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46화 (346/400)

Round 346. 멀고도 험한

“아악-!”

발목을 걷어차인 최정민이 필드에 나동그라졌다.

심판이 곧바로 휘슬을 불었고, 놀란 준영과 한국 선수들이 황급히 최정민에게 달려왔다.

“형님, 괜찮으세요?”

“바보야, 저게 괜찮아 보여?”

“야 인마! 사람을 걷어차 놓고 뭘 잘했다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어!”

차태성을 비롯해 몇몇 선수들은 원흉인 두르코비치나 유고 선수들과 드잡이 직전까지 갔다.

콘스탄티노스 심판이 황급히 양쪽을 갈라놓고, 주장인 준영과 밀란 갈리치도 흥분한 선수들을 다독였다.

그사이 필드로 들어온 팀 닥터가 응급 치료를 하며 최정민의 상태를 살폈다.

“큭, 어떻습니까?”

“좋지 않아. 이대로는…….”

더 이상 경기에 뛰는 것은 불가능.

그런 표정을 짓는 팀 닥터에 발끈한 최정민은 그의 어깨를 잡고 일어났다.

“잘못 본 거 아닙니까? 부러진 것 같진 않은… 으으윽!”

“그러니까 좋지 않대도!”

일어서서 걸음을 내디디려던 최정민이 다시 고꾸라졌다.

황급히 그를 부축한 팀 닥터는 준영을 보며 말했다.

“보다시피 이런 상태니까 남은 시간은 정민이 없이 자네들끼리 버텨야 할 거야.”

“휴, 알겠습니다.”

“어렵겠지만, 어떻게든 버텨 주게.”

그렇게 말한 팀 닥터가 최정민을 데리고 나가려 했지만, 정민은 완강히 거부했다.

“난 안 나갑니다! 뛸 수 있다고요!”

“고집부리지 마! 발목이 그 지경인데 어떻게 뛰어?”

“기어서라도 뛰겠습니다! 월드컵으로 가는 중요한 시합이라고요!”

“안 된다니까! 중요한 시합에서 후배들 짐 덩이가 될 셈이야?”

팀 닥터는 간신히 최정민을 어르고 달래서 필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제기랄… 어째서……!”

원통한 표정으로 퇴장하는 선배의 모습에 한국 선수들의 속에서 불길이 확 피어올랐다.

“캬악, 퉤-! 축구 아주 엿같이 하네, 추잡한 새끼들!”

차태성이 대놓고 침을 뱉자, 콘스탄티노스 심판이 바로 구두 경고를 날렸다.

“Hey! Don’t do that!”

“왜 나한테 GR이야! 코쟁이라고 코쟁이 편드냐? 눈깔 삔 거 아니면 저 새끼나 퇴장시키라고!”

성격이 불같은 차태성은 거침없이 분노를 쏟아 냈다.

자칫하다간 한 명 더 퇴장당할 판.

준영은 황급히 차태성을 만류하고, 표정이 굳어진 심판을 다독였다.

“저놈 방금 나한테 욕한 거 맞지?”

“그냥 좀 흥분한 겁니다. 부당한 일은 못 참는 성격이라…….”

“내 판정이 부당했단 말인가?”

“상황이 이러니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요. 알아서 판정하실 테지만, 좀 더 신경 써 주십시오. 편파 판정이니 인종 차별이니 하는 말이 언론에 들먹여져서 좋을 게 없잖습니까.”

준영의 말은 마치 ‘똑바로 안 하면 언론에다 찌른다.’라고 하는 듯했다.

다른 한국 선수가 말한 거라면 콘스탄티노스 심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말을 건네는 상대는 월드 클래스 플레이어.

그만한 명성이 있다 보니 말의 무게가 다르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알아서 할 테니, 더 이상 간섭하지 말도록.”

“네,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간신히 상황을 무마시킨 준영은 서둘러 팀을 재정비했다.

후반전까지 합치면 앞으로 남은 시간은 약 60분.

칠레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

최정민의 부상 이탈로 10명이 뛰게 된 대한민국 대표팀.

수적으로 유리해진 유고슬라비아는 수비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그래서 스위퍼인 벨리보그 바소비치나 파루딘 주수피가 적극적으로 전진하며 공격에 무게를 더했다.

“쒸벌, 비겁한 빨갱이 새끼들! 한 명 많다고 얼씨구나 하고 덤벼드는 꼬락서니를 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야, 차태성, 그만 좀 투덜대고 수비해!”

준영은 불안한 눈길로 차태성을 바라보았다.

최정민이 퇴장당한 후로 차태성의 마크가 상당히 거칠어졌기 때문.

공중전에서 거침없이 머리를 들이미는 바람에 스르잔 제비나츠의 코피가 터지기도 했다.

다행히 심판은 경합 중에 벌어진 일로 봐 줬는지 그냥 넘어갔다.

‘어휴, 조마조마하구만.’

다행히 전반은 0 대 0으로 끝났다.

