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51. 기약
‘이 망할 놈이…….’
딱 좋은 찬스였건만!
준영은 슈팅하다 말고 그대로 두르코비치의 태클을 뛰어넘었다.
아니, 뛰어넘으려 했지만 높이 치켜든 두르코비치의 발에 걸려 중심을 잃었다.
공중에서 황급히 중심을 잡으며 착지하려는 순간, 발밑에 물렁이는 것이 밟혔다.
“끄아악!”
“아, 이런…….”
준영에게 옆구리를 밟힌 두르코비치가 심하게 몸부림을 쳤다.
바로 휘슬이 울리며 경기는 중단되었다.
“고의가 아닙니다. 엉켜서 그랬던 거라고요.”
자칫 잘못하면 퇴장당할 판.
준영은 막쉰페이 주심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당연하지만 유고 선수들은 퇴장시키라며 벌 떼같이 들고일어났다.
“참 나, 퇴장당할 놈은 두르코인지 들창코인지 하는 자식이잖아.”
“맞아요. 저놈이 먼저 위험한 태클을 날렸는데.”
조윤옥은 소매를 걷어붙인 차태성을 보고 긴장했다.
만약 준영이 퇴장당한다면 바로 심판의 멱살을 잡아 흔들 기세였다.
‘성질이 불같은 태성 선배라면 분명히 그러겠지.’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막쉰페이 주심은 준영에게 구두 경고만 하고 끝냈다.
당연히 불만은 유고 선수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쳇, 원숭이 심판이 원숭이 편을 드는군.”
“됐어. 그만해. 그보다 두르코비치 녀석, 심하게 다친 게 아니면 좋겠는데…….”
동료들을 만류한 밀란 갈리치는 필드 밖으로 실려 나간 두르코비치를 바라보았다.
녀석을 살펴보고 있던 팀 닥터가 문제없다는 사인을 보냈다.
“다행이군. 부상 이탈이면 진짜 곤란했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체력이 계속 떨어지는 데다, 상대는 맹공을 펼치고 있었다.
수적으로 불리해지면 막판에 경기가 뒤집어질지 모른다.
“자, 이제 경기를 재개하지.”
유고의 킥으로 다시 경기가 진행되었다.
세쿨라리치가 갈리치에게 패스를 보냈고, 이것은 문전으로 뛰어들던 예르코비치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갈리치가 올렸던 크로스는 준영의 헤딩에 막혀 공중으로 떠올랐고, 함흥철이 이를 잽싸게 잡아서 공격수들에게 던졌다.
“한 골! 한 골만 침착하게 넣어 보자!”
“힘내자! 저놈들 발이 풀렸어!”
한국 공격수들은 쉴 새 없이 유고 진영을 들쑤시며 침투 패스와 슈팅을 만들어 냈다.
스위퍼 바소비치를 비롯한 유고 수비수들은 이런 공세를 막느라 여념이 없었다.
체력과 함께 집중력도 떨어지다 보니, 그들은 차분하게 동료 공격수들에게 패스를 보내지 못한 채 걷어 내기에 급급했다.
“조심해. 파울하지 마!”
“그쪽에 공간 비었잖아! 빨리 내려가서 막으라고!”
후반전 시간이 줄어드는 가운데 일진일퇴가 계속되었다.
역전 골을 넣어야 월드컵 진출의 불씨를 살릴 수 있는 한국.
그와 반대로 실점을 허용하지 않고 이 경기에서 월드컵 진출을 확정하고 싶어 하는 유고슬라비아.
시간이 갈수록 양 팀 모두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
“대- 한민국!”
“달려! 앞으로 나가!”
목이 쉬어라 함성을 내지르는 관중들의 꼭 말아 쥔 주먹에 땀이 흥건히 맺혔다.
마이크를 잡고 중계하는 캐스터도 초조한 마음에 자리에 앉아 있지 못했다.
「이준영이 다시 한번 치고 갑니다. 이준영! 이준영, 슛! 아아, 유고 골키퍼가 또 막았습니다.」
후반전 유고 대표팀에서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골키퍼 밀루틴 쇼스키치였다.
대다수 유고 선수들이 체력이 바닥나 집중력이 저하된 상황에서도 그는 끈질긴 선방을 계속 보여 주고 있었다.
준영의 입장에선 정말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야신이 빙의하기라도 한 건가?’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야신은 아직 쌩쌩하게 살아 있고, 여전히 현역이니까.
이렇게 한국이 몰아붙이는 가운데, 스코어보드의 시계가 멎었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네.”
“주장이 최전방으로 올라갔다! 주장 머리에 맞혀서 크로스를 올려!”
이제는 정말 공격뿐.
