다 경찰에 끌려 나가는 교민 등등.

어제 정지 위성으로 일본에서 송출된 TV 중계는 장창선이 승리한 순간에 끊겼다.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취재원들의 보도로 알게 되었다.

보고를 들었을 때도 화가 났지만, 관련 사진을 보게 되니 정말이지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대회 조직위 측에서는 단순 실수였다고 둘러대고 있습니다.”

비서실장 장준하의 말에 김홍일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백번 양보해서 국기 게양이야 착각해서 실수했다고 치지. 그런데 국가 연주를 실수할 수 있나?”

“그게… 시상식 때 연주한 악단이 애국가를, 한국 국가를 전혀 몰랐답니다. 자기 나라 선수가 금메달을 딸 줄 알고 전혀 준비를 안 했다고 합니다.”

“허튼소리! 애국가를 부른다고 주재소로 끌고 가서 고문했던 놈들이 그걸 모를 리 있나!”

이번 사건은 외신에도 보도가 되고 있었다.

올림픽 역사를 통틀어도 정말 터무니없는 사건이었으니까.

하지만 황당해하는 외국인들과 달리 한국 정부나 국민들은 그냥 혀를 차고 넘어갈 수 없었다.

영광의 순간에 이런 모욕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

“대한체육회에 연락해서 남은 경기 보이콧하고 귀국하라고 해! 더 이상 쪽바리들 잔치에 어울려 줄 필요가 없으니까!”

“각하, 이런 식으로 흥분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보이콧을 하면 당장 일본을 상대로는 분이 풀릴지 몰라도, IOC와의 관계가 악화될 겁니다.”

올림픽 같은 국제 스포츠 대회는 한국이라는 변방의 국가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

주최 측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앞으로 올림픽에서 한국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었다.

“잘못한 건 그쪽이 아닌가. 일본 놈들이 제대로 운영하게 지도를 했으면 이런 일이 있었겠느냐고.”

“그러니까 항의를 하되 도가 지나친 대응을 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사고를 친 건 일본이니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면 됩니다.”

그러면서 장준하는 이번 사건이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했다.

“미국 정부가 계속 한일 관계 정상화를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 사건을 잘 이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긴 외신의 반응도 우리에게 유리하니…….”

한일 관계 정상화는 현실적으로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최대한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유리하게 협상해서 타결을 지어야 한다.

장준하 말대로 이번 사건이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일단 관계 정상화를 부추기는 미국에게도 ‘저놈들이 우리에게 하는 짓을 보라’며 항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일로 국내에서 반일 시위가 더 맹렬해지겠지. 여기에 정부가 규탄에 가깝게 일본에 강한 유감을 표명하고…….’

흥분을 가라앉히자, 어떻게 대응하고 어떻게 이용하면 될지 머릿속에서 차근차근 빌드업이 이루어졌다.

김홍일은 그 과정에서 외신을 크게 흔들 만한 사람이 머리에 떠올랐다.

정부의 민간 외교관이나 다름없는 인물인 이준영.

영국과 유럽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그가 이번 사태에 대해 한마디 해 준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었다.

***

일본 총리 이케다 하야토는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공들여 유치한 올림픽.

일본의 새 부흥을 만방에 알릴 이 초대형 이벤트에서 예상치 못한 대형 사고가 터졌다.

그 바람에 일본 올림픽 위원회는 물론, 정부 내각도 발칵 뒤집혔다.

“하… 머저리 같은 놈들! 왜 국가 하나 제대로 준비 못해서 일을 키운 거냐고!”

이번 올림픽은 일본의 경제력을 과시할 목적으로만 치러진 게 아니다.

제국주의 일본, 2차 대전 전범국으로서의 이미지를 씻고 평화의 국가임을 알릴 의도 또한 있었다.

하지만 개막 나흘 만에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터지며 그 의도가 의심받게 되었다.

‘알고 했으면 엄청난 모욕이며, 몰랐다면 심각한 무능입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강한 유감을 드러낸 한국 정부의 발표문에는 이와 같은 문장이 있었다.

외신의 반응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어떻게든 진화하려 애썼지만, 오랜만에 씹고 뜯고 까댈 건수를 잡은 기자들은 쉽게 펜을 놓지 않았다.

이렇게 불이 꺼지지 않는 상황에서 영국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스포츠 선수인 나 역시 이번 올림픽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일본은 자신들이 평화로운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고 선전하지만, 과연 그런지 의심스럽다…….>

영국의 더 가디언에 올라온 특별 사설.

