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54. 엎질러진 물
6월 중순 아침.
준영과 프레드로 일가는 분만실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에 리즈가 심한 진통을 느끼면서 부랴부랴 병원으로 옮겨지게 된 것.
“후아암, 큰언니,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그보다 카린 너 입 찢어지겠다.”
“졸린 걸 어떡해. 머리가 식빵같이 생긴 외계인을 만나는 꿈을 꾸다 갑자기 일어났다고.”
“개꿈이구나.”
졸려 하는 카린에게 어깨를 빌려 주던 앤지는 준영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안절부절못하고 왔다 갔다 하는 그의 모습에 알버트는 핀잔을 섞어 만류했다.
“앉아 있게. 거참 나까지 불안해지려 하지 않나.”
“휴, 죄송합니다.”
그동안 건강하게 태교에 힘쓰던 리즈였지만, 출산이라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보니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거기다 시간도 꽤 흘렀다.
“분만실에 들어간 지 한참 되었는데……. 어떤 상태인지 얘기나 좀 들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한나절은 더 있어야 할걸.”
“헉, 그렇게 오래요?”
“그럼. 아무래도 초산이고, 그만큼 힘들 테니까.”
그런데 한참 걸릴 거라는 알버트의 예상이 무색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담당 간호사가 찾아와 희소식을 전했다.
“축하드려요.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합니다. 아주 예쁜 공주님이에요.”
“와아아! 정말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간호사에게 연방 감사를 표하는 준영은 월드컵에서 골을 넣었을 때보다 더 흥분하고 환호했다.
앤지와 카린, 그리고 알버트도 무척이나 기뻐했다.
잠시 후, 그들은 회복실로 옮겨진 리즈를 만났다.
리즈는 지치고 힘들어 보이긴 했지만, 뿌듯함과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 고생했어. 그리고 고마워.”
“오히려 내가 고마운걸요.”
리즈는 이따금 악몽을 꾸곤 했다.
준영에게 구원받지 못한 채, 식물인간으로 수년을 보내다 끝내 차가운 땅속에 파묻히는 꿈.
마치 ‘너는 원래 살아 있어서는 안 되는 운명’임을 알려 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를 갖게 된 후론 악몽을 전혀 꾸지 않았다.
원래 운명이야 어떻든, 생명을 잉태함으로 자신이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인식해서 그런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을 구해 준, 그리고 소중한 아이를 안겨 준 준영이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다행이다. 이 할아비는 한나절은 더 걸릴 줄 알았단다.”
알버트가 멋쩍은 표정을 짓자, 리즈는 생긋 웃음을 지었다.
“간호사분들 말이 제가 순산형이래요. 거기다 건강하고 체력도 무척 좋다고 하고요.”
“허허, 평소에 테니스와 운동을 즐겨 해서 그런 모양이구나.”
알버트와 리즈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카린은 이리저리 살펴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아기가 없어. 혹시 누가 훔쳐 간 걸까?”
“바보, 신생아실에 가 있겠지.”
리즈를 쉬게 해 주고 일행은 아기를 보러 갔다.
유리창 너머로 강보에 싸여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아기를 본 준영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벅찬 감격을 느꼈다.
‘고맙다. 이렇게 태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너무 벅차고 기쁜 나머지 눈시울을 붉히고 있던 그에게 알버트가 말을 건넸다.
“우리 증손녀가 참으로 귀엽군. 그건 그렇고, 이름은 정했나?”
“아, 이름이요? 생각은 해 뒀는데, 맘에 드는 게 없어서요.”
이름을 한국식으로 할지, 아니면 영국식으로 할지도 고민이었다.
“그럼 집안의 어른인 내가 지어 줘야겠군. 안나라고 하는 건 어떤가?”
“안나요?”
“성모 마리아 모친의 이름이지. 히브리어로 은총 혹은 은혜를 뜻해.”
“좋은 이름이네요.”
준영에게 있어 신이 내린 은총과 같은 아이였기에, 딱 좋은 이름이다 싶었다.
‘이안나, 안나 리. 그게 네 이름이란다.’
이 작은 천사에게 축복이 있기를.
준영은 마음속으로 수없이 기원했다.
***
준영이 득녀를 기뻐하고 있을 즈음, 남미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는 제7회 월드컵 결승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Brazil! Le le oh Brazil!”
“Come on, England! Come on!”
세계 최강의 자리를 두고 브라질과 잉글랜드가 격돌했다.
두 나라는 지난 스웨덴 월드컵 결승에서도 맞붙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대중의 관심이 무척 컸다.
