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39화 (339/400)

Round 339. 어린 황제와 룸메이트

맨체스터로 돌아온 준영은 이희택을 데리고 맨유 유스팀을 찾아갔다.

“와! 우와!”

한국에서 보기 힘든 번듯한 필드와 훈련장을 본 희택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영국 축구팀들은 다 이래요?”

“아니. 다 이렇진 않고, 우리 팀이 특별하지.”

리버풀이나 맨시티 등, 라이벌 팀들을 비롯해서 맨유를 벤치마킹해서 축구 인프라를 개선하려는 구단들이 늘고 있었다.

이런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건, 이전보다 축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만큼 투자도 늘어난 덕분이다.

이는 월드컵 우승, 맨유의 유러피언 컵 4연패로 축구 종가의 명예가 드높아진 덕이 컸다.

여기에 실력 있는 외국 용병들의 활약이 대중의 관심을 높인 점도 한몫했다.

‘음, 생각해 보니 다 내가 관여한 덕분이군.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고도 남겠는걸.’

준영이 내심 으쓱해할 때, 이희택의 긴장감은 커지고 있었다.

영국에 올 때만 해도 준영의 가르침을 받을 거라 기뻐하기만 했지, 맨유에 입단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영국 최고, 아니 세계 최강팀이니까 잘하는 선수들도 잔뜩 있을 텐데…….’

자신과 비슷한 또래들이 있는 유스팀이라지만,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였을 게 아닌가.

희택은 제대로 축구를 시작한 지 1년도 안 되는 자신이 과연 이런 팀에 뛸 자격이 되는지 고민이 되었다.

“윤옥이 형은 아마추어 팀에서 시작했다고 하던데……. 연합팀 같은 굉장한 팀에 저 같은 놈이 어울릴지 모르겠어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면 데려오지도 않았어.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

준영이 본 이희택은 굉장히 습득이 빠르고, 상황에 따라 본능적으로 기술을 변형해서 쓸 줄 아는 인재였다.

그래서 처음엔 버벅댈지 몰라도 금방 스펀지처럼 흡수해서 실력이 향상될 거라 판단했다.

준영의 말에 희택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걱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 영어 못하는데 괜찮을까?’

동료들과 의사소통이 제대로 될까? 감독의 가르침과