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52화 (352/400)

Round 352. 새로운 내일을 향해 전진

12월 2일 토요일.

리그 단독 1위를 순항 중인 맨유는 오늘 구디슨 파크를 찾았다.

홈팀 에버튼은 현재 5위.

시즌 초에는 2승 5패를 하면서 부진했지만, 9월 말부터 무패 행진을 계속하며 두둑한 승점을 쌓았다.

“오늘은 반드시 버스비의 악마 새끼들을 잡는다.”

“우리도 우승할 확률은 남아 있으니까…….”

현직 웨일스 국가대표인 로이 버논을 필두로 지미 펠과 알렉스 영, 바비 콜린스 등 에버튼이 자랑하는 주포들은 단단히 작심하고 경기에 나섰다.

골대 뒤에 자리를 잡은 기자들은 필드에 나온 선수들을 향해 셔터를 눌러 댔다.

“에버튼과 달리 유나이티드는 전력 누수가 있군.”

“지난 경기에서 골키퍼 해리 그렉이 허리 부상을 당했으니까.”

“빌 포크스와 레이 윌슨도 안 보여. 공격에서도 최근 활약이 좋은 데니스 로가 없고…….”

맨유는 후보급 선수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과연 하위권 팀도 아니고, 100퍼센트 전력으로 나온 에버튼을 상대로 괜찮을지?

무엇보다 기자들의 관심은 주장인 준영에게 향해 있었다.

“캡틴 리도 괜찮을지 모르겠어. 조국이 월드컵에서 떨어진 충격이 적지 않을 텐데…….”

“유고슬라비아는 현재 세계 랭킹 10위권 안에 드는 팀이야. 그런 강팀에게 졌다고 충격을 받겠어? 아시아의 축구 변방 국가 따위가?”

“그래도 플레이오프에서 아깝게 떨어졌다고 하잖아. 허탈감이 적지 않을걸.”

그 허탈감을 안고 경기를 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터.

그래서 기자들은 물론, 맨유 서포터들도 걱정했지만…….

「지미 펠의 성급한 패스. 아, 이거 오프사이드 아니었나요? 바비 콜린스가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잡습니다!」

화들짝 놀란 맨유의 골키퍼 데이비드 가스켈이 허둥지둥 뛰쳐나왔다.

바비 콜린스는 골키퍼를 가볍게 제쳐 내고 바로 슈팅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마무리를 지으려는 순간, 준영이 달려와 번개같이 공을 가로챘다.

“이런 빌어먹을!”

“그 정도 발재간으론 어림도 없어.”

달려드는 콜린스를 여유 있게 제쳐 낸 준영은 최전방의 데이비드 허드에게 곧바로 공을 보냈다.

그렇게 위기를 모면하자, 안도하던 골키퍼 가스켈이 준영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주장 덕분에 살았어요.”

“너도 잘 나와서 지연시켜 줬어. 겁내지 말고 자신감을 가져.”

골키퍼가 제 몫을 못하면 수비수들도 뒤가 불안해서 제대로 경기에 집중할 수 없다.

그래서 준영은 가스켈의 긴장을 풀어 주는 한편, 부지런히 수비를 조율하며 에버튼의 공격을 막았다.

「로이 버논이 직접 치고 들어옵니다. 셰이 브레넌이 막아서지만 제치고… 아, 왼발 슛을 하기 직전에 캡틴 리의 태클에 걸리고 맙니다.」

에버튼은 경기 주도권을 쥐고 연달아 공격 찬스를 만들어 냈다.

전반 15분에 지미 펠의 슛이 있었고, 32분에는 로이 버논이 특유의 왼발 슛으로 골문을 노렸다.

38분에는 알렉스 영의 위협적인 침투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기회는 무산.

박스 안에서 준영이 귀신같이 오가면서 슈팅을 막아 내고, 크로스와 침투 패스를 끊어 냈다.

그리고 찬스가 올 때마다 전진해 올라가서 공격에 가세했다.

“어떻게 된 거야? 펄펄 날아다니잖아.”

“허탈감은 개뿔…….”

“캬캬캬! 역시 캡틴 리! 유나이티드의 수호자!”

당혹한 에버튼 팬들과 달리, 신이 난 맨유 서포터들은 함성을 드높이며 북과 냄비를 두들겨 댔다.

전반전은 그렇게 0 대 0으로 종료.

후반전에 전열을 정비한 맨유는 차근차근 공격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준영도 기회가 되면 전진해 올라갔다.

「에버튼, 역습 찬스… 아, 노비 스타일스에게 차단됩니다. 전진하는 캡틴 리에게 전달되는 패스. 에버튼, 다시 위기입니다!」

미드필더 바비 콜린스와 지미 가브리엘이 연달아 준영에게 달려들었다.

