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49. 간청
“여, 주장 왔구만.”
“오랜만입니다. 영국에서 오느라 많이 피곤하죠?”
준영이 효창 운동장에 도착하자, 선수들이 반갑게 그를 맞았다.
그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준영은 최정민을 찾았다.
한쪽에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최정민은 준영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서 와, 아우님. 무탈하게 다시 보게 되어 기쁘군.”
“예, 반갑습니다. 형님은 좀 어떠세요?”
“나야 뭐 평소랑 똑같지.”
최정민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웃는 인상과 달리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준영의 시선을 피하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
“김 코치님 말씀이 태국전에서 부상당했다면서요?”
“아, 그거……. 하필이면 다친 발목을 삐끗해서 다들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 뭐, 그래도 좋아졌으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최정민은 보란 듯이 준영의 앞에서 드리블하듯 좌우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언뜻 봐서는 아무 이상도 없어 보이는 몸놀림.
하지만 준영의 눈엔 불균형해 보였다. 최정민 본인도 모르게 다치지 않은 발에 힘을 더 싣고 있었다.
“2차전 반드시 이겨야 하잖아. 이겨야 재경기를 하고, 거기서 승리해야 칠레로 가지.”
“…….”
무언가 눈치챈 듯한 준영의 기색에 최정민은 이마가 축축해졌다.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불필요한 말까지 쏟아 내고 있었다.
“이보다 더한 부상을 당하고도 경기에 뛴 적이 있었어. 그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유고 놈들에게 얼마든지 본때를 보여 줄 수 있어.”
최정민은 애가 탔다.
자신이 준영에게 주장 자리를 넘긴 이유는 그만큼 기대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춘 선수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대표팀 지원과 관련해 여러모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자신을 배제하겠다고 하면?
만약 그런다면…….
“2차전까지 이제 6일 정도 남았죠?”
“응, 그렇지.”
“저나 다른 해외파 선수들도 왔으니 마무리 훈련을 하면서 발을 맞추면 될 겁니다. 형님도 끝까지 같이 가실 수 있죠?”
“물론이지. 나 최정민이야. 한국, 아니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라고.”
진지한 최정민의 말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 보겠다는 기색이었지만, 눈빛에는 안쓰러움과 함께 의구심이 깃들어 있었다.
최정민도 이런 준영의 속내를 눈치챘다.
‘두고 보라고. 내 축구 인생을 다 걸고 있다고. 이런 시시한 부상에 주저앉을 것 같아?’
그는 발목에서 스멀스멀 치밀어 오르는 통증을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앞으로 6일.
반드시 부상을 떨쳐 내고 필드에 오르리라.
그리고 존경스러운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후배들을 이끌고 월드컵 본선에 뛸 것이다.
결의와 각오를 다지는 최정민의 눈빛이 뜨겁게 빛났다.
***
이준영, 차태성, 조윤옥이 합류한 대한민국 대표팀은 남은 시간 마무리 훈련에 열중했다.
주로 매진한 건 세트 플레이 훈련.
상대 문전에서 파울이나 코너킥을 얻어 내면 좋은 찬스를 잡을 수 있었다.
“내가 직접 때려도 되지만, 유고 애들도 바보는 아니니 대응책을 생각하곤 있겠죠. 그리고 무엇보다 변수가 많아야 상대가 수비하기 힘들어져요.”
“상대가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거구만. 백화점에서 옷을 고르는 아가씨들처럼.”
“그런 거죠.”
여러 가지 상황에 대응한 훈련도 진행했다.
상대에게 세트 플레이를 허용했을 때라든가, 1 대 0으로 뒤지고 있을 때의 역습 전개라든가, 선제골을 얻고 상대의 맹공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등등.
저녁에는 지난 월드컵과 로마 올림픽에서 유고슬라비아의 경기 영상을 보며 상대 선수들의 플레이와 움직임이 어떤지 살펴보았다.
이러한 대비와 분석은 2차전 전날까지 계속되었다.
“정말이지 잘도 이런 영상들을 구했군.”
“관심을 가지고 돈과 인맥을 쓰면 필요한 걸 얻기 마련이니까요.”
준영의 대답에 이유형 감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건 코칭스태프에서 준비해야 하는데……. 정말 자네 신세를 많이 지는군. 고마우면서도 참으로 미안하군그래.”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원해서, 그리고 제게 득이 되기에 하는 일이니까요.”
