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55화 (355/400)

Round 355. 오는 건 마음대로지만

저택을 찾아온 손님은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반쯤 벗겨진 50대 초반의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쾌활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캡틴 리. 일전에 연락했던 윌리엄 제이 바워만입니다. 이쪽은 저의 제자이자 동업자인 필립 햄슨 나이트지요.”

“반갑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준영은 반색을 하며 두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이들이 바로 원래 역사에서 나2키의 창업자인 빌 바워만과 필 나이트.

그들은 올해 1월 BRS라는 스포츠 용품 유통 회사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

창업한 지 1년도 안 되고, 이미 유럽과 아시아, 미국 시장까지 뻗어 나가는 준영과 조셉 포스터의 나2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준영이 이들을 만나고자 한 것은 이들이 먼저 연락을 해 왔고, 상당히 장래성 있고 유능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빌 바워만이 준영에게 말했다.

“일전에 연락했을 때 말했지만, 저는 귀사의 제품에 무척 감명했습니다. 편안함과 기능성에 있어 다른 업체들보다 월등했으니까요.”

“저나 조셉이 운동선수이다 보니 그쪽을 더 중시할 수밖에요.”

이 시기 대다수 제화 업체들은 튼튼한 제품이 대중의 선택을 받는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쉬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운동화에도 무거운 징을 박아 넣는 경우도 많았다.

그에 반해 준영은 가벼운 착용감과 기능성을 강조했고, 조셉도 이에 적극 동의했다.

물론 그렇다고 나2키의 제품이 형편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은 실컷 신고 다닐 정도의 품질은 되었다.

“어차피 구두와 달리 운동화는 소모품이니까요. 적당한 가격과 품질을 유지하고 착용감과 기능성을 신경 쓰면서 유행에 맞춰 주면 팔리게 되어 있습니다.”

“동의합니다. 요즘은 과거보다 기술이 발전하고 대량 생산이 가능한 시대이니 단가도 맞출 수 있지요.”

빌 바워만이 고개를 끄덕일 때, 필 나이트가 본격적으로 방문 목적을 밝혔다.

“저는 2년 전에 대학을 졸업하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다녔죠. 그러다 아시아에서 싸고 품질 좋은 제품들을 보고 수입해 판매할 생각을 하게 되었죠.”

원래 필 나이트가 제일 먼저 접한 제품은 일본 운동화였다.

그러다 나2키의 한국 법인인 승리제화에서 수출되는 한국 제품도 보게 되었다고.

“솔직히 품질은 일본제가 더 나았죠. 하지만 가격은 한국산이 더 싸고 착용감이나 기능성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빌 바워만과 필 나이트는 승리제화 운동화를 주문해서 미국에서 판매했다.

제법 쏠쏠한 수익을 얻었지만, 문제는 나2키 본진이 직접 미국 시장을 넓혀 가고 있다는 점.

그래서 본진에 연락을 하고, 그 대표 중의 한 명을 오늘 만나게 되었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저희 제품의 안정적인 판매 대행입니까?”

“그것도 있지만, 제품 개발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빌 바워만은 상당히 세련되고 기능적으로 우수한 나2키 제품에 매료되었다.

특히 주목한 것은 밑창에 미끄럼 방지를 위해 파 둔 패턴.

자신도 와플 팬을 보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쪽은 동심원이나 격자 등, 상당히 다양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이 패턴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 보였다.

그건 육상화나 농구화와 비교하면 알 수 있었다.

움직임이나 운동량, 그리고 마찰 정도가 다르기에 형태도 달리하는 게 맞았다.

이런 기능적인 고찰은 다른 업체들보다 훨씬 앞선 수준이었다.

“너무 터무니없는 요구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동참시켜 주신다면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준영은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 들어온다는 속담이 어떤 건지 체감할 수 있었다.

그는 입이 찢어질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미국 시장을 계속 개척하자면 미국분들의 협력이 필수적이죠. 거기다 바워만 씨는 매우 유능한 육상 감독님이라 들었습니다. 동참해 주신다면 큰 힘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캡틴 리.”

거물 인재들을 영입한 준영은 내심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들어오는 건 마음대로지만 나가는 건 아닐 거야.’

원래 역사에선 일본 운동화를 유통하다 독립해서 세계적인 브랜드를 차리는 이들.

그 점을 알고 있기에 준영은 이들을 절대 놓아주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

1964-65 시즌 개막을 코앞에 둔 맨유 선수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몸 상태를 끌어올렸다.

