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53화 (353/400)

Round 353. 1962년 5월

창밖으로 빗방울이 보슬보슬 떨어져 내렸다.

5월이지만 아직도 날씨가 쌀쌀했기에 준영은 난방에 신경을 썼다.

혼자 있으면 몰라도 리즈와 함께 있었기 때문.

더구나 배 속에 아이까지 있으니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아…….”

“왜, 어디 안 좋아?”

걱정스러운 준영의 물음에 만삭에 가까운 배를 매만지고 있던 리즈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또 움직여서요. 얼른 밖으로 나오고 싶은가 봐요.”

“개구쟁이구나.”

몸을 숙인 준영은 조심스럽게 리즈의 배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아이의 움직임을 좀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 방금 찼어요.”

“이 녀석이… 아빠 머리 축구공 아니다.”

“호호호, 피는 못 속이나 봐요.”

밝게 미소 지은 리즈는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보듬었다.

몸이 무거워지면서 불편하고 힘들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기대와 설렘이 커 가기에 견뎌 낼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준영은 탁자에 놓인 카메라를 들고 리즈의 모습을 담았다.

“또 찍어요?”

“우리 여왕님 자태가 너무 아름다워서 말이지.”

S라인 때도 맵시가 좋았지만, D라인의 리즈는 정말 여신같이 귀하고 성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을 담아 두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아, 항상 카메라를 곁에 두고 있었다.

“기사님, 찬양은 감사하지만 일단 정리하던 걸 마무리하시는 건 어떤가요?”

“예, 여왕님. 그리하지요.”

준영은 신문과 잡지, 사진 등이 쌓인 탁자로 돌아갔다.

지난주 5월 2일,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유러피언 컵 결승전을 끝으로 맨유의 1961-62 시즌이 끝났다.

지금 준영은 그동안 모은 자료들로 스크랩북을 만드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지난 시즌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진짜 폭주 기관차처럼 달렸지.’

풋볼 리그 우승컵을 탈환하자!

이 목표에 호응한 맨유 선수들은 리그 초반부터 폭풍 연승을 쌓아 나갔다.

이 기세는 후반기에도 쭉 이어지면서 4월이 되기 전에 우승을 확정 지었다.

‘근데 FA컵이 아쉬웠단 말이야.’

3월 31일, 셰필드의 힐스버러에서 열린 FA컵 준결승.

후반 43분, 에우제비우에게 뼈아픈 결승 골을 허용한 맨유는 토트넘에게 3 대 2로 지고 말았다.

그리고 토트넘은 그 여세를 몰아 작년에 이어 또다시 FA 우승컵을 들었다.

‘닭집 놈들만 아니었으면 트레블이었는데!’

준영은 그 패배를 유러피언 컵 4강에서 갚아 주었다.

4월 5일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열린 2차전에서 직접 두 골을 터트리며 완승을 거둔 것.

그런데 복수혈전을 끝내고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저승사자 군단 레알 마드리드.

8강에서 유벤투스를, 그리고 4강에선 데니스 바이올렛이 이끄는 리에주 로열 스탕다르 클럽을 격파하고 결승에 올라온 그들은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어휴, 진짜 심장이 멎을 뻔한 경기였지.’

푸스카스가 슈팅하는 장면이 실린 신문을 보며 준영은 일주일 전에 있었던 결승전을 떠올렸다.

***

「골! 골! 악마의 왼발이 또 한 번 작렬! 레알 마드리드가 두 골 차로 앞서 나갑니다!」

요란스러운 관중들의 함성.

그리고 2 대 0으로 수정되고 있는 스코어보드.

맨유 선수들은 멍하니 푸스카스의 골 세리머니를 바라보았다.

힘든 경기가 될 것은 이미 예상했지만, 전반전이 절반도 지나기 전에 두 골이나 얻어맞을 줄이야!

“세상에, 대포알이 따로 없군.”

“저게 34살 된 선수의 킥력이라니…….”

“저 아저씨도 스탠리 매튜스 같은 부류인가 봐.”

오늘은 정말 질 수 있겠다.

맨유 선수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최근 경기에서 이렇게 초반부터 두 골이나 먼저 얻어맞은 적은 없었으니까.

‘제대로 칼을 갈고 나오셨구만.’

준영은 푸스카스를 필두로 한 레알 마드리드의 대공세에 혀를 내둘렀다.

푸스카스, 디 스테파노, 프란시스코 헨토가 건재한 데다, 루이스 델 솔, 저스트 테자다가 가세한 공격진은 2년 전보다 훨씬 빠르고 날카로웠다.

무엇보다 지금 레알 마드리드에게는 필승의 의지가 있었다.

마땅한 적수가 없어 따분해하던 최강자의 느슨한 면모가 아닌, 몰락을 경험한 챔피언이 복수를 불태우는 모습.