콜린스의 태클을 뛰어넘은 준영은 손을 쓰며 공을 가로채려는 가브리엘을 뿌리친 후, 곧바로 강슛을 날렸다.

“젠장, 좀 제대로 막으라고!”

투덜대며 몸을 날리던 던롭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준영이 찬 슈팅이 데이비드 허드의 엉덩이를 맞고 굴절이 된 것.

방향을 전환하고 싶어도 이미 날린 몸을 되돌릴 순 없었다.

그리고 공이 골라인을 넘는 순간, 맨유 서포터들에게서 폭음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존이 해결해 주는구먼.”

신나게 골 세리머니를 펼치는 준영을 보며 버스비 감독과 머피 코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보다 훨씬 더 기운이 넘치는 것 같네요.”

“그럴 수밖에. 아빠가 된다고 하지 않나. 나중에 출산에 맞춰서 축하 선물을 건네주자고.”

한동안 준영의 페이스는 걱정할 필요 없을 듯.

흐뭇한 미소를 지은 둘은 계속해서 박수 치면서 독려를 이어 나갔다.

***

에버튼전이 끝난 다음 날.

준영은 리즈 곁에 바싹 붙어 그녀를 돌봤다.

주변의 불편한 것들을 정리하기도 하고, 리즈가 먹고 싶어 하는 것을 직접 챙기기도 했다.

“작은 나리, 그런 일은 저희가 하면 되는데요.”

“집에 있을 땐 내가 할게요.”

저택 고용인들은 난감해했지만, 누구도 준영을 만류하지 못했다.

이에 지켜보던 차지철이 핀잔을 보냈다.

“대한의 축구왕이 이 집에서는 머슴이구만.”

“여왕님을 수행하는 기사라고 해 줘.”

“거참, 그렇게나 좋나?”

“아, 두말하면 잔소리지.”

준영은 21세기에서 이 시대로 홀로 떨어졌다.

모든 인간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리즈는 소중한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그 애정이 꽃을 피워 결실이, 사랑스러운 새 가족이 태어나려 하고 있었다.

“아들이면 좋겠나, 딸이면 좋겠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기왕이면 리즈를 많이 닮은 공주님이면 좋겠어.”

“허, 이 친구 이거 팔불출 다 되었구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저택에 손님이 찾아왔다.

그 손님을 본 준영은 반색을 했다.

“와, 이게 누구야. 오랜만입니다, 숀 형님.”

“잘 지냈나, 존?”

과거 한솥밥을 먹은 동료 선수였던 숀 코너리.

이제는 어엿한 배우가 된 그는 벌써부터 특유의 중후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리즈와 자매들도 얘기를 듣고 내려와 그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숀.”

“다시 만나 반가워요, 아가씨. 아니지, 이젠 미세스 리라고 불러야 하나.”

숀은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준영과 리즈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축하 전보와 함께 선물을 보냈다.

“아까 클럽 하우스에 들렀다가 소식을 들었지. 두 사람, 아이가 생겼다며? 진심으로 축하해.”

“고마워요.”

응접실로 자리를 옮긴 그들은 그동안 서로에게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즐겁게 이야기했다.

“하하핫! 그때 페냐롤과의 경기에서 불이 난 게 알렉스 녀석 때문이었다고?”

“예, 잘못했으면 머리를 홀랑 다 태울 뻔했죠.”

“정말 위기일발이었군그래.”

“그렇죠. 아 참, 혹시 이번에 영국에 온 게 엘 시드 개봉 때문인가요?”

“아니, 꼭 그것 때문은 아니야. 아무튼 그 영화 찍으면서 재미있었지.”

엘 시드에서 숀 코너리가 분한 알폰소 6세는 사사건건 주인공 로드리고를 의심하고 견제하는 역할.

처음에는 찌질한 역이라 짜증이 났지만, 하다 보니 점점 괜찮아지더라고.

“이런 생각이 들더군. 내가 언제 찰턴 헤스턴 같은 대배우를 구박해 보겠는가 말이지.”

“하하핫, 그렇네요.”

“예전에 네가 말했던… 영화 출연을 동경하다, 악당 역을 맡아서 주인공을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는 무명 배우 얘기가 떠오르더라고.”

그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그러나 숀이 기억하고 있는 건 또 있었다.

“차이나타운에 갔을 때 네가 말했지. 내가 멋진 차를 타고 미녀들과 로맨스를 즐길 거라고.”

“그렇게 되신 겁니까?”

“로맨스는 아니지만, 멋진 차를 타고 미녀와 첩보물을 찍게 되었지. 그것도 주연으로!”

“오! 정말 축하해요!”

숀 코너리라는 배우를 전 세계에 알린 007 시리즈.

원래 역사대로 숀은 그 실사화 작품의 주연을 맡게 되었다.