마지막 남은 체력을 짜내 뛰고 있는 한국 선수들은 상대 박스 안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준영을 향해 크로스를 올렸다.
하지만 다급하게 올린 크로스는 부정확했다.
여기에 유고의 저항 역시 만만찮았다. 그들은 공격수들까지 모조리 내려와서 밀집 수비를 펼쳤다.
‘이제 조금만 버티면…….’
“라다코비치, 섣불리 달려들지 마!”
밀란의 외침은 뇌까지 지쳐 버린 라다코비치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성급하게 태클을 날린 그를 따돌린 조윤옥은 준영을 향해 크로스를 보냈다.
‘마지막 찬스!’
아귀처럼 달려드는 유고 수비수들을 뿌리치고 뛰어오른 준영.
그가 이마로 살짝 돌려놓은 헤딩슛이 쇼스키치가 잡을 수 없는 구석을 향해 떨어졌다.
터엉-!
“아…….”
골대 상단을 맞고 넘어가는 헤딩슛.
다들 멍하니 골대 밖으로 넘어간 공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심판이 종료 휘슬을 불었다.
“끝났구나…….”
1 대 1 무승부.
필드에 있는 모든 선수들이 주저앉거나 벌렁 드러누웠다.
승자인 유고 선수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수비하느라 체력이 완전히 방전된 그들은 본선 진출을 기뻐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을 끝까지 몰아붙였던 한국 선수들.
준영은 허탈감에 말을 잃었고, 몇몇 선수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젠장, 왜 나는 아까 그 기회에서……!”
“한 골만… 단 한 골만 더 넣었으면 되는데…….”
너무나 아쉽고 원통했다.
앞으로 또 4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보다, 4년 후를 기약할 수 없는 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컸다.
“정민 선배, 죄송해요.”
“아니야. 너희는 충분히 잘 싸웠어.”
누구보다 아쉬움이 클 최정민은 필드로 들어와 후배들을 다독였다.
관중들도 끝까지 선전한 대표팀에게 박수를 보냈고, 김홍일 대통령도 선전을 펼친 선수들에게 다가와 격려해 주었다.
“제군들이 자랑스럽네. 모든 국민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제군들의 투지를 기억할 거야.”
이렇게 위로와 격려를 받았지만, 준영이나 한국 선수들의 표정은 쉬 펴지지 못했다.
‘미래를 바꾸고 싶었는데…….’
유고슬라비아라는 강팀을 꺾기 위해 여러모로 준비하고 노력했다.
하지만 원래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에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오늘의 선전이 마냥 헛되진 않았으면 좋겠군.’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키기를!
준영은 4년 후를 기약하며 필드에서 내려왔다.
***
2030년 6월 15일.
브리튼-에이레 월드컵 A조 한국과 세르비아의 경기가 올드 트래퍼드에서 열리고 있었다.
“대- 한민국! 대- 한민국!”
우렁찬 함성이 올드 트래퍼드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수천 명의 교민들은 물론 맨유 팬들도 응원에 합세했다.
한국과 오랜 인연이 있는 데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유니폼 색깔이나 붉은 악마라는 별명은 맨유와 똑같았기 때문.
이렇다 보니 사실상 한국의 홈이나 마찬가지.
당연히 한국 선수들은 힘이 났고, 경기 분위기도 한국으로 기울었다.
「백숭호, 이강익에게 패스. 이강익, 한 명 제치고 돌파해 갑니다.」
「머뭇거릴 필요 없어요. 때려야죠! 과감하게 해야 돼요!」
한국 중계진들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이강익이 중거리 슛을 날렸다.
구석으로 날아드는 슈팅을 골키퍼가 가까스로 쳐 냈다.
그러자 때마침 달려들던 공격수 조규선이 리바운드 볼을 골대로 밀어 넣었다.
「골! 골! 조규선, 선제골! 대한민국이 1 대 0으로 앞서갑니다!」
「와, 결국은 조규선이 해내네요!」
흐뭇하게 경기를 바라보고 있던 손웅민은 옆자리에 앉은 축구계 원로에게 눈을 돌렸다.
갈색 폭격기 차범곤.
이준영 이후로 유럽 축구계에 다시 한번 코리아 쇼크를 안겨 주었던 레전드는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후배들이 참 잘하는군. 나 때는 말이야. 유고가 참 힘든 상대였는데…….”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던 차범곤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릴 때 라디오로 월드컵 플레이오프 중계를 들은 적이 있었어.”
“TV로 본 게 아니고요?”
“아이고, TV가 뭐야. 그땐 시골에 라디오도 잘 없어서 마을 이장 집에 다들 모여서 듣곤 했다고.”
그런 시절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때부터 축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어서인지.
그냥 스피커에서 들리는 말소리만으로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머릿속에 훤하게 그려졌다.