“좋아! 좀 더 빨리!”

“집중해, 토니! 한눈팔지 말라고!”

훈련의 강도는 높고, 분위기도 무척 진지했다.

이렇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지난 시즌 무관, 즉 우승컵을 하나도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리그 2위로 소위 말하는 콩라인에 그쳤고, FA컵도 준결승에서 웨스트햄의 제프 허스트에게 일격을 맞고 탈락.

최근 몇 년 사이 최저의 성적이라 할 만했다.

그렇다 보니 구단 안팎으로 이런저런 실망 섞인 비판들이 나왔다.

투지를 잃었다는 둥, 비행기 사고로 팀이 파탄 났던 때도 더블 우승을 하지 않았냐는 둥, 좋은 시설에서 선수들이 배가 불렀다는 둥.

“못할 때도 있는 거지. 강등당한 것도 아닌데 너무하단 말이지.”

“한동안 우승을 계속하니 그게 당연한 줄 안 거죠.”

버스비 감독과 머피 코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승에 대한 도전은 낭만적으로 여겨지기 마련.

하지만 그게 당연시되고 강요받는 듯한 분위기가 되면 기분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실제 이런 중압감 때문에, 그로 인한 치열한 주전 경쟁에 지쳐 이적을 요청해서 팀을 떠난 선수들도 있었다.

“셰이 브레넌, 조니 자일스, 데이비드 허드… 다들 아까운 선수들이지.”

“새로 자리 잡은 곳에서 잘했으면 좋겠군요.”

둘째는 스쿼드에 상당한 변동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중압감 탓에 떠난 선수들 외에, 외부에서 매력적인 제안을 받고 이적한 선수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알베르토 스펜서와 주제 토히스가 그랬다.

알베르토는 거절할 수 없는 금액을 날린 레알 마드리드로 갔고, 토히스는 벤피카로 금의환향했다.

“떠나 버린 선수들은 그렇다 치고, 장기 부상으로 재활 중인 선수들은 아직 복귀가 불투명하니까.”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주전 골키퍼인 해리의 부재가 뼈아프죠.”

그나마 다행인 건 간판스타이자 팀의 기둥인 바비 찰튼, 던컨 에드워즈, 그리고 이준영은 건재하다는 점이다.

거기다 젊고 재능 있는 선수들이 활력을 주고 있었다.

“조지는 언론에서 주목해야 할 공격수로 선정된 모양이더군.”

“지난 시즌 데뷔해서 26경기 6골을 넣었으니까요. 애송이치고 나쁘지 않은 스탯이죠.”

조지 베스트뿐만 아니라, 지난 시즌 말에 준수한 데뷔전을 치른 독일인 삼총사, 프란츠 베켄바워와 게르트 뮐러, 제프 마이어의 활약도 기대되었다.

“2군에 있는 리틀 리도 괜찮아 보이던데…….”

“그 녀석의 예측 불가 테크닉을 볼 때마다 기대감이 들긴 하죠. 하지만 아직 덜 다듬어졌어요.”

그래서 머피는 리틀 리, 이희택의 경우 좀 더 기본을 쌓으라고 지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버스비는 그와 생각이 달랐다.

“억지로 잡아 두고 다듬으려 들면 그 친구가 가진 독특한 재능이 사라질지 몰라. 스스로 부딪쳐 가며 연마하게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다고 1군에 발탁하기는 좀…….”

“찬찬히 생각해 보자고. 가까이 있는 하부 리그 팀에 임대를 보내는 방법도 있으니…….”

다가오는 새로운 시즌.

다시 왕좌를 되찾기 위해 버스비와 머피는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

“휴, 끝났다.”

“목말라 죽겠네.”

훈련을 끝마친 선수들에게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수고하셨숨니다~”

서투르게 인사를 건넨 안나는 양손으로 들고 있던 물통을 내밀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지쳐 있던 선수들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안나야.”

“덕분에 피로가 싹 씻겨 나가는 것 같구나.”

준영은 안나를 종종 클럽 하우스로 데려오곤 했다.

리즈가 대학원 강의를 듣거나, 넥스트에서 연구와 업무를 할 때는 돌봐 주기 힘들기 때문.

안나도 아빠와 동료들이 연습하거나 경기하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다.

요즘엔 그렇게 보면서 자신도 공을 차며 드리블 연습(?)을 하기도 했다.

“주장, 안나도 축구 선수 시킬 겁니까?”

