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48화 (348/400)

Round 348. 불길한 먹구름

버마, 21세기에는 미얀마라 불리는 나라.

독립 이후 소수 민족과 공산당 반군의 저항으로 버마 연방 정부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에 그들은 스포츠 경기를 통해 국민들의 단합을 고취하려 했다.

마침 동아시아의 한국에서 좋은 제안도 들어왔다.

그렇게 양곤의 아웅산 스타디움에서 한국과 버마의 축구 국가대표 평가전이 치러지게 되었다.

“အနိုင်ရ!”

“မြန်မာက အနိုင်ရတ!”

경기장에 모인 4만의 버마 관중들은 열심히 자국 선수들을 응원했다.

하지만 버마 선수들은 홈팬들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했다.

경기 시작부터 한국에게 주도권을 내주며 끌려간 것.

한국은 전반 5분 만에 정순천이 선제골을 넣으며 기선을 제압했다.

이후 부상을 털고 출전한 최정민에게 연달아 골을 허용했다.

최정민의 두 번째 골은 정말 멋있었다.

측면에서 차태성이 찬 크로스를 시저스 킥으로 때려 넣었으니까.

버마 관중들도 그 골을 보고 감탄해서 탄성을 터트릴 정도였다.

그렇게 스코어는 3 대 0.

이 정도 점수면 웃음을 지을 만하지만, 이유형 감독은 오히려 초조한 기색이었다.

그러다 전반전이 끝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봐, 최 군, 좀 어때?”

“어떻긴요. 기운이 펄펄 넘칩니다!”

라커룸으로 돌아온 최정민은 이 감독의 물음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일부러 보란 듯이 양팔의 알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유형 감독은 그의 알통보다 발목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정말 이상 없는 거지?”

“그럼요. 멀쩡하다니까요!”

최정민이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이유형 감독은 쉬 얼굴을 펴지 못했다.

팀 닥터는 두고 봐야 한다고 했고, 준영이 영국에서 보낸 의사도 최정민의 발목을 살펴보고는 좀 더 안정을 취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제 몸은 제가 제일 잘 압니다. 뛰는 데도 문제없고, 무리한 동작을 해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아요.’

확실히 쉬거나 훈련할 때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영국인 의사는 진통제 때문에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뿐,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리하면 탈이 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이유형은 의사의 말을 따르고 싶었지만, 최정민은 경기에 출전시켜 줄 것을 애원했다.

2차전까지 이제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경기 감각도 유지하고 선수들과 합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것.

결국 이유형 감독도 버마전 출전을 허락하고 말았다.

“후반전엔 이현이랑 교체하도록 해.”

“아이고, 왜 이러십니까. 저 아직 뛸 수 있다니까요!”

“무리하면 안 되니까 그러는 거지. 평가전보다 훨씬 중요한 경기가 있잖아.”

이유형 감독의 권유에 최정민도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태국전에 출전시켜 주십시오.”

“좋아. 무리하지 않고, 계속 상태가 좋다면 기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이렇게 교체된 최정민은 후반전엔 필드 밖에서 후배들의 경기를 지켜보았다.

물론 구경하고 응원하는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 상대 문전에 들어가야 헤딩을 따내지!”

“공이 오길 기다리지 말고 먼저 빈 공간으로 움직여! 준영 아우가 가르쳐 준 거 까먹었냐!”

“어휴, 거기선 슛을 때려야지……!”

못 미더운 후배 공격수의 플레이를 보며 한숨을 쉴 때, 갑자기 발목에서 찌릿하고 후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쳇, 뭐야, 갑자기.’

훈련할 땐 이렇지 않았다. 경기에 출전해서 상태가 나빠진 걸까?

감독님이나 의사, 그리고 준영 아우가 권유한 대로 하는 게 맞았던 걸까.

‘괜찮아. 거슬릴 정도는 되지만 심한 건 아니니까.’

조심하면 괜찮아지겠지.

최정민은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작은 불씨처럼 피어오르는 통증을 애써 무시했다.

***

준영은 계속 바쁜 일정을 보냈다.

10월 28일 홈에서 볼턴을 3 대 0으로 완파하고, 다음 날 유러피언 컵 경기를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날아갔다.

“지난번에 왔을 때도 드는 생각이지만, 오스트리아는 경치 한번 끝내준다니까.”