그렇다 보니 지금 레알 마드리드는 공격뿐만 아니라 호세 산타마리아가 조율하는 수비도 무척이나 끈끈했다.

‘그래도 우승컵은 양보 못해!’

부활한 저승사자의 제물이 되는 건 사양이다.

거기다 월드컵에도 못 나가는데, 유러피언 컵이라도 번쩍 들어야 할 게 아닌가.

“가자! 저승사자 놈들에게 한 방 먹여 주자!”

준영의 독려에 던컨을 시작으로 맨유 선수들이 차례로 호응하고 나섰다.

“그래, 지금 유럽 챔피언이 누군지 똑똑히 알려 주자고!”

“데니스 형님의 결승을 좌절시킨 원한을 갚아야지!”

“Glory United!”

그렇게 분위기를 바꾼 효과가 있었던 걸까.

푸스카스에게 두 번째 골을 내준 지 5분도 안 되어 맨유에게 좋은 찬스가 찾아왔다.

우측면을 재빠르게 파고든 알베르토 스펜서가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렸고, 수비수의 마크를 뿌리치고 뛰어오른 주제 토히스가 헤딩으로 공을 떨어트렸다.

다들 쇄도하던 바비 찰튼에게 패스가 갈 것이라고 봤지만, 총알같이 달려든 준영이 논스톱으로 때려 넣으며 그물을 흔들었다.

「유나이티드가 추격 골에 성공합니다. 이제야 잠에서 깨어난 모양입니다. 과연 경기를 뒤집을 수 있을지?」

그리 쉽게 추격하진 못할 터.

그런데 이렇게 예상하던 축구인들과 기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전반 33분, 레알의 페널티 박스 외곽에서 과감하게 때린 알베르토의 슈팅.

이것은 골키퍼 호세 아라키스타인의 펀칭에 아랑곳하지 않고 골망을 흔들었다.

“우와, 2 대 2다!”

“영국 놈들, 만만치 않구나!”

“당연하지! 저쪽은 벌써 대회 4연패 중이라고!”

이 페이스면 역전될지 모른다.

그러나 절치부심 끝에 다시 정상 무대에 오른 레알 마드리드는 만만치 않았다.

「테자다가 디 스테파노에게 패스. 앞에 존 Y. 리가 있지만 스테파노, 과감하게 치고 들어갑니다!」

왕년, 아니 지금도 유럽 최강의 공격수로 손꼽히는 디 스테파노는 준영의 끈덕진 마크에도 불구하고, 박스 안에서 틈을 만들어 슈팅을 날렸다.

골키퍼 데이비드 가스켈이 몸을 날려 슈팅을 쳐 냈지만, 문전으로 뛰어든 푸스카스가 골대 안으로 공을 밀어 넣었다.

그렇게 전반전은 푸스카스의 해트트릭에 힘입은 레알 마드리드가 3 대 2로 앞선 채 끝났다.

“이 시합, 진짜 모르겠군!”

“아냐. 현재로선 레알 마드리드 쪽이 더 유리해.”

따라잡은 상황에서 또다시 강펀치를 맞았으니, 심리적인 위축이 적지 않으리라.

그래서 다들 후반전에 맨유가 고전할 것이라 봤지만…….

「고올-! 바비 찰튼, 기가 막힌 원더골! 유나이티드가 또 한 번 저승사자들의 덜미를 잡습니다!」

후반 5분, 짐 박스터가 밀어 준 패스를 바비 찰튼이 먼 거리에서 과감하게 때린 것이 엄청난 궤적을 그리며 레알 골대에 박혔다.

레알 선수들이 전원 머리를 쥐어뜯었을 정도로 충격은 상당했다.

“이렇게 되면 정말 모르겠군.”

“과연 레알 마드리드가 또 따돌릴 수 있을까?”

6만여 명의 관중들이 흥미진진하게 경기를 지켜보았다.

왕좌를 지키려는 쪽과 탈환하려는 쪽.

양 팀 모두 빠르게 공방을 이어 갔지만, 이후 점수는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양 팀 선수들이 모두 지쳐 가던 후반 41분, 레알이 절호의 찬스를 잡았다.

「디 스테파노가 돌파해 갑니다. 한 명 제치고, 존 Y. 리가 황급히 태클! 아, 이거……!」

디 스테파노가 박스 안에 나동그라지자, 준영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으아, X 됐다!’

분명히 먼저 공을 건드린 것 같은데, 심판도 그리 생각해 줄지?

몇 초 안 되는 상황이 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마치 사형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가 된 심정.

그러나 휘슬은 울리지 않았다.

‘페널티킥이 아닌가?’

안도할 틈은 없었다. 흘러간 공은 프란시스코 헨토가 잡았으니까.

“저놈 막아!”