“잉글랜드가 챔피언 자리를 지켜 낼까, 아니면 브라질이 복수에 성공해서 쥘리메컵을 손에 넣을까?”
“여기는 남미라고. 브라질 응원단에 비하면 잉글랜드 쪽은 한 줌도 안 돼.”
“흥, 응원보다 중요한 건 실력이지.”
“브라질이 잉글랜드보다 못할 것 같아?”
취재원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오가는 가운데, 바비 무어의 패스를 받은 던컨 에드워즈가 돌진해 들어갔다.
마치 폭주 기관차인 양 브라질 진영으로 내달린 던컨은 과감하게 슈팅을 때렸다.
무회전으로 날아간 중거리 슛은 브라질 골망을 찢어발길 듯이 흔들어 놓았다.
“우와아! 잉글랜드, 선제골!”
“역시 빅 던이야! 필요할 때 한 건 해 준다니까!”
전반 15분 잉글랜드의 선제골.
조 예선 첫 경기 헝가리와의 경기에서도 선제골을 넣었던 던컨은 팀의 3전 전승을 견인했다.
그리고 8강 체코슬로바키아, 준결승 유고슬라비아전에서도 골을 터트리며 천재적인 실력을 만방에 과시했다.
“FA에서 존 Y. 리의 발탁을 고려하지 않을 만하군. 던컨이 있으니 아쉬울 게 없다 이거지.”
“그래도 존 Y. 리가 있었으면 더 쉽게 경기했을지 몰라요. 수비에서 엄청난 중량감을 가진 선수이니…….”
기자들의 대화가 도중에 끊겼다.
브라질의 반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반격의 선봉장은 펠레.
그는 조 예선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부상당한 후, 계속 출전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회복은 되었지만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아 감독은 출전시키지 않으려 했지만, 본인이 강하게 출전을 요청해 왔다.
잉글랜드에 대한 복수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몸 상태는 7~80퍼센트 정도. 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해!’
측면의 가린샤에게 패스를 넘겨준 펠레는 곧바로 중앙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레이 윌슨을 제친 가린샤의 낮은 크로스가 정확히 발 앞에 전달되었다.
그리고 펠레는 발끝으로 방향만 살짝 돌려놓는 것으로 바비 무어와 론 스프링겟 골키퍼를 뚫어 버렸다.
“동점이다!”
“이럴 줄 알았지! 브라질이 질 리 없다고!”
환호하는 관중들 앞에서 골 세리머니를 펼친 펠레.
그는 시원섭섭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방금 골이 존 Y. 리를 상대로 넣은 거라면 더 기분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존 Y. 리는 이번 월드컵에 출전하지 않았다.
작년에 그는 잉글랜드 대표팀이 아닌, 조국 대한민국을 선택했기 때문.
펠레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어이없는 한편으로 화가 났다.
존 Y. 리 본인은 보은과 도리를 다했으니 조국을 위해 뛰고 싶다고 했지만, 정말 그렇겠는가.
‘잉글랜드 쪽에서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다면 그런 선택은 안 했을 거야. 멍청한 것들 같으니!’
덕분에 기대했던 복수전에 약간 흥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풋볼 리그에서 번번이 자신을 골탕 먹인 유나이티드 놈들, 바비 찰튼과 던컨 에드워즈, 레이 윌슨이 있으니 제대로 앙갚음을 해 줄 것이다.
“아, 잉글랜드가 점점 밀리고 있어.”
“이르게 만든 동점 골로 브라질이 리듬을 탔구먼. 저러면 힘든 경기가 될 수밖에 없어.”
펠레와 가린샤, 마리우 자갈루와 바바.
삼바 축구 최강의 공격수들이 거침없이 잉글랜드 진영을 흔들어 놓으며 득점 찬스를 만들어 냈다.
바비 찰튼과 던컨이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수비에 힘을 보탰지만, 중과부적.
전반전은 어렵게 1 대 1로 마무리.
후반전에도 자갈루에게 단독 찬스를 허용하는 등 위태위태하다가 결국 20분대부터 파국을 맞기 시작했다.
「가린샤, 박스 측면으로 파고들어 왔습니다. 위험하군요. 잉글랜드, 수비 가담이 느려요!」
레이 윌슨이 황급히 따라잡았지만, 가린샤는 그의 태클을 흘려 내고 중앙으로 크로스를 올렸다.
바비 무어와 던컨은 쇄도하는 바바와 펠레를 막아 세웠다.
하지만 배후로 들어오는 미드필더 지투는 완전히 놓쳐 버렸다.
노마크 상태에서 지투는 머리로 가볍게 공을 밀어 넣으며 득점에 성공했다.