“후반전에 그렇게 우리나라가 몰아붙였는데… 마지막에 이준영 선수의 헤딩슛이 골대를 맞았다는 거야. 정말이지 어찌나 안타깝던지…….”
그때 힘겹게 한국을 누르고 칠레 월드컵 본선에 나간 유고슬라비아는 4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 소식을 들은 한국 축구인들은 무척 아쉬워했다.
만약 한국이 본선에 나갔다면 좋은 성적을 냈을지 모르니까.
“그 안타까움이 축구 선수가 되어 보자는 마음에 불을 붙였지. 반드시 국가대표가 되어 월드컵에 우리나라를 진출시키겠다고 다짐했어.”
그렇게 축구를 시작한 가난한 시골 소년은 훗날 국가대표로 선발되었고, 유럽 무대도 평정했다.
어릴 때 꿈꾸던 월드컵 무대도 누볐다.
“이준영 옹도 만나셨죠?”
“어휴, 처음 만났을 때 대단했지. 너무 감격해서 말도 잘 안 나왔는데……. 이상하게 그 어른은 나보다 더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더라고.”
“하하하, 대성하실 걸 예견한 거 아닙니까? 선지력이 좋은 걸로 유명하잖아요.”
한국 축구에 큰 족적을 남긴 두 레전드 선수들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경기장에 또 한 번 크게 환호성이 일어났다.
코너킥 상황에서 수비수 이재훈이 호쾌한 헤딩슛으로 세르비아 골망을 흔들어 버린 것!
“오, 이재훈, 추가 고올-!”
“킹재훈! 킹재훈!”
스코어 2 대 0.
위풍당당하게 승리를 굳혀 가는 후배들을 향해 손웅민과 차범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
준영은 커다란 아쉬움을 뒤로하고 맨체스터로 돌아왔다.
그가 도착하자,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벌 떼같이 몰려들었다.
“캡틴 리, 조국이 아쉽게 탈락했다고 들었는데 심정이 어떠신지……?”
“혹시 잉글랜드 대표팀에 복귀하실 의사는 없습니까?”
“이대로 월드컵 출전을 포기하실 건가요?”
쏟아지는 질문에 대강 대꾸를 해 준 준영은 자신을 마중 나온 앤지와 카린에게 다가갔다.
“너희만 온 거야? 리즈는?”
“언니도 나오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께서 만류했어.”
“의사 선생님도 조심하는 게 좋다고 그랬고.”
둘의 이야기를 들은 준영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요즘 리즈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외출도 자제해야 할 정도로 나빠졌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리즈의 어머니, 장모님도 폐렴으로 돌아가셨다고 했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란 게 이런 걸까.
준영은 잔뜩 불안한 기색으로 물음을 건넸다.
“많이 안 좋은 거야?”
“그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형부 때문이니까 언니를 제대로 보살펴 줘.”
“맞어, 맞어!”
앤지나 카린의 기색을 봐서는 심각한 정도는 아닌 모양.
하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여길 수는 없었다.
경기다 뭐다 해서 리즈에게 신경을 못 쓰고 있었던 게 사실이니까.
더구나 신혼인데 이랬으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커다란 꽃다발을 마련한 준영은 리즈에게 어떤 말로 사과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미처 정리되기도 전에 도착하고 말았다.
“준, 잘 다녀왔어요?”
“리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화를 내기는커녕 반기는 리즈의 모습에 더욱 죄책감이 들었던 준영은 곧장 사죄의 꽃다발을 건넸다.
“왜 그래요? 잘못했다니?”
“그야 내가 그동안 소홀히 했으니까. 당신이 어떤 상태인 줄도 모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준영의 모습에 갸우뚱하던 리즈는 이내 생긋 웃음을 지었다.
“그거야 내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잖아요.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미룬 내 탓이에요.”
“놀라게 하다니! 병이나 부상은 절대 숨겨서 될 일이 아니라고!”
“어머, 깜짝이야. 소리 지르지 말아요. 아기가 놀라잖아요.”
“뭐? 아기라니, 설마……?”
어리둥절하다 크게 반색을 하는 준영.
그의 손을 잡은 리즈는 알려 주지 않았던 비밀을 실토했다.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어요. 당신과 나의 아이가.”
***
차붐 옹은 어릴 때 맨발로 공을 차야 했을 정도로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탁월한 운동 재능이 있어서 축구 외에도 여러 가지 종목에 능했는데, 훗날 국가대표 감독이 된 최정민 선수가 눈여겨보고 발탁, 누구보다 엄격하게 훈련시키며 지도했다고 합니다.
아마 최정민 선수는 차범근이 자신이 이루지 못한 열망을 이뤄 줄 선수가 될 것이라고 봤던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