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50화 (350/400)

Round 350. 플레이오프 2차전

1961년 11월 26일 효창 운동장.

25,000여 명의 관중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소리 높여 응원을 시작했다.

“대한 건아, 이겨라!”

“어허, 이 사람, 응원하는 법을 모르는구만. 잘 보라고. ‘대- 한민국!’ 이렇게 크게 외치고 다섯 번 박수를 치는 거야.”

“그런가? 누가 이런 응원 구호를 생각해 낸 거지?”

“몰라. 작년부터인가 다들 그렇게 하고 있다고.”

대표팀이 영국에서 전지훈련을 할 때, 준영이 퍼트린 이 21세기의 응원 구호는 교민과 유학생들을 통해 한국에도 전파되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 근원은 몰랐지만, 새로운 응원에 금방 적응했고 호응도 좋았다.

간단명료하고, 무척 강렬하기도 했으므로.

몇몇 사람들은 국가대표팀 선수들처럼 붉은 셔츠를 걸치고 경기장을 찾기도 했다.

그런데 귀빈석의 높으신 분들 중에는 이를 불편하게 보는 이들도 있었다.

“각하, 저런 건 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빨갱이들 선전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저치들이 정말 빨갱이라면 태극기를 흔들겠소? 응원한다고 입은 거니 탓할 거 없소.”

김홍일 대통령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다.

주변에서는 우리는 백의민족이니 대표팀 유니폼을 흰색으로 바꿔야 한다는 둥 쓸데없는 소리가 들렸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 이제 나오는군.”

심판을 필두로 한국과 유고슬라비아 양 팀 선수들이 필드로 입장했다.

양국 국가가 연주된 후, 양 팀 주장이 페어플레이를 다짐하며 악수를 나누었다.

“대- 한민국!”

“대- 한민국! 대- 한민국!”

관중들이 열광적으로 응원을 펼치는 사이, 기자들은 걱정스럽고 초조한 기색으로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최정민이 결국 못 나왔군요.”

“알려진 것보다 부상이 심했던 모양이야.”

“이준영이가 있지만, 공격 쪽에 무게감이 없으면 힘들 텐데…….”

과연 이 경기는 어떻게 흘러갈까.

다들 긴장하며 필드를 바라보고 있을 때,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려 퍼졌다.

***

“좋아, 시작해 보자고.”

호흡을 가다듬은 준영은 초반에 기습적으로 공세에 가담했다.

측면으로 내달리는 조윤옥에게 패스를 찔러 준 후, 곧바로 상대 페널티 아크 쪽으로 들어갔다.

공이 들어오면 뛰어들며 헤딩을 하거나 슈팅을 날릴 셈이었지만, 유고 수비수 벨리보그 바소비치가 조윤옥의 컷백을 간파하고 끊어 냈다.

이어지는 유고의 역습.

공은 순식간에 라다코비치를 거쳐 세쿨라리치에게 전달되었다.

이어 세쿨라리치가 한국 진영으로 달려가는 밀란 갈리치에게 패스하려던 찰나, 황급히 수비로 전환한 준영의 태클에 걸려 넘어졌다.

파울이었지만, 관중석에서 바로 환호와 함께 박수가 쏟아졌다.

“잘했다! 역시 이준영이야!”

“다음번엔 아예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려!”

“최정민이 당한 걸 갚아 주라고!”

한국말을 알아듣진 못했지만, 유고 선수들은 한국 관중들이 자신들을 곱게 보지 않고 있음을 눈치챘다.

원정의 피로와 시차, 여기에 관중들의 적대적인 분위기에 주눅이 들면서 유고 선수들은 쉬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 틈을 타서 한국 선수들은 여러 차례 기회를 잡았다.

「김찬기가 김덕중에게 패스. 김덕중, 재빨리 문전에 있는 유판순에게, 유판순, 슛! 아, 옆 그물! 아깝습니다.」

「자, 차태성이 치고 들어갑니다. 어깨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그대로 골문으로… 아, 파울인가요? 손으로 밀쳤다는 모양인데요.」

「이준영이 끊어 냅니다. 이준영이 직접 치고 올라갑니다. 먼 거리 그대로 중거리 슛! 골키퍼가 깜짝 놀라 쳐 냈습니다.」

한국 선수들이 연달아 유고를 몰아붙이자, 라디오 중계를 하는 캐스터도 신이 나서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경기장 한쪽에서 지켜보는 최정민도 연방 박수 치며 후배들을 응원했다.

‘좋아, 잘하고 있어. 여기서 마무리만 하면……!’

선제골만 터트리면 경기를 주도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골은 터지지 않았다.

결정적인 기회들이 유고 수비수들에게 저지당하거나, 골키퍼 쇼스키치의 선방에 막혔기 때문.

이렇게 위기를 모면한 유고도 슬슬 반격을 시작했다.