이미 평생을 편히 살고도 남을 재산이 있는 준영이 원하는 건 레전드에 걸맞은 명성.
축구 종가의 월드컵 우승을 견인한 이방인 선수가 이번에는 변방의 축구 약소국인 조국을 이끌고 월드컵에 진출한다.
상당한 주목을 받을 위업이 아니겠는가.
“자네에게 득이 되고, 조국에도 득이 되면 그야말로 일석이조, 더할 나위 없는 결과가 되겠지. 그래서 묻는 말인데…….”
이유형 감독은 잠시 망설이다 마음을 굳혔다.
준영과 따로 대화를 나누는 지금이 물어볼 찬스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주장이 보기엔 어떻던가? 최 군의 상태 말이야.”
“글쎄요, 본인이 애쓰고 있습니다만… 감독님도 이미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내일 출전은 무리라는 건가.”
약 두 달 전, 그러니까 베오그라드에서 1차전을 하기 전의 기량에는 미치지 못했다.
어떻게든 훈련을 소화하고 있지만, 순발력이나 밸런스가 많이 저하된 상태였다.
출전해도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 주긴 힘들다.
아니, 경기 중에 부상이 악화되어 실려 나가면 1차전의 상황이 되풀이될 수도 있다.
“내 잘못이 커. 내가 좀 더 냉정하게 결단을 내렸어야 했는데…….”
최정민이 간청하든 말든, 출전시키지 말고 회복에 전념하라고 다그치는 게 맞았다.
대표팀 최고참 선수이니 스스로 조심할 거라 판단한 느슨함이 이런 화를 부르고 말았다.
“아무튼 이렇게 됐으니 냉정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겠지. 알았어. 이만 됐으니 주장도 돌아가서 쉬도록 해.”
“예, 물러나겠습니다.”
준영은 감독의 방에서 나왔다.
바로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밖으로 나왔던 그는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억지로라도 영국에 데려가서 치료받게 하는 게 맞았는데…….’
이미 엎질러진 물.
마냥 후회하는 것보다 내일 어떤 식으로 경기를 할지 더 생각해 보는 게 나았다.
이에 방으로 돌아가던 준영은 최정민이 나온 것을 보았다.
‘어딜 가는 거지?’
방향을 보면 감독님의 방.
뭔가 심상찮은 최정민의 표정에 준영은 들키지 않게 조심스레 뒤따라갔다.
***
“최 군 아닌가. 무슨 일이야?”
노크 소리에 문을 연 이유형 감독은 최정민을 안으로 들였다.
사실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대충 눈치를 채고 있었다.
최정민 역시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제가 왜 찾아왔는지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가? 그럼 내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 알고 있겠군.”
이 감독의 발언에 최정민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결국 뛰지 못하게 되는 건가.’
지난 며칠 동안 발버둥 쳤지만, 원래 기량이 올라오지 않았다.
다친 발목은 나아질 기미가 없이 계속 욱신거리고 있고.
이렇다 보니 내일 출전 불발은 확정적.
대표팀 후배들도 자신의 부재 상황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쑥덕이고 있었다.
“제가 정상이 아니란 건 압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걸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언제든 필드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뛰었습니다.”
“…….”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제 축구 인생 마지막 기회입니다. 여기까지 와서 이대로 물러날 수 없습니다!”
이 감독은 무릎 꿇고 간청하는 최정민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8년 전 김용식의 추천으로 그를 처음 대표팀에 발탁했을 때부터 항상 눈여겨보고 믿음을 품었던 대표팀의 에이스.
지금까지 함께했던 세월을 생각하면 그를 외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현명하게 생각하게, 최 군. 스스로 정상이 아니란 걸 안다며? 자신의 미련 때문에 팀을 망칠 셈인가?”
“감독님!”
“자네에겐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 나라를 위해 대표팀에 헌신해 왔으니까. 마지막에도 그 마음을 잊지 않길 바라네.”
포기하는 것, 미련을 접는 것도 헌신.
이유형은 그렇게 말했지만, 최정민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악물었던 그는 품속에서 권총을 끄집어냈다.
‘형님, 무슨 짓을……!’
창문을 통해 몰래 훔쳐보던 준영은 깜짝 놀랐다.
대체 총을 어디서 구한 걸까? 특무대에서 빼내 온 걸까?
아무튼 더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황급히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형님, 그만두세요!”
