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42화 (342/400)

Round 342. 사명이자 유희

9월 4일 올드 트래퍼드.

유럽과 남미의 제왕이 세계 최강의 자리를 두고 자웅을 가리는 인터콘티넨털 컵 1차전이 시작되었다.

홈 관중들과 기자들은 낙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상대는 작년 홈에서 5 대 1로 대승을 거두었던 페냐롤이니까.

“변수는 선수들의 피로겠군.”

“페냐롤도 입국이 늦었어. 저쪽도 여독이나 시차 때문에 정상 컨디션은 아닐걸.”

“더구나 이틀 전이랑 엔트리가 달라. 팔팔한 녀석들이 대거 출전했다고.”

“페냐롤 녀석들, 자기네 간판 공격수였던 선수를 상대하는 기분이 어떠려나?”

알베르토 스펜서는 오늘 경기에도 출전했다.

임대 계약에 친정 팀을 상대로 출전할 수 없다는 조항은 넣지 않았기 때문.

이렇게 된 건 양 팀이 겨우 한 해 만에 다시 정상에서 마주칠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냐롤의 로베르토 스카로네 감독은 조금도 난감하게 여기지 않았다.

“저쪽에서 알베르토를 기용해 준다면 고맙지. 우리가 잘 아는 선수니까.”

그에 비하면 오늘 맨유는 작년에는 못 봤던 공격수들을 상대하게 될 것이다.

“후안 조야, 페드로 로차, 저 붉은 악마 녀석들의 혼을 빼 줘라.”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되자 조야와 로차 두 공격수가 맨유 수비진을 흔들어 댔다.

엄청난 스피드를 가진 조야, 그리고 그의 움직임을 잘 활용하며 공격을 만들어 가는 로차의 플레이는 준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역시 남미에는 고수들이 많군.’

후안 조야도 대단했지만, 페드로 로차는 19살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갖췄다.

패스와 킥은 상당히 정교했고, 동료 공격수들과의 연계도 좋았다.

거기다 180대의 장신에 걸맞게 뛰어난 헤딩 능력을 선보였다.

「루이스 쿠비야, 좌측면에서 토니 던을 제치고 크로스! 페드로 로차가 뛰어들며 머리를 댔지만, 캡틴 리가 헤딩으로 걷어 냅니다.」

준영이 막아 내긴 했지만, 그와 같은 높이에서 경합하는 로차의 공중전 능력에 기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만만찮은걸.”

“자칫하다간 잡아먹히게 될지도?”

“빨리 선제골을 만들지 않으면 위태롭겠어.”

하지만 맨유의 선제골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최전방의 알베르토와 데이비드 허드가 여러 차례 슈팅을 날렸지만, 빗나가거나 상대의 선방에 막혀 버렸던 것.

2선에서 바비 찰튼과 짐 박스터, 조니 자일스가 지원에 나섰지만, 윌리엄 마르티네스가 이끄는 페냐롤의 수비는 쉽사리 뚫리지 않았다.

결국 전반전은 0 대 0으로 종료.

맨유 선수들과 관중들의 답답한 심정을 대변하듯, 흐린 하늘에는 먹구름이 차 있었다.

***

후반전이 시작되자, 하늘에서는 가늘게 빗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던컨은 맹렬한 오버래핑으로 페냐롤 진영을 치고 들어갔다.

「에드가르도 곤잘레스의 태클. 하지만 빅 던이 가볍게 뛰어넘고 중앙에 쇄도하는 동료들을 봅니다. 크로스를 올려 줄까요?」

그러나 던컨의 선택은 한 번 접어서 마크맨을 제치고 돌진.

페냐롤 박스 안으로 들어온 그는 그대로 슈팅을 날렸다.

수비수 누베르 카누를 맞고 굴절된 슈팅은 골키퍼 마이다나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꺾였다.

터엉-!

골대를 맞고 나오는 공을 향해 데이비드 허드가 달려들어 슛을 날렸다.

하지만 급한 나머지 공 밑부분을 때리는 바람에 크로스바를 넘어가고 말았다.

「아……! 너무 좋은 찬스를 놓치는 유나이티드! 자꾸 이렇게 답답하게 진행되면 곤란한데요.」

중계 캐스터의 말대로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골이 터지지 않으니 맨유 선수들의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다.

그에 반해 페냐롤은 안정적인 경기 운영을 계속해 나갔다.

후안 조야의 빠른 발을 이용해 맨유 수비 뒷공간을 노리고, 페드로 로차와 루이스 쿠비야가 날카로운 슛과 패스로 계속 역습을 시도했다.

그 바람에 꽤 아찔한 상황도 있었지만, 준영이 침착하게 막아 냈다.