1차전에 나오지 않은 186센티미터의 장신 공격수 드라잔 예르코비치 쪽으로 길게 롱 패스를 찔러 주며 역습을 노린 것.

초반에는 그 단순한 공격이 통했다.

수비수 김홍복이나 박승옥의 체격으로 맞서기 버거웠기 때문.

하지만 예르코비치는 금방 무력화되었다.

「바소비치가 한국 진영을 향해 길게 패스. 하지만 이준영이 헤딩으로 끊어 냅니다.」

다른 한국 수비수들에게 위세를 부리던 예르코비치도 190대인 준영이 마크를 시작하자, 헤딩이건 몸싸움이건 속절없이 밀렸다.

주장인 밀란 갈리치는 이 광경을 보고 혀를 찼다.

‘거참, 존 Y. 리의 대항마로 출전시켰는데 상대도 안 되는군.’

예르코비치가 약간 작다고 해도 어느 정도 대등하게는 맞서 줄 거라 생각했건만.

그래도 영 쓸모가 없진 않았다.

예르코비치를 견제하느라 이준영이 섣불리 공격에 전진하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좋아, 이 틈에 측면으로 파고들면……!’

갈리치는 세쿨라리치와 원투 패스를 주고받으며 한국 진영으로 들어갔다.

그가 페널티 박스로 접근하자 차준만과 박승옥이 바싹 마크를 붙었다.

쉽게 제칠 수 없다고 판단한 갈리치는 뒤쪽에 있던 라다코비치 쪽으로 패스했다.

한국 수비수들의 시선이 잠시 라다코비치에게 쏠린 사이, 그는 곧장 한국 문전 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좋아, 리턴 패스!’

그러나 리턴 패스는 들어오지 않았다.

라다코비치가 성급하게 중거리 슛을 갈겼기 때문.

‘저런 멍청한… 오오!’

삐익-!

오늘 경기의 주심을 맡은 홍콩 심판 막쉰페이가 한국 측의 파울을 선언했다.

라다코비치의 중거리 슛이 박승옥의 팔에 맞았기 때문.

“일부러 막은 게 아니라고!”

“고의가 아닌데 파울입니까?”

한국 측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도 페널티킥은 아니라, 프리킥이었기에 한국 선수들은 큰 반발 없이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좀 더 오른쪽으로! 어깨 바싹 붙여! 틈을 주지 말라고!”

함흥철이 수비벽을 조정하고, 준영은 쇄도할 준비를 하는 유고 공격수들을 예의 주시했다.

키커로 나선 건 밀란 갈리치.

공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던 그는 그대로 달려들며 강슛을 날렸다.

“어? 아…….”

활처럼 휘어져 수비벽을 넘어간 갈리치의 슛이 골키퍼의 손에 닿을 수 없는 골대 상단 구석에 꽂혔다.

흠잡을 데 없는 깔끔한 슛.

경기장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진 가운데, 유고 선수들의 환호성만 울려 퍼졌다.

“어깨 펴! 한 골 정도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어!”

준영이 박수 치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잠시 실점의 충격으로 동요하던 한국 선수들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유고 골문을 두들겼다.

선제골로 유고가 들뜬 탓인지, 아니면 한국 측의 추격 의지가 강해서인지.

뜻밖에도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수비수 니콜리치의 미스를 틈타 유판순이 공을 가로챘고, 곧바로 때린 슈팅이 골키퍼 손을 맞고 골대를 넘어갔다.

“좋아, 코너킥이다.”

“이준영이 한 골 넣어 줄 거야.”

“그래, 이준영이라면…….”

기대감에 부푼 관중들은 고개를 쭉 내밀고 코너킥 공격을 지켜보았다.

“존 Y. 리를 놓치지 마라!”

“예르코비치, 너도 수비에 가세해!”

유고 선수들이 바쁘게 대응하는 가운데, 코너킥이 올라왔다.

준영은 살짝 뒤로 물러서 있다가 낙하지점으로 달려가며 뛰어올랐다.

그러자 스위퍼 바소비치가 슬쩍 옷을 잡아당기고, 예르코비치가 위협적으로 머리를 들이댔으며, 골키퍼 쇼스키치는 위협적으로 손을 뻗었다.

‘유고 개놈들아, 매너 좀……!’

쇼스키치의 팔에 맞기 직전, 준영은 이마로 공을 맞혔다.

지면에 한 번 바운드가 된 공은 골대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동점 골!”

“들어갔다아아-!”

관중들이 쾌재를 부르고, 대통령 김홍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휘둘렀다.

“그렇지! 이 군이 해낼 줄 알았지!”

“가, 각하, 체통을…….”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는 관중들 앞에서 준영은 웃통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그 안에 최정민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이 나타났다.

“거참, 어째 좀 둔해 보인다 싶더니…….”

득점에 기뻐하던 최정민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살짝 눈시울을 붉히던 그는 다시 박수 치며 선수들을 응원했다.