안나의 머리를 쓰다듬던 바비 찰튼의 물음에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노는 거면 몰라도 전업 선수는 시키고 싶지 않아. 그냥 공만 차면 몰라도, 머리로 받고 걷어차고 때리고 잡아채는 게 이 바닥 일상이잖아.”

원래 축구는 몸싸움이 치열하지만, 특히 에이스 플레이어는 더욱 거친 마크와 반칙에 시달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 부상당하고 심지어 은퇴까지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준영은 그런 아수라의 길을 천사 같은 딸아이에게 걷게 하고 싶지 않았다.

“웸블리 전투를 생각하면 확실히 그래요.”

알렉스가 그 일을 들먹이자, 준영은 질색을 했다.

“야, 그 이야긴 하지 마. 생각만 해도, 어휴…….”

1962-63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전.

스웨덴의 IFK 노르셰핑, 체코슬로바키아의 두클라 프라하, 네덜란드의 페예노르트를 격파하며 결승에 오른 맨유의 상대는 이탈리아 챔피언 AC 밀란.

체사레 말디니가 이끄는 AC 밀란은 1957-58 시즌 준결승에서 떨어진 원한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거친 태클과 파울을 서슴없이 일삼았다.

전반 15분도 안 되어 알베르토 스펜서가 골키퍼 조르지오 게지와 충돌, 코뼈가 부러져 전열에서 이탈했다.

여기에 조반니 트라파토니와 볼 다툼을 벌이던 알렉스 퍼거슨은 상대의 엘보 어택에 을용타를 연상시키는 퍼기타로 되갚았다 사이좋게 퇴장당했다.

‘그 바람에 양 팀 선수들이 뒤엉켜 싸우느라 10분 이상 중단되었지.’

준영도 발목을 걷어차이거나, 상대의 팔꿈치에 이마가 찢기며 집중 공격을 당했다.

후반전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잔니 리베라와 던컨이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는 신경전을 벌이는 등, 경기 중에 충돌과 소란은 계속되었던 것.

당연히 경기 흐름이 정상적이지 않았고, 선수들은 냉정을 잃었다.

그 바람에 맨유는 전반전 데니스 로가 선제골을 넣고도 후반전에 브라질 출신의 공격수 호세 알타피니에게 연거푸 골을 내주며 2 대 1로 패했다.

그렇게 맨유는 다섯 시즌 동안 지켜 오던 유럽 챔피언의 왕좌를 상실했다.

“관중들이 너무했죠. 같은 영국인이 맞나 싶더라고요.”

“다른 곳도 아닌 웸블리에서 이탈리아 팀을 응원하다니. 선 넘었지, 그건…….”

그때 아스날과 토트넘, 풀럼, 웨스트햄 서포터들은 명예 이탈리아인, 아니 AC 밀란 팬을 자처했다.

그들은 자기 팀 레플리카를 입고 찾아와서는 ‘I hate United!’를 외치며 이탈리아 국기를 흔들어 댔다.

“우릴 미워하는 건 알았지만, 매국노를 자처할 줄은 몰랐어요.”

“쳇, 부러우면 우리처럼 유러피언 컵을 우승하던가.”

“그러게요. 무능한 놈들…….”

현재까지 맨유 외에 유러피언 컵을 든 잉글랜드 팀은 없었다.

다만 보다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해외의 뛰어난 선수를 영입하는 등 노력하는 팀들이 있었기에 앞으로 나타날 가능성은 높았다.

“큰일 났어, 존!”

준영이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전력 분석팀의 팀장을 맡고 있는 로저 바인이 황급히 달려왔다.

“무슨 일이죠?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주 큰 문제지. 리버풀에서 흘러나온 얘긴데…….”

이어지는 로저의 말에 준영의 낯빛이 달라졌다.

사실이라면 이번 시즌도 굉장히 힘들어질 수 있으니까.

***

이을용 코치가 현역 시절 보여 줬던 참교육이죠.

본인은 훗날 ‘해선 안 될 행위’라며 반성했지만, 실제 저 경기에서 중국 선수들이 보여 줬던 무공에 비하면 별거 아닌 초식이었습니다. 보복 행위가 나쁘다고 퇴장당한 것뿐.

그래도 저 시절에 중국이 스포츠에서 더티 플레이를 하면 징계도 받고 벌금도 내고 그랬는데, 최근에 동계 올림픽을 보면 그것도 없는 듯합니다.

스포츠가 국력에 좌우되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이렇게 노골적일 수 있나 씁쓸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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