“제길, 늦었어!”

헨토의 슈팅이 골키퍼 가스켈의 펀칭에 굴절되면서 골대 구석으로 향했다.

또다시 눈앞에서 느리게 가는 시간, 준영의 피가 바싹 말랐다.

터엉-!

‘살았다!’

골대에 맞은 공이 튕겨 나가자 번쩍 정신을 차린 준영이 황급히 공을 걷어 냈다.

던컨이 그 공을 잡았고, 곧장 총알같이 레알 마드리드 진영으로 달려가는 알베르토에게 길게 패스를 보냈다.

남은 기력을 짜낸 알베르토는 마침내 레알의 박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침착하게 산타마리아의 태클을 피한 후, 슛을 때렸다.

지면을 낮게 구른 공은 아라키스타인의 옆구리를 통과하며 골라인을 넘었다.

최후의 순간에 꽂힌 붉은 악마의 카운터펀치는 저승사자 군단을 완전히 K.O시켰다.

***

‘진짜 수명 깎이는 경기였어.’

다섯 번째 우승컵을 든 사진을 보며 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축구 팬들이 보기엔 역대급의 명승부일지 몰라도, 선수 입장에선 피가 마르는 시합이었다.

‘그나마 이겼기에 망정이지, 졌으면 후유증이 장난이 아니었겠지.’

내년에는 어떤 상대를 만날지 모르지만, 올해같이 힘든 경기가 되지 않기를.

그리 기원한 준영은 우승 트로피를 든 사진을 스크랩북의 마지막 장에 붙여 넣었다.

그것으로 1961-62년 시즌 기록 정리는 완료되었다.

“21세기라면 블로그나 인스타 같은 소셜 네트워크로 정리했을 텐데…….”

“유감이네요. 아직 50년은 더 지나야 하죠?”

“그때까진 이렇게 아날로그 방식으로 살아야지. 우리 여왕님이 컴퓨터 발전을 가속시켜 주시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지.”

노트북과 스마트폰 등 21세기에서 가져온 모바일 기기들은 현재 비밀 금고 깊숙한 곳에 봉인되어 있다.

전원을 충전하면 아직 사용할 수 있지만, 메모나 계산, 녹음과 녹화 등 특별한 기능을 사용할 게 아니면 별로 쓸 일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연락을 하고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기기인데, 이 시대에서는 그럴 일이 없었으니까.

처음엔 버릇처럼 챙겨 다니던 준영도 요즘엔 거의 안 쓰게 되었다.

리즈가 미래의 컴퓨터 시스템을 살펴보고 싶다며 요청할 때만 꺼내는 게 다였다.

물론 가끔씩 미래의 영화를 감상할 때도 쓰고.

“안 그래도 요즘 미국 쪽은 네트워크 분야를 이론이 아닌 현실에서 사용하려 애쓰고 있대요.”

“그렇겠지. 우주 개발에서 소련을 이기려고 발버둥 치고 있을 테니까.”

준영은 컴퓨터 역사를 자세히 모르지만, 인터넷이 군사, 연구 정보를 교류하기 위한 용도로 개발되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미국과 영국 정부가 리즈의 연구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겼다.

“얼른 제대로 된 위성을 쏴 올려야 할 텐데…….”

“왜요? 달나라 여행을 하고 싶어서요?”

“뭐, 그러면 좋겠지만, 그보다 먼저 할 수 있는 일이 있거든. 장거리 TV 생중계 같은 게 대표적이지.”

준영의 말에 리즈는 이해했다는 듯 박수를 쳤다.

“아, 그렇게 하면 준이 뛰는 경기를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거군요!”

“거기다 월드컵도 안방에서 실시간으로 볼 수 있지.”

자신의 활약, 레전드의 플레이를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거기다 국제적으로 광고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말씀.’

풋볼 리그 TV 중계가 시작된 후로 준영이 운영 중인 광고 업체의 수익은 나날이 늘고 있었다.

만약 글로벌 규모로 송신이 되면 수익도 그만큼 커지게 될 터!

‘그러니까 힘내라고, 과학자들!’

응원만 할 게 아니라, 투자도 할 수 있으면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자신에게 익숙한 시스템을 갖춘 시대가 좀 더 일찍 올 테니까.

***

사진에 나온 것은 최초의 통신 위성인 텔스타입니다. 1962년 7월에 발사되었지요.

이후로 통신 위성 개발에 탄력이 붙어서 1964년 도쿄 올림픽부터 부분적으로 위성 중계가 가능해졌습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경기 영상도 세계 전역에 송출되었고요.

그리고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때부터 지금처럼 온전한 생중계가 가능해졌습니다.

월드컵 공인구인 텔스타의 이름도, 생중계를 가능하게 해 준 위성의 이름을 따서 붙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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