이것을 쓴 사람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장인 이준영이었다.

<…일본은 과거 내 조국을 침략하고 수탈했으며, 우리의 말을 금지하고 문화를 파괴했다.

그들은 내 조국을 자신들의 일부로 만들려고 애썼다. 전쟁에서 패망하고 약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이 정말 내 조국을 인정했다면, 국기를 모독하고 국가를 바꿔치기하는 말도 안 되는 만행을 저지르진 않았을 것이다…….>

“젠장, 실수한 걸 가지고 이렇게나 물어뜯기냐.”

리준욘 이놈은 극우파가 대회 진행 요원으로 잠입해서 일을 저질렀다고 믿고 있는 걸까.

짜증과 코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그저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사는 영국의 시민들도, 대서양 너머 미국인들도 지난 세계 대전 중에 태평양과 동남아의 정글에서 피를 흘리며, 형제와 친구들을 잃었을 것이다.

승자들은 전쟁과 함께 증오를 거둬들였다. 하지만 약소국인 내 조국은 그렇지 못했다.

어떠한 사죄도,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저들에게 ‘한국이 발전한 건 식민 통치 때문’이라는 모욕을 들었다.

일본은 항상 그랬다.

약자를 짓밟고 강자에겐 굽실댄다.

그러다 자신들이 힘이 생겼다 싶으면, 서슴없이 그 강자의 등에도 칼을 꽂는다.

일본은 다시 경제적으로 부흥하고 있다.

다시 힘을 얻게 된 그들이 앞으로 칼을 휘두르지 않고, 꽃을 흔들고만 있을지 의심스럽다.>

사설을 다 읽은 이케다의 낯빛이 딱딱해졌다.

리준욘이 그냥 축구 선수 나부랭이면 모를까, 유럽에서 유명한 월드 클래스 플레이어다.

거기다 북해 유전 개발 투자로 유럽과 미국 재계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인물.

더구나 현재 일본의 식품과 제화 산업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경쟁자였다.

그만한 영향력 있는 인사가 영국의 정론지에 이런 사설을 올렸으니, 한동안 파장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거기다 대외적으로 일본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라도 박히게 된다면 큰일이다.

“앞으로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는 더 어렵겠구만.”

약 4년 전, 이승만 정권의 패악이 극에 달했을 때 일본 정부는 이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혁명으로 새 정부, 특히 정통성 없는 쿠데타 정권 같은 게 세워지면 그만큼 유리하게 외교적인 협상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바람은 망상으로 끝났다.

김홍일 대통령은 군부를 휘어잡았고, 전직 군인답게 추진력도 강했다.

거기다 외교관으로 오래 활동해서 외무 능력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아주 쓸 만한 카드까지 쥐었다.

‘소련과 중공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미국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원하고 있어.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는 상황이기도 하니…….’

현재 동남아시아에도 공산화가 진행 중이다.

조만간 베트남에 개입할 예정인 미국은 어떻게든 동북아시아는 안정시켜 놓으려 할 터.

더 이상 한국을 닦달하는 게 힘들면 일본에게 양보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았다.

‘사죄든 보상이든 만만찮은 대가를 지불하는 건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테지. 웬만하면 그 일을 내가 떠맡고 싶지 않은데…….’

안 그래도 요즘 건강도 좋지 않아 올림픽이 끝나면 퇴임할까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결심을 굳히기로 했다.

누가 다음 총리가 될지 몰라도, 자신 대신 이 골치 아픈 외교 문제를 잘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

1. 장창선 선수는 미국에서 열린 세계 레슬링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을 정도로 당대 우리나라의 스포츠 스타였습니다.

올림픽 레슬링 종목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메달을 따낸 선수이기도 했죠.

이후에 레슬링 지도자로 후배 양성에 힘써 훗날 양정모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데 기여했습니다.

2. 실제로 1964년 도쿄 올림픽 당시 시상식에서 엉뚱하게 기미가요가 연주된 나라는 에티오피아입니다. 당시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아베베 비킬라가 우승할 걸 예상 못해서 그런 사고가 터졌다고.

당연히 욕을 잔뜩 먹었습니다.

이후에는 악단이 국가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레코드로 틀어 주는 걸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국기가 뒤집힌 채 게양된 일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있었지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