하프타임 때 이유형 감독은 공격보다 수비에 더 치중하도록 선수들에게 지시했다.

“물론 틈이 생기면 한 방 먹여 줘야지. 주장이 그런 쪽으로 능하니까 기회를 잘 살려 줘.”

“알겠습니다. 역습은 맡겨 주십쇼.”

“음, 믿고 있다.”

이유형은 준영의 어깨를 도닥였다.

최정민이라는 에이스가 빠졌음에도 아직 결과에 기대감을 품을 수 있었던 건, 이준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맹위를 떨친 이 한국의 거인이라면 기적을 만들어 줄 것 같았으니까.

“상대도 상당히 초조해할 것이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한 발 더 내디디며 버텨라.”

“예, 알겠습니다!”

“좋아, 다 같이 파이팅 스피리트(Fighting Spirit)를 불태워 보자. 대한민국 파이팅!”

“파이팅!”

우렁차게 외친 선수들이 다시 필드로 나갔다.

투지를 끌어 올린 한국 선수들만큼이나 유고 선수들도 만만찮게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월드컵 플레이오프라는 점을 떠나서 아시아에서 온 약체를 상대로 홈에서 졸전을 벌였다간 비난을 면하기 힘드니까.

삐이익-!

후반전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자, 유고 선수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한국 진영을 들쑤시며 득점 기회를 노렸다.

준영은 부지런히 좌우상하를 오가며 상대의 패스를 끊고, 슈팅을 저지했다.

“다들 힘내! 한 걸음만 더!”

“그래, 조금만 더 힘내자고!”

한국 선수들도 준영의 분투에 호응하며 유고의 공격을 막아 냈다.

하지만 밀란 갈리치를 앞세운 유고의 공격은 쉬 무뎌지지 않았다.

후반 12분 세쿨라리치의 중거리 슛을 함흥철이 가까스로 쳐 낸 데 이어, 3분 후에는 밀란 갈리치의 슛이 골대를 살짝 스쳐 지나갔다.

‘빌어먹을, 여기저기서 막 찌르고 들어오는군.’

지난 스웨덴 월드컵 5위, 로마 올림픽 금메달이란 성적은 운으로 이룬 게 아니었다.

분명히 유고는 거칠긴 해도 실력이 있고, 피지컬도 강했다.

“밀란 쪽으로 패스가 간다!”

“내가 막을게!”

김홍복은 밀란이 공을 잡기 직전에 황급히 걷어 냈다.

이 공을 유판순이 잡았지만, 뒤에서 접근한 즈베즈단 제비나츠가 공을 가로채 갔다.

“이런, 조심해야지!”

접근하는 즈베즈단을 막기 위해 가까이 있던 차태성이 황급히 달려갔다.

하지만 그가 붙기 전에 즈베즈단이 중거리 슛을 때렸다.

지면에 낮게 쭉 뻗어 간 슈팅은 포스트바 하단을 맞히고 골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 이런…….”

“그렇게 막았는데 결국 실점이라니.”

기뻐하며 얼싸안는 유고 선수들을 보며 한국 선수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준영은 박수 치며 독려를 계속했다.

“잊어버려! 흔들리지 말고 플레이를 계속해. 그럼 기회는 온다!”

하지만 실점의 충격은 적지 않았다.

한국 선수들이 마음을 다잡기도 전에 유고가 또 한 번 날카로운 공격을 펼쳤다.

밀란 갈리치가 밀어 준 패스를 받으며 한국 문전에 파고든 세쿨라리치가 차준만과 박승옥을 차례로 제치고 슛.

준영이 황급히 몸을 던지며 슈팅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함흥철이 뛰며 그 공을 잡아챈 순간, 밀란 갈리치가 뛰어들어 머리를 들이밀었다.

“앗!”

충돌하면서 공을 놓쳐 버린 함흥철.

황급히 손을 뻗어 공을 쳐 냈지만, 이미 골라인을 넘은 뒤였다.

‘빌어먹을, 골키퍼 차징이잖아!’

그러나 21세기의 규정은 이 시대에는 통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스 심판은 유고의 득점을 인정했고, 스코어는 2 대 0으로 벌어졌다.

“훗, 와르르 무너지는군.”

“적어도 3 대 0으로 이기겠는걸.”

“아무렴, 아시아 팀 따위에 질 리가 있겠나.”

언제 초조했냐는 듯, 유고 기자들이 승리를 낙관하고 있을 때였다.

킥오프 후, 한국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준영이 있었다.

***

‘유고 놈들, 스코어가 벌어졌다고 느슨해졌군.’

더구나 자신들이 한 명 더 많다고 방심하고 있는 듯했다.

이 상황에서 기습적으로 한 방 먹여 줄 수 있다면?

‘놈들이 경계하기 전에 기습 펀치를 먹여야 해.’

공을 갖고 전진하던 준영은 왼쪽 측면으로 송곳같이 달려가는 조윤옥에게로 패스를 넘겨주었다.