“잘한다! 대한민국 파이팅!”

“대- 한민국!”

승리의 염원을 담은 외침이 하늘 높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

동점 골을 터트린 후, 한국은 무서운 기세로 몰아붙였다.

당황한 유고 선수들은 1차전처럼 거친 마크로 한국의 공세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대응은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꽃에 기름을 끼얹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쒸벌, 덤벼, 빨갱이 새끼들아!”

“때리고 차는 건 너희들 전매특허인 줄 아냐?”

“특무대 전투 축구가 어떤 건지 보여 주지!”

안방인 데다, 1차전 결과에 대한 아쉬움과 원한이 강했던 한국 선수들은 과감하게 부딪치며 공을 빼앗고, 공격 기회를 만들어 냈다.

「이준영이 상대 패스를 컷, 조윤옥에게 패스해 줍니다. 조윤옥, 골키퍼와 일대일! 골! 골! 역전 골! …아, 하지만 오프사이드… 아쉽습니다! 정말 아쉽습니다!」

환호성을 지르던 중계 캐스터와 관중들은 부심이 들어 올린 깃발을 보고 아쉬움을 삭였다.

그 공격을 끝으로 전반전은 종료.

하프타임 때 라커룸에서 이유형 감독의 지시와 격려를 받은 한국 선수들은 다시 기운차게 필드로 나왔다.

“앞으로 45분, 우리 다 같이 세계를 놀라게 해 주자!”

“대한민국 파이팅!”

이렇게 계속 투지를 이어 가는 한국과 달리, 유고 선수들의 표정에는 초조함이 역력했다.

선제골을 넣었을 때만 해도 자신들의 의도대로 경기를 운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이르게 동점 골을 내주며 상대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버텨라. 재경기는 절대 하면 안 돼.”

“아시아 변방 팀에게 월드컵 티켓을 빼앗기면 수치다!”

유고의 로브리치, 미하일로비치 감독은 연방 선수들을 독려했지만, 후반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예르코비치는 여전히 이준영에게 묶였고, 측면의 스르잔 제비나츠도 차태성을 쉬 뿌리치지 못했다.

밀란 갈리치가 역습을 이끌고 있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플레이에도 한계가 있었다.

“망할! 웅크리고 있지 말고 올라와! 공격이 최선의 수비란 걸 모르나!”

갈리치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유고 미드필더들은 쉽게 전진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은 떨어지는데 홈팀인 한국 선수들은 팔팔하게 뛰어다녔기 때문.

기동력이 뒤처지니 빈틈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틈새로 조윤옥과 정순천, 유판순과 김덕중이 비집고 들어가 찬스를 만들었다.

「유판순, 돌아 들어가는 김덕중에게 로빙 패스! 김덕중, 달려들며 그대로 슛-! 아, 이게 왜 뜨나요!」

‘젠장, 역시 마무리가 문제로군.’

후반전 2선에서 공격을 지원하던 준영은 좋은 찬스에서 연이어 빗나가는 슛을 보고 아쉬움을 토했다.

21세기에도 지적받고 있는 한국 축구의 고질적인 결정력 부족.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가장 결정력이 뛰어난 최정민이 빠졌고, 영국 무대에서 실력을 갈고닦은 조윤옥도 유고 같은 강팀을 상대론 아직 미숙함을 보였다.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하나.’

준영이 최전방 공격을 자제한 건 수비 때문이었다.

밀란 갈리치도 요주의 대상이지만, 언제든지 한 방이 가능한 예르코비치한테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만약에 또 실점을 허용하면 다시 만회하고 역전하는 게 힘들어지니까.

‘그래도 기회가 왔을 땐 해야지.’

후반 61분, 김찬기에게서 패스를 받은 준영이 연달아 유고 선수들을 제치며 골문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페널티 아크 앞쪽에서 슈팅 자세를 잡았을 때…….

‘죽여 주마, 존 Y. 리!’

1차전에서 최정민을 아웃시킨 당사자.

두르코비치의 높고 거친 태클이 준영의 정강이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

현재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대표팀 원정 유니폼은 올 화이트나 흰 바탕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론 저기 사진에 있는 1994년 라피도 유니폼을 제일 좋아합니다. 색동 무늬나 저고리 동정같이 한국적인 이미지가 잘 나타나 있으니까요.

저 다음에 좋았던 게 2012년 런던 올림픽 원정 유니폼이었지요.

백의민족이니 흰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는 쓸데없는 소리가 나온 게 2002년 월드컵 무렵이었는데, 화이트 엔젤스라고 이상한 사람들이 주도했습니다. ‘붉은 악마’라는 대표팀 별명이 마땅치 않다나 뭐라나.

하얀 유니폼 자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실제 덩치를 더 커 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고, 승률도 괜찮았으니까요.

2002 월드컵에서도 원정 유니폼이 더 예쁘고, 입고 나온 경기에서도 다 이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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