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45. 베오그라드 원정
맨체스터에서 출발한 지 약 5시간 후.
대한민국 대표팀이 탄 비행기가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대표팀 선수들이 공항 입국장을 통과하자, 카메라 플래시가 번득였다.
“현지 취재원들인가?”
“생각보다 많이 모였네.”
“우리보다 준영 아우를 보러 온 거겠구만.”
최정민이나 다른 대표팀 선수들의 생각과 달리, 유고슬라비아는 준영만 주목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저기 존 Y. 리 옆에 있는 남자가 Choi라는 자야.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라고 하더군.”
“존 Y. 리만큼은 아니더라도 확실히 좋은 체격을 갖고 있구만.”
“지난 올림픽에서도 꽤 좋은 플레이를 보여 줬다던가?”
유고슬라비아의 몇몇 언론에서는 한국을 제법 경계하고 있었다.
실제 역사와 다르게 로마 올림픽에 출전해서 이탈리아, 브라질, 영국이 속한 죽음의 조에서 1승 1무 1패라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뒀으니까.
분명히 세계 축구의 변방이자 약체.
하지만 우습게 보다간 영국 올림픽 팀처럼 망신을 당할지 모른다.
“거기다 존 Y. 리라는 괴물까지 있으니 말이지.”
“안 그래도 그 때문에 로브리치 감독과 미하일로비치 감독이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대응할지 논의했다고 하던데.”
유고슬라비아에서 이준영을 처음 알게 된 건 1957-58 시즌.
당시 8강 1차전을 치르기 위해 맨체스터에 원정을 왔던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선수들은 정체불명의 동양인 선수에게 호되게 당했다.
그때 당한 선수들 중 드라고슬라브 세쿨라리치와 블라디미르 두르코비치는 현재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주전으로 뛰고 있었다.
“3년 전에 비행기 사고로 파멸된 팀을 수습해서 저승사자 군단을 때려잡은 선수야. 절대 경계를 게을리해선 안 돼.”
“우리보다 선수들이 명심하고 있어야지.”
영어를 할 줄 아는 몇몇 기자들은 준영이나 다른 한국 선수들에게 질문을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준영만 대강 응답해 줄 뿐, 다른 한국 선수들은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영어가 서툰 탓도 있지만, 공산 국가의 국민들과 그리 말을 섞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나? 하긴 냉전 시대니까.’
서구와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지만, 유고슬라비아도 결국 공산 국가.
6.25 전쟁을 겪은 한국 선수들이 좋은 감정을 가질 리 만무했다.
더구나 월드컵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는 적이 아닌가.
‘적개심이야 이해하지만, 너무 긴장하진 않았으면 좋겠군.’
21세기에도 월드컵 예선 때문에 북한이나 분쟁 지역 국가에 원정 가서 경기가 풀리지 않은 일이 있었다.
준영은 부디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
도착 첫날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며 여독을 푼 한국 대표팀은 이틀에 걸쳐 현지 적응과 최종 훈련을 진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전 일인 10월 8일이 밝았다.
“Југославија! Југославија!”
“Идемо на Светско првенство!”
결전지인 JNA 스타디움에 모인 약 2만의 관중들이 함성을 드높이는 가운데, 필드로 양국의 선수들이 들어왔다.
푸른 유니폼을 걸친 쪽이 홈팀인 유고슬라비아, 그와 반대로 한국 대표팀은 붉은 유니폼을 입었다.
<유고슬라비아>
GK:밀루틴 쇼스키치
DF:블라디미르 두르코비치, 벨리보그 바소비치, 샤르코 니콜리치, 파루딘 주수피
MF:페타르 라다코비치, 드라고슬라브 세쿨라리치, 즈베즈단 제비나츠
FW:밀란 갈리치(주장), 아심 페르하토비치, 스르잔 제비나츠
<대한민국>
GK:함흥철
DF:차태성, 김홍복, 박승옥, 차준만
MF:이준영(주장), 김찬기
FW:조윤옥, 정순천, 최정민, 유판순
삐익-!
그리스 출신의 주심 콘스탄티노스 이오아니디스가 휘슬을 불면서 경기가 시작되었다.
후방에서 롱 패스가 날아들자, 유고 공격수들과 미드필더들은 맹렬하게 한국 진영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그리고 거칠게 몸싸움을 걸면서 한국의 수비를 몰아붙였다.
‘실력이 걸출한 건 존 Y. 리 한 명뿐이지.’
‘체스에서도 왕을 잡기 전에 폰(병사)부터 잡아야 하니까…….’
힘으로 몰아붙여 기선을 제압하고 차근차근 요리해 나간다.