「쿠비야, 중앙에 있는 로차에게 패스, 로차가 흘려주고 호세 사시아가 일대일 찬스! 위기! 유나이티드, 대위기!」

사시아는 각을 좁히고 나온 해리 그렉의 대처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구석을 노리고 슛을 감아 찼다.

하지만 황급히 골대로 내려온 준영이 헤딩으로 그 슛을 막아 냈다.

“휴우우, 다행이다.”

“젠장, 심장이 멈출 뻔했다고!”

안도하는 관중들과 달리 페냐롤 선수들은 무척 아쉬워했다.

전후반을 통틀어 가장 좋은 찬스였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아쉬움을 금방 떨쳐 내고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원정에서 무승부도 나쁘지 않은 결과니까.’

‘유나이티드 놈들, 작년에 우리가 당한 걸 그대로 갚아 주마!’

맨유 선수들에게 무정하게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후반전 40분대에 접어들었다.

양 팀 선수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진 상황에서 알베르토 스펜서가 남은 힘을 짜내 드리블을 시도했다.

연달아 수비수를 제친 알베르토는 박스 안으로 진입하기 무섭게 슛을 때렸다.

그 슛은 윌리엄 마르티네스의 팔에 맞고 골대 옆으로 나갔다.

“핸들링이지?”

“분명히 팔에 맞았어! 페널티킥이라고!”

알베르토는 물론 맨유 선수들도 곧장 파울임을 어필했다.

하지만 오늘 경기를 맡은 스위스 심판 오트마르 후버는 코너킥 판정을 내렸다.

“야 인마! 뭘 보고 자빠진 거야? 이건 페널티킥이라니까!”

“우우- 우!”

관중들의 거친 야유가 쏟아졌지만, 심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울컥한 건 맨유 선수들도 마찬가지.

준영은 주장답게 그런 동료들을 다독였다.

“경기에 집중해. 아직 찬스가 남아 있어.”

“하지만 주장…….”

“시간 없어. 어린애처럼 떼쓰다가 무나 캐고 싶냐?”

간신히 분위기를 추스른 준영은 이어지는 코너킥 공격을 준비했다.

‘오늘 경기 코너킥에서는 별 재미를 못 봤지.’

페냐롤은 코너킥에서 전원 수비로 대응했다.

특히 준영의 마크맨들은 공이 높게 온다 싶으면, 바로 몸을 최대한 낮추고 버텼다.

스스로 장애물이 되어 준영이 공의 낙하지점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방해한 것.

그 대응은 제법 효과가 있었고, 준영은 코너킥에서 호쾌한 헤딩슛을 보여 주지 못했다.

‘마지막 찬스일 수 있어. 그러니 반드시 살려야 해!’

준영이 다짐한 순간, 조니 자일스가 올린 코너킥이 박스로 날아왔다.

‘높다. 거기다 길어!’

반대편 외곽으로 떨어진 공을 던컨이 잡아서 다시 띄워 올렸다.

날아오는 공을 향해 마이다나 골키퍼가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맨유 수비수 빌리 맥닐이 헤딩으로 방향을 꺾어 놓았다.

‘찬스!’

준영은 떨어지는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페냐롤 수비수들이 대놓고 팔과 유니폼을 잡았지만, 준영이 쭉 뻗은 발끝에 맞은 공은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우와아아아!”

“해냈어! 캡틴 리가 또 해냈다고!”

정규 시간 종료 직전에 마침내 터진 골.

천신만고 끝에 득점에 성공한 맨유는 1차전 홈경기를 승리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

“고생했어요. 많이 피곤하죠?”

리즈는 고전 끝에 승리를 따내고 귀가한 준영을 반겼다.

두 차례 원정 경기에 인터콘티넨털 컵 경기까지 빡빡하게 이어지면서 외박을 했던 준영은 며칠 만에 보는 사랑스러운 아내를 부둥켜안았다.

“휴, 이제 힐링이 되는 것 같네.”

“정말 힘들었나 보네요.”

“앞으로가 큰일이지.”

닷새 후 토트넘과의 경기가 끝나면 팀은 둘로 나뉜다.

준영은 원정 팀을 이끌고 몬테비데오로 떠나고, 던컨은 잔류 팀의 주장이 되어 7라운드와 8라운드 경기를 맡기로 했다.

“던 씨가 원정에 빠진다고요? 그럼 꽤 힘들지 않아요?”

“코헨이 같이 가니 괜찮을 거야. 그 녀석, 수비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거든.”

알베르토 스펜서도 원정에서 제외되었다.

본인은 2차전도 뛰겠다는 강한 의사를 보였지만, 버스비 감독은 허락하지 않았다.