“역전! 브라질, 역전!”
“카나리아 군단의 우승이 눈앞에 있다!”
“설레발치지 마. 부정 탄다고!”
경기가 뒤집히자, 전열을 정비한 잉글랜드는 반격을 시도했다.
후반 30분, 던컨이 오프사이드를 깨는 기가 막힌 패스로 조니 헤인스에게 일대일 찬스를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헤인스는 그 좋은 찬스를 크로스바 위로 날리고 말았다.
“아니, 그걸 그렇게 차면 어떡하냐고!”
“존 Y. 리처럼 톡 띄워 차 넣는 게 그리 힘들었던 거야?”
잉글랜드 팬들의 한탄이 터져 나올 때, 브라질이 다시 공격에 나섰다.
니우통 산투스의 패스가 디디를 거쳐 펠레에게 이어졌고, 펠레는 중앙에서 바비 찰튼과 던컨을 연달아 제쳐 내며 잉글랜드 골대로 달려갔다.
“큭, 망할 자식!”
“하하핫! 어디 한번 쫓아와 보라고!”
바비 무어가 달려 나와 태클로 펠레를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펠레는 바바에게 패스를 보냈고, 바바는 수비수 모리스 노먼을 따돌리고 잉글랜드의 골문을 흔들었다.
“하아, 끝났군.”
경기를 지켜보던 잉글랜드의 월터 윈터보텀 감독은 길게 한숨을 토했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지난 대회 맹활약을 보여 주었던 준영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존이 있었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모든 게 순수 잉글랜드 선수를 고집하던 협회의 기술위원들, 그리고 그들의 고집을 꺾지 못한 자신의 탓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제 뽑고 싶어도 발탁할 수 없다는 점.
올해 FIFA에서는 선수 국적 변경을 금지하는 규정을 세웠다.
조국인 한국 대표팀에서 뛴 존 Y. 리는 이제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
다음 대회는 잉글랜드에서 열린다.
홈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우승을 놓치지 않으려면 엎질러진 물 대신에 새로운 물을 담아야 할 것이다.
***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들판.
까만 머리에 파란 눈망울을 반짝이는 꼬마 숙녀는 산토끼를 보고 쫓아갔다.
“와! 토끼, 토끼!”
“안나, 조심하렴! 넘어진다!”
수풀 속으로 아장아장 달려가는 딸아이의 뒤로 준영과 리즈가 따라갔다.
쫓아가는 걸 멈추고 웅크리고 있던 안나가 뭔가를 집어 들고 리즈에게 자랑스럽게 보였다.
“엄마, 이거 기다래!”
“꺄아악!”
준영은 번개같이 딸의 손에 잡힌 풀뱀을 집어서 멀리 집어 던졌다.
“안나, 저런 거 만지면 안 돼.”
“안 돼?”
“그래, 무서운 거야. 물리면 아파. 큰일 난다고.”
한숨을 돌린 준영은 말괄량이 딸을 번쩍 안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세월 참 빠르네.”
“화살처럼 날아간다는 옛말도 있으니까요.”
조그만 천사가 태어난 지 벌써 2년.
용모는 리즈를 닮아 귀엽고, 몸은 준영을 닮아 튼튼하게 자랐다.
비슷한 또래 남자아이들보다 크고 힘이 셀 정도로.
호기심도 왕성해서 함부로 눈을 뗄 수 없었다.
“건강하게 자라는 건 좋지만, 너무 말괄량이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차차 나아지겠죠.”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준영은 저택 앞에 낯선 차량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손님이 온 모양이군.”
“못 보던 차인데… 당신을 만나러 온 걸까요?”
최근 2년 동안 준영을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선수로서 명성은 이미 월드 클래스.
거기다 식품과 광고, 유전 개발 등 투자하고 있는 여러 사업들이 성공하며 재계에서의 입지도 훨씬 더 커졌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도 주목하고 있을 정도로.
‘혹시 일전에 연락한 사람들이 찾아온 건가.’
그렇다면 서둘러 만나 봐야 한다.
준영의 발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
실제로 칠레 월드컵에서 브라질과 잉글랜드가 맞붙은 건 8강에서였습니다. 브라질이 3조 1위, 잉글랜드는 4조 2위였으니까요.
이 경기는 펠레가 부상으로 빠졌지만, 가린샤가 맹활약을 펼치며 브라질이 3 대 1로 승리했죠.
번외로 경기 중에 떠돌이 개 한 마리가 난입해서 잉글랜드 풀백인 레이 윌슨을 쫄랑쫄랑 쫓아다녀 잠시 경기가 중단된 해프닝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