“자허… 뭐라는 초콜릿케이크도 맛있었죠.”

“자허토르테 말이구나. 이기면 내가 한턱 쏘지.”

31일 맞붙게 된 유러피언 컵 1라운드 상대는 오스트리아 챔피언인 FK 아우스트리아 빈.

꽤 끈끈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는 팀이라 맨유는 꽤나 고전했다.

하지만 준영이 패스를 뿌려 주며 차근차근 경기를 풀어 나갔고, 전반 30분에 데니스 로가 선제골을 만들어 냈다.

후반전에는 완벽한 패스 플레이로 짐 박스터가 추가 골을 기록하며 여유롭게 앞서 나갔다.

그러다 후반 70분, 코너킥 혼전 상황에서 빈의 공격수 스타크가 만회 골을 넣었다.

준영은 재빨리 수비 라인을 정비하며 상대의 추격을 봉쇄하면서 원정 승리를 따냈다.

그리고 승리만큼이나 달콤한 자허토르테를 맛봤다.

“이거 포장되나? 리즈랑 가족들에게 선물로 사 가고 싶은데.”

“나도 주문할래요. 분명히 다이애나가 좋아할 테니까.”

“와, 이거 정말 둘이 먹다 둘 다 죽어도 모를 맛이야.”

“피곤하니 몸에 더 잘 스며드는 것 같아.”

초콜릿은 포도당을 공급해 주기에 피로 회복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준영이 자허토르테를 쏜 것도 다음 경기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맛있게들 먹어라. 11월 4일엔 안필드에서 혈투를 벌여야 할 테니까.”

15라운드 상대는 리버풀.

현재 2위인 그들은 맨유와의 승점 차를 줄이기 위해 잔뜩 벼르고 있었다.

“그놈들, 지난달에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서 애송이 공격수를 영입했다면서요?”

“피터 톰슨 말이구나. 이적료로 37,000파운드를 지불했다고 하더군.”

“역시 주장! 미리 파악하고 있었군요. 진짜 실력 있는 녀석인가 보죠?”

“저번에 섕클리 감독님이 찾아왔을 때 그러더라고. 그 녀석은 톰 피니와 맞먹는 급의 선수가 될 거라고 말이야.”

작년에 현역에서 은퇴한 톰 피니는 잉글랜드 축구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런 그와 맞먹을 수준이라면 상당한 가능성을 가진 유망주라는 뜻이다.

‘실제 실력이 있는 선수인 건 분명하지.’

60~70년대 리버풀의 오른쪽 측면 공격을 주도한 장신 윙어.

1970년에는 잉글랜드 대표로 선발되어 멕시코 월드컵에도 나갔다.

‘아직은 애송이라고 하지만, 대비는 철저히 해야겠지.’

펠레에 로저 헌트, 이안 세인트 존, 이안 캘러헌, 여기에 피터 톰슨까지.

나날이 붉은 제국 리버풀은 강성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꺾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맨유가 승점 차를 유지하고 여유롭게 1위를 단독 순항해야 국가대표 경기에도 홀가분하게 다녀올 수 있으니까.

***

빈에서 개선한 맨유 선수들은 바로 리버풀 원정 준비에 서둘렀다.

그런데 4일 경기 당일,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어? 펠레 녀석이 출전 명단에 없잖아.”

“그러게요. 무슨 일이 있나?”

대체 무슨 이유일까.

준영은 출전 대기실에서 만난 리버풀 선수들에게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이드송은 무릎을 다쳤어.”

“엥? 부상? 대체 언제 부상당한 거야?”

“지난 웨스트햄 원정에서 바비 무어 자식의 태클에 걸려 넘어지면서 탈이 났지.”

사실 그 전부터 좀 안 좋긴 했다고.

줄곧 강행군을 한 데다, 상대편 수비수들에게 거친 마크를 당해 왔던 게 웨스트햄 경기에서 결국 터진 것이었다.

“이드송은 뛸 수 있다고 감독님을 졸랐지만 거절당했어. 뭐, 내가 봐도 90분 동안 뛸 수 있는 상태는 아니더라고.”

“거참 유감이군. 빨리 나아서 다음번에 붙자고 전해 줘.”

“그러지.”

그렇게 맨유는 펠레 없는 리버풀과 경기를 하게 되었다.