페냐롤 팬들이 맨유의 유니폼을 걸친 그를 보고 어떤 행동을 취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나도 감독님 생각에 동의해. 남미 사람들은 축구에 있어서 과격한 면이 강하니까 말이지.”

“그러고 보니 1950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우승하지 못했다고 자살한 사람들이 많았단 얘기를 들었어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아르헨티나가 준우승에 그치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폭동이 일어나 60여 명이 체포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1994년 월드컵에서는 자책골을 넣은 콜롬비아 선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가 귀국한 후에 살해당하기도 했다.

“아 참, 혹시 한국에서 연락이 오진 않았어?”

“캡틴 Choi가 대표팀 선수들이 소집되어 훈련 중이라고 알려 줬어요. 영국에는 9월 중순에 도착할 거래요.”

“역시, 벌써 시작했군.”

작년 로마 올림픽에서 한국이 1승 1무 1패로 선전했다고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맞붙는 유고슬라비아는 그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거기다 월드컵 예선전이니, 최정예 멤버로 나설 것이다.

‘그들에 비하면 전력이 한참 떨어지는 한국은 합숙으로 조직력을 최대한 키우는 방법밖에 없어.’

준영은 한국 대표팀에 파워와 스피드를 높일 수 있는 훈련 프로그램을 알려 주었다.

6월에 일본에 대승할 수 있었던 것도 단지 준영이 가세했기 때문은 아니다.

선수들이 꾸준히 훈련하며 기량을 향상시킨 덕분이다.

순박하고 국가대표로 사명감이 강한 한국 선수들은 의욕도 강하고 성취도도 높았다.

‘그래도 플레이오프 통과는 힘들겠지. 유고슬라비아는 강팀이니까.’

원래 역사와 다른 점이라면 승률이 조금은 더 높아졌다는 것.

지금도 월터 윈터보텀 등 영국 축구계 인맥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정보를 캐내는 중이었다.

당연히 1퍼센트라도 승률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변과 기적은 거저 일어나지 않아. 그러니 하는 데까지 해 보자.’

사실 자신이 이 시대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이변과 기적이다.

하지만 준영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가기로 했다.

바꿀 수 있는 운명을 바꿔 가는 게 이 시대에 온 자신의 사명, 그리고 흥미로운 유희라 생각되었으니까.

***

9월 9일, 퍼스트 디비전 6라운드 토트넘전.

맨유 선수들은 이 경기를 벼르고 있었다.

지난 시즌 토트넘에게 리그뿐만 아니라 FA컵 결승에서도 고배를 마셨으므로.

“가자. 닭집 녀석들을 화끈하게 튀겨 주는 거다!”

“우리가 챔피언이다! 버스비의 애송이들에게 그 사실을 똑똑히 일깨워 줘!”

올 시즌 우승을 다투는 양 팀은 시작부터 화끈하게 포화를 주고받았다.

지난 시즌 더블 우승을 일궈 낸 토트넘은 흑표범 에우제비우와 골 게터 로버트 A. 스미스를 내세워 맨유의 골문을 노렸다.

이에 맨유는 알베르토 스펜서, 데니스 로 투톱을 내세우며 맞불을 놓았다.

“유나이티드는 공수 측면을 대거 강화했군.”

“오른쪽에 빅 던과 조지 코헨, 왼쪽은 레이 윌슨에 토니 던인가.”

“활동량으로 스퍼스를 압살할 셈인 모양이군.”

측면에 만만찮은 선수들이 진을 친 덕분에 에우제비우는 중앙으로 돌파를 시도했다.

하지만 미드필드 중앙에는 바비 찰튼과 노비 스타일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에우제비우의 악연인 노비는 그림자처럼 쫓아다녔다.

‘쳇, 진짜 귀찮은 자식이야.’

에우제비우는 대니 블란치플라워와의 원투 패스로 노비를 뿌리쳤다.

눈앞으로 맨유 골대가 훤하게 보인다 싶던 그 순간, 그는 바로 슈팅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슛이 작렬하는 순간, 낫질하듯 날카로운 태클이 들어왔다.

‘제길, 존 Y. 리!’

‘득점은 안 준다, 흑표범!’

공을 중간에 두고 최강의 플레이어들의 슈팅과 태클이 격돌했다.

***

1. 후안 조야는 1960년대 월드 클래스 윙어로 명성을 날린 선수입니다.

가공할 스피드와 정교한 크로스로 페냐롤의 6차례 리그 우승과 2차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인터콘티넨털 컵 우승을 견인했습니다.

2. 오른쪽의 선수가 페드로 로차.

우루과이에서 펠레의 라이벌로 내세웠을 정도로 상당한 실력이 있는 선수였습니다.

다만 국제적인 위상은 펠레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차범근과 오데쿠라, 박지성과 혼다, 손흥민과 미나미노 같은 구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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