이것이 유고 측의 작전이었지만, 예상과 달리 한국 선수들은 쉽사리 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유고의 거친 공세에 당황하지 않고 협력해서 공을 빼앗고, 빠르고 침착하게 패스를 주고받으며 역습을 시도했다.
“한국 선수들은 몸이 상당히 가벼워 보이는군.”
“거기다 몸싸움에서도 쉽게 지지 않는군.”
공동으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을 이끄는 로브리치, 미하일로비치 두 감독은 예상보다 끈덕진 한국의 저항에 난색을 보였다.
한국 대표팀은 이준영을 필두로 쉬지 않고 대화를 주고받으며 빠르고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태성아, 제비나츠라는 놈 놓치지 마!”
“성급하게 파울하지 말고!”
“윤옥아, 내려가서 찬기 형 좀 도와줘!”
“조심해! 뒤로 돌아 들어간다!”
적진이라 초반에는 다소 긴장했던 한국 선수들은 점차 차분하게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거친 몸싸움은 영국에서 전지훈련을 하면서 곧잘 경험해 보았다.
더구나 준영이 일러 준 대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부지런히 연마해 근육을 키워 놓은 덕분에 대등하진 못하더라도 쉽사리 밀리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물론 꼭 그렇지 않은 부류도 있었다.
평소에 곰과 씨름을 하며 노는 차태성이 그랬다.
“비켜, 빨갱이 새끼야!”
차태성은 자신을 밀치는 즈베즈단 제비나츠를 되레 어깨로 밀어 버리고는 유고의 오른쪽 측면을 시원하게 달려 나갔다.
그러곤 유고 문전을 향해 크로스.
중앙으로 달려드는 최정민을 노린 날카로운 크로스는 골키퍼 밀루틴 쇼스키치가 껑충 뛰어오르며 잡아챘다.
“침착하게 해! 먼저 슈팅 찬스를 만들고 그다음에 골을 성공시키는 거다!”
선수들을 독려한 유고의 주장 밀란 갈리치는 세쿨라리치에게 패스가 오자 직접 찬스를 만들어 냈다.
앞을 막은 박승옥을 페인트 동작으로 제쳐 내고 반대편 방향에서 뛰어드는 스르잔 제비나츠 쪽으로 패스를 보낸 것.
하지만 스르잔의 슈팅은 황급히 수비에 가세한 준영의 몸에 맞고 라인 밖으로 날아갔다.
‘크, 꽤 야무진 슈팅이군.’
준영은 얼얼한 옆구리를 매만지며 이어지는 유고의 코너킥에 대비했다.
스르잔 제비나츠와 즈베즈단 제비나츠가 오른쪽에서 동시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들은 형제일 뿐만 아니라 얼굴도 똑같은 쌍둥이라 백넘버를 보지 않으면 누가 누군지 알기가 쉽지 않았다.
‘뭐, 상관없지. 공중전에선 절대 안 진다고.’
준영이 자신만만하게 공이 날아오길 기다렸지만, 유고 측은 코너킥을 박스 안이 아니라 외곽으로 보냈다.
공을 잡은 세쿨라리치는 김찬기가 마크해 오기 전에 슛을 날렸다.
꽤 빠르고 묵직하게 날아왔지만, 함흥철은 깔끔하게 공을 잡아챘다.
‘우리 준영 아우님 슛에 비하면 별거 아니구만.’
함흥철은 준영과 훈련하는 동안, 그의 엄청난 강슛들을 경험했다.
여기에 손바닥 부분에 고무를 바른 두툼한 골키퍼 장갑까지 끼니 웬만한 슈팅은 다 잡아 낼 자신감이 들었다.
“자, 선제골을 넣어서 유고 빨갱이들을 놀라게 해 줘!”
함흥철은 측면으로 빠르게 달려가는 조윤옥에게 길게 공을 던져 주었다.
페타르 라다코비치가 황급히 나서 마크를 했지만, 공을 툭 치며 가속도를 붙인 조윤옥은 그를 잽싸게 따돌려 버렸다.
“어어, 저거 위험하다고!”
“빨리 따라가서 막아!”
관중석에서 우려의 함성이 쏟아지는 가운데, 조윤옥은 정순천과 원투 패스를 주고받으며 유고 진영으로 달려갔다.
그러곤 유고 페널티 박스로 뛰어 들어간 최정민 쪽으로 패스를 밀어 주었다.
‘걸렸다!’
벨리보그 바소비치를 살며시 제친 최정민은 달려 나오는 쇼스키치 골키퍼를 보며 슈팅을 날렸다.
골망이 크게 출렁이자, 관중들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실점… 은 아니구나.”
“옆 그물인가? 들어간 줄 알았어.”
“젠장, 장난이 아니잖아. 극동 원숭이쯤은 쉽게 이긴다고 했던 게 대체 누구야?”