펠레를 대신해서 나온 선수는 지난달에 영입된 피터 톰슨.

빠른 발에 좋은 피지컬, 여기에 양발을 잘 쓰는 선수였다.

‘제법 센스도 있어. 섕클리 감독님이 호평을 해 줄 만하군.’

듣던 대로 뛰어난 플레이어.

감탄은 나오지만, 그래도 위험하다고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풋볼 리그 정상의 공격수로 손꼽히는 펠레에 비하면 수월한 상대였던 것.

방심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막아 낼 수 있었다.

「론 예이츠가 전진하며 패스, 이안 캘러헌이 받아서 재빠르게 톰슨에게 찔러 줍니다. 톰슨, 캡틴 리를 제치고 슈팅! …을 하지 못하고 빼앗깁니다. 아쉽습니다.」

피터 톰슨은 우측면과 중앙에서 활발히 움직이며 찬스를 만들어 냈다.

직접 슈팅을 시도하는 것 외에도 동료에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많은 기회들은 준영에게 죄다 커트되고 말았다.

「캡틴 리, 그야말로 철벽입니다. 이번 시즌에는 다시 한번 자신의 진가를 보여 주고 있네요.」

준영의 철벽 수비에 힘입어 맨유는 날카로운 역습을 펼쳤다.

그리고 후반 38분, 주제 토히스가 헤딩으로 떨궈 준 공을 받은 데니스 로가 이 경기의 결승 골을 터트렸다.

“좋았어, 이겼다!”

“이제 토트넘만 확실히 따돌리면 돼!”

안필드 원정에서 1 대 0의 승리를 따낸 맨유는 8일 유러피언 컵 1라운드 2차전을 치렀다.

버스비 감독은 준영과 몇몇 주전 선수들을 이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았다.

“지나친 혹사는 막는 게 좋지 않겠나.”

“하긴 펠레처럼 중요한 경기에 빠져서는 곤란하죠.”

“그렇지. 이참에 후보 선수들에게도 기회를 주는 것도 좋고.”

주전들이 꽤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맨유는 FK 아우스트리아 빈을 5 대 1로 대파하고 2라운드로 진출했다.

이후 11일 열린 레스터 시티전과 18일 입스위치 타운 경기도 연승.

덕분에 준영은 홀가분하게 월드컵 플레이오프 2차전을 하러 갈 수 있었다.

‘아니, 완전히 홀가분한 건 아닌가.’

맨유에 문제는 없지만, 요즘 리즈가 좀 걱정이었다.

결혼 후에도 석사 학위를 따려고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데, 그 때문인지 요즘 많이 피곤해하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두통이 잦고, 열도 있지. 식욕까지 떨어진 것 같던데…….’

본인은 괜찮다고 하지만, 준영은 그러다 중병에 걸리는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신혼인데 매번 훈련이다 원정이다 하면서 자주 같이 있어 주지 못했지. 진짜 반성해야겠어.’

자신이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게 지탱해 준 소중한 연인.

준영은 이번 월드컵 플레이오프가 끝나면 리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리라 마음먹었다.

***

준영이 리그와 유러피언 컵을 뛰고 있을 즈음, 한국 대표팀은 국내에서 2차전을 대비한 마무리 훈련을 하고 있었다.

“버마전이 끝난 후에 방콕에 가서 태국, 홍콩과 경기를 했는데 결과는 4 대 0, 2 대 0으로 나쁘지 않았지. 문제는…….”

“뭐가 문젭니까?”

김포 공항에 준영을 마중 나온 김규환 국가대표팀 코치는 쉬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무거운 표정에서 준영은 일전에 느꼈던 불길함이 현실이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민 형님 상태가 더 나빠졌군요. 그렇죠?”

“양곤에서 경기를 뛰었을 때만 해도 괜찮았어. 그런데 태국전에서 상대 진영으로 돌파하다가 삐끗했는데…….”

더 들어 볼 것도 없었다.

준영은 바로 김규환을 따라 대표팀이 훈련하고 있는 효창 운동장으로 향했다.

답답한 마음에 올려다본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

피터 톰슨은 프레스턴 노스 엔드와 리버풀, 볼턴에서 뛰면서 560경기 63골을 넣은 윙어입니다.

얼마나 실력이 뛰어났던지 당시 이탈리아 유벤투스에서도 영입 제의를 했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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