‘분명히 실사화가 진행 중이란 얘기를 보고받았지. 축구 쪽에 신경을 쓰느라 잊고 있었구나.’

일전에 이안 플레밍은 막대한 도박 빚 때문에 준영이 소유한 업체 쪽에 2차 창작과 판권 수익 등을 넘겼다.

하지만 준영은 영화 제작에 딱히 관여하지 않았다. 관여할 만큼 시간이 널널하지 않았고.

그렇다 보니 배우 캐스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 숀 형이 주연을 맡도록 푸시해 줬을 텐데……. 아무튼 역사대로 진행되었으니 잘됐군.’

달라지지 않는 운명 때문에 안타깝고 서운했던 적도 있지만, 이번만은 다행이다 싶었다.

“아무튼 배우 생활을 잘하고 있다니 기뻐요. 앞으로도 기대할게요.”

“고마워. 나도 너와 유나이티드의 영광을 항상 기원하겠어.”

축구와 영화라는 다른 길에서 부지런히 커리어를 쌓고 있는 두 사람은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

하늘에서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수들은 부지런히 필드를 뛰어다니며 훈련에 매진했다.

“늦잖아! 상대가 슛을 쏘고 나서 막으려 하면 늦어! 그 전에 동작을 보고 간파해야지!”

“예, 다시 해 보겠습니다!”

휴일에 최정민과 함께 한양공고 학생들을 지도하러 나온 함흥철은 골키퍼 이세연을 일대일로 가르치고 있었다.

“과감하게 해! 골키퍼가 슛을 겁내면 제대로 막을 수 없어!”

“명심하겠습니다!”

한양공고 골키퍼 이세연은 중학교 때까지 핸드볼 선수였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공을 잡아채는 재주가 상당히 뛰어났다.

거기다 또래에 비해 키도 상당히 큰 편이었다.

“네가 보기에 저 녀석 어때?”

최정민이 다가와 건넨 말에 함흥철은 어깨를 으쓱했다.

“재능은 있는데, 점프력은 아직 좀 부족한 것 같아. 몸도 유연하지 못하고…….”

“뭐, 그거야 앞으로 차차 나아지겠지. 애들은 아직 성장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잖아.”

그리 말하는 최정민은 아쉬움이 깃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잘 아는 함흥철이 물음을 건넸다.

“정말 은퇴할 거냐?”

“그래. 대체 몇 번을 물어보는 거야.”

최정민은 단지 국가대표 은퇴가 아닌 현역에서 은퇴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몸도 예전 같지 않고, 자리를 내주는 편이 자라나는 후배들을 위해서 좋다고 보았으니까.

“그러지 말고 1년, 아니 2년만 더 뛰어 보자. 너 영입하고 싶어 하는 실업팀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비록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지만, 국내 축구 붐은 가라앉지 않았다.

유고와의 플레이오프가 끝나고 준영은 국가대표팀뿐만 아니라, 축구계에 전반적인 관심과 투자가 필요함을 주장했다.

‘선수들이 더 많은 경기를 뛰고 서로 경쟁하면서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 발전할 수 있어요.’

예전에 이미 준영에게 이러한 조언을 들었던 축구협회는 초창기 영국 축구를 참조하여 아마추어 학원 축구와 실업 축구 리그를 창설해 보고자 했다.

이미 지역별로 자체적으로 시작된 잡다한 리그나 대회들도 있어 이를 정리하는 것이 우선.

그래도 일단은 실험적인 측면에서 제일모직과 대한중석, 승리제화 등 8개 실업팀들이 1962년 봄에서 가을까지 리그를 진행해 보기로 했다.

실험적이라고 해도 우승컵이, 그리고 업체의 자존심이 걸리다 보니 전력 강화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특무대나 헌병감실 등 군 팀이나 대학 선수들 중에 유명 선수들이 올겨울에 실업팀으로 많이 입단하고 있다고.

함흥철 역시 여러 팀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었다.

“됐다. 괜히 밥값도 못하게 되면 어쩌려고.”

“고집도 참…….”

최정민은 이참에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유망주들을 육성하리라 마음먹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열망, 그것을 누군가가, 보다 많은 이들이 이어받아 이루기를 바랐으니까.

‘목표는 까마득히 멀고, 가는 길은 힘들어. 하지만 계속 전진해야지. 그리해야…….’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영국으로 돌아가던 준영이 했던 말을 떠올린 최정민은 새로운 내일을 향해 전진해 나갔다.

***

이세연 선수는 1960~70년대 대표팀 수문장이었습니다.

굉장히 터프하고 과감해서 ‘폭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었지요.

경기 중에 슛을 막다가 손가락이 빠진 적도 있는데, 다시 맞춰 넣고 경기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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