아무래도 쉽지 않은 경기가 될 모양이다.
관중들의 눈빛이 긴장감으로 물드는 가운데, 경기는 점점 더 뜨겁게 달궈졌다.
***
전반 18분, 비록 옆 그물을 때리긴 했지만 최정민의 슈팅은 경기 분위기를 한국 쪽으로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한국의 역습에 놀란 유고 선수들은 한발 뒤로 물러났고, 기세가 오른 한국 대표팀은 연이어 찬스를 만들어 냈다.
「존 Y. 리가 공을 몰고 전진해 들어옵니다. 세쿨라리치의 태클! 하지만 뛰어넘으며 그대로 달려 들어옵니다! 위험한데요?」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준영의 모습에 유고 수비수들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돌파? 아니면 슛?’
‘분명히 슛이다!’
준영의 큰 자세를 보고 그리 판단한 샤르코 니콜리치가 몸을 날렸다.
그러나 준영은 패스를 찔러 넣었고, 골문 앞에 있던 유판순이 이를 골대에 밀어 넣었다.
“아싸, 골! 내가 넣었어! 내가 선제골을 넣었다고!”
펄쩍 뛰어오르며 쾌재를 부르던 유판순.
그의 기쁨은 선심이 들어 올린 깃발에 무너지고 말았다.
“오프사이드라고? 아니, 어째서?”
“저 니콜리치란 놈이 뛰어나온 바람에 네가 오프사이드가 된 거야.”
최정민은 아쉬운 기색을 보였다.
만약 니콜리치가 자리를 지켰다면? 득점에 성공했을지 모른다.
물론 유판순이 니콜리치에게 막혔을 수도 있고.
“다들 실망하지 말고 기운 내. 점점 골과 가까워지고 있잖아.”
“맞습니다!”
최고참 선수답게 최정민은 선수들이 실망하지 않게 잘 도닥였다.
한편, 간 떨어질 뻔한 유고 선수들을 향해서 홈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뭐 하는 거야! 그러고도 너희가 국가대표냐!”
“이래서 월드컵 가겠나?”
홈팬들의 채찍질에 얼굴이 붉어진 유고 선수들은 반격에 나섰다.
두르코비치가 패스해 준 공을 세쿨라리치가 한국 진영으로 몰고 들어가서 밀란 갈리치 쪽으로 전달해 주었다.
하지만 밀란 갈리치가 슈팅을 하기 직전, 준영이 그의 발밑에서 공을 빼냈다.
‘제기랄, 또 저 자식이……!’
인상을 구긴 세쿨라리치가 곧장 준영에게 달려와 태클을 날렸다.
발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위험한 태클.
준영은 드래그 백으로 간신히 그 태클을 피해 냈다.
‘이 자식이 사람 잡으려고 작정했나.’
그러나 작정한 건 세쿨라리치만이 아니었다.
유고 선수들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사납게 한국 선수들에게 부딪쳐 오고 있었다.
이전까지가 몸으로 밀며 위협하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가격할 것처럼 팔로 떠밀고 발을 걸었다.
“이런 쌍놈의 새끼가 페어플레이는 밥 말아 먹었나!”
“태성아, 참아.”
“저 자식이 내 발목을 잡았다고!”
성격이 불같은 차태성은 난투극을 벌일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렇게 분위기가 격앙되는데도 불구하고, 유고 선수들의 더티 플레이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흥, 마음대로 요리할 수 없으니 안달이 났구만.”
최정민은 코웃음을 쳤다.
나름 유럽 축구 강국입네 하고 자신만만하게 밀어붙이다가 제 뜻대로 안 되니 애가 타는 모양.
‘어디 마음대로 해 봐라. 그런다고 우리가 물러나진 않아.’
부지런히 최전방을 흔들어 놓던 최정민은 준영이 볼을 인터셉트한 것을 보고 곧장 상대 골문 쪽으로 움직였다.
“아우님, 이쪽이야!”
번쩍 손을 들어 올린 그의 발치로 준영의 패스가 전달되었다.
그와 동시에 날아든 블라디미르 두르코비치의 태클.
맹수의 이빨같이 하얗게 번득이는 금속의 스터드는 최정민의 발목을 향해 날아왔다.
***
밀란 갈리치(1938~2014)는 로마 올림픽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유고슬라비아에 금메달을 안겨 주었고,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도 팀을 4강으로 이끌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때 양친을 잃고 즈렌자닌의 고아원에서 자랐는데, 이때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기술이 뛰어나고 민첩했으며, 저돌적인 성향이 강했다고 합니다.
8시즌을 파르티잔에서 뛰면서 1965-66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랑 맞붙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