공을 받은 윤옥은 라다코비치를 제치고 유고 페널티 박스에 도달했다.

두르코비치가 태클로 저지하려 했지만, 페인트로 제쳐 버리곤 중앙으로 공을 보냈다.

‘존 Y. 리다!’

‘어서 막아!’

쇄도하는 준영에게로 수비수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준영은 공을 흘려 버렸고, 배후에서 달려오던 정순천이 그것을 받아 슈팅을 날렸다.

좌아악-!

쇼스키치 골키퍼가 반응할 틈도 없이 골망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 광경을 본 관중과 기자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 뭐야? 방금 실점한 거야?”

“이런 멍청한! 정신을 어디 팔고 있었던 거야!”

낙승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추격 골.

느슨해 있던 유고 선수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쳇,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건가.”

“그래 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거다.”

“한 골 더 때려 박아 주지!”

실점의 수치를 씻으리라!

유고 선수들이 다시 한국 진영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연거푸 골을 허용하고 전의가 가라앉았던 한국 대표팀은 정순천의 추격 골에 금방 다시 타올랐다.

“저놈들도 무적은 아니야!”

“정신 차리고 막아! 더는 골을 내주면 안 된다!”

기량도 뒤지고, 10명이 뛰느라 체력 소모도 많았지만, 다시 전의가 불타오른 한국 선수들은 끈덕지게 유고의 공세를 막아 냈다.

몸을 던져 슈팅을 막아 내고, 경련이 올라오는 상황에서도 이를 악물고 상대를 쫓아갔다.

거친 태클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팔꿈치에 머리를 맞아도 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분투한 결과,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주장, 앞으로 나가!”

껑충 뛰어 크로스를 잡아챈 함흥철이 준영을 향해 공을 던졌다.

가슴으로 받아서 방향을 돌려세운 준영은 곧장 유고 진영으로 달려갔다.

세쿨라리치가 높은 태클을 날렸지만, 껑충 뛰어 피해 내고는 그대로 유고 골대를 향해 슛을 날렸다.

“중앙선 밖인데 슛을……?”

“앗! 쇼스키치가 전진해 있어!”

준영이 기습적으로 날린 초장거리 슛은 유고 골대로 뚝 떨어졌다.

허둥지둥 뒷걸음질을 치던 쇼스키치는 발이 꼬여 나동그라졌다.

그의 눈에 골대로 떨어지는 공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안 돼, 제발! 하느님!’

공산화가 된 후로 찾지 않던 신을 애타게 불렀던 쇼스키치.

다행히 신은 무정하지 않았는지 준영의 슛은 크로스바 너머로 떨어졌다.

“휴, 간 떨어질 뻔했네.”

“똑바로 하라고! 존 Y. 리를 느슨하게 두지 마!”

유고 대표팀의 로브리치, 미하일로비치 두 감독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바로 선수들에게 호통을 쳤다.

이후 준영이 어디에 있거나 세쿨라리치와 라다코비치가 가까이 따라다녔다.

‘종료까지 앞으로 5분…….’

스코어보드의 시계를 힐끔 쳐다봤던 준영은 부지런히 필드를 살폈다.

초장거리 슛이 아쉽게 불발한 뒤로 유고가 계속 볼을 점유하며 공격하고 있지만, 한국 수비도 호락호락 당하진 않았다.

‘아직 한두 번의 찬스가 더 있다. 그걸 살릴 수 있다면…….’

월드컵까지는 멀고도 험하다.

원정에서 무승부도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한 번만 확실히 살려 보자!’

그 전에 우선은 수비.

황급히 박스로 내려간 준영은 즈베즈단 제비나츠가 올린 크로스를 헤딩으로 걷어 냈다.

“공 잡아! 바로 역습을 나가야 해!”

준영의 외침에 차태성이 스프링처럼 튀어 나가 공을 잡아 냈다.

그리고 앞쪽에서 이미 내달리고 있는 유판순에게 패스를 보냈다.

파루딘 주수피가 막으려 했지만, 유판순은 이미 반대편에 있는 조윤옥에게 공을 보낸 뒤였다.

“달려라, 윤옥아!”

“할 수 있어! 수비도 별로 없어!”

제2회 아시안컵 득점왕.

아시아의 황금발 최정민의 뒤를 이을 공격수로 낙점된 조윤옥이 모두의 기대를 안고 유고 골대를 향해 달려갔다.

***

실제로 저 당시 1차전 때 최정민 선수가 전반 이른 시간에 부상으로 실려 나가는 바람에 우리나라는 10명이 버텨야 했습니다.

이미 몇 번 언급했지만, 당시에는 교체 규정이 없어서 말입니다.

결국 전반 42분에 즈베즈단 제비나츠에게 선제골을 맞고 세쿨라리치와 밀란 갈리치 등에게 얻어맞으며 다섯 골이나 내줬죠.

경기 종료쯤에 정순천 선수가 만회 골을 넣어 영패를 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