“상관 말고 물러나 있어!”
준영에게 윽박지른 최정민.
그는 총구를 자신의 머리에 겨눈 채,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감독을 향해 말했다.
“출전시켜 주십쇼. 뛸 수 없다면… 더 이상 쓸모없다면 여기서 죽어 버리겠습니다!”
피를 토하는 외침에 이유형 감독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준영은 초조하게 이 대치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감독이 입을 열었다.
“누가 출전할지는 내가 결정한다. 자네가 그런 식으로 조른다고 내 마음이 바뀌진 않아.”
어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이 감독은 방에서 나가 버렸다.
단호한 결정을 내렸지만, 착잡함을 감추지 못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준영은 최정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끄으윽… 으흐흐흑! 흐흑!”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채 권총을 떨군 최정민.
준영은 오열하는 그를 말없이 안아 주며 달랬다.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까지 와서 왜… 흐흐흑!”
무엇이 잘못된 걸까.
조바심과 안일함이 불러온 결과라 하더라도, 이건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빌어먹을!’
답답하고 분한 마음에 준영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스스로 택한 길이라고 하지만, 상상 이상으로 서글프고 힘들었다.
***
다음 날 아침.
대표팀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결전을 앞두고 다들 잠을 설친 데다 간밤에 심상찮은 일도 있었기 때문.
“그니까 어젯밤에 시끄러웠던 게 정민 선배가 감독님을 찾아가서 그런 거라고?”
“내가 봤어. 가방에서 권총 꺼내 챙겨서 가던걸.”
“어이구, 맙소사…….”
아침 식사 시간에 선수들이 걱정스럽게 쑥덕이고 있을 때, 이유형 감독과 최정민이 마주쳤다.
먼저 말을 건네며 허리를 굽힌 건 최정민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이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밤새 수척해진 최정민을 딱하게 바라보던 이 감독은 손을 내저었다.
“뭘 사과하고 그래. 별일도 아닌데.”
“감독님…….”
“난 잊기로 했어. 그러니 자네도 잊어버리라고.”
“…예, 정말 감사합니다.”
준영은 눈시울을 붉히는 최정민을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라도 감정이 풀려 다행이다 싶었다.
다행으로 여기는 건 또 다른 고참 선수인 함흥철도 마찬가지.
그는 후배 선수들에게 말했다.
“다들 들었지? 별일 없었으니까 밖에 가서 나불대지 마라. 특히 기자들 상대론 더 조심해.”
“얘기 안 해요.”
“쿨쿨 자느라 아무것도 못 봤지 말입니다.”
그렇게 갈등이 될 만한 소란이 무마되며 팀 분위기는 한결 풀렸다.
그러나 오늘 경기에 대한 긴장감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이에 최정민은 효창 경기장으로 떠나기 직전, 선수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다들 잘 들어. 예상하고들 있었겠지만, 난 오늘 출전 못한다.”
역시나 하는 한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아무리 부상이래도 최고참으로 경험이 많은 최정민이 함께 뛰어 준다면 그만큼 부담을 덜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진 마라. 내가 빠지고도 너희들 선전했잖아. 무엇보다 준영 아우가 같이 뛰고 있기도 하고.”
최정민의 말에 선수들의 시선이 준영에게 쏠렸다.
그래, 아직 희망은 있다.
아시아의 황금발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든든한 월드 클래스 플레이어가 함께해 주고 있으니까.
“어때, 아우님? 내 몫만큼 뛰어 줄 거지?”
“물론이죠. 저 말고도 다들 형님 몫만큼 뛸 겁니다.”
준영의 말에 다들 호응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선배님 몫만큼 뛸 겁니다!”
“절대 안 질 겁니다!”
“월드컵 티켓은 저희가 따 올게요! 그러니 형님도 같이 가시는 겁니다!”
반드시 이기자.
다 같이 월드컵에 가자!
그렇게 단숨에 전의를 끌어 올린 선수들은 결전의 무대로 향했다.
***
최정민 선수가 권총을 들고 출전을 요구했다는 건 풍문입니다. 정확하게 밝혀진 건 없습니다.
최정민 선수가 아니라 다른 선수가 그랬다는 말도 있고, 그냥 누가 지어낸 얘기란 소리도 있더군요.
아무튼 이런 소설에나 어울릴 이야기라고 할까요.
솔직히 진짜라고 해도 이해는 갑니다. 그 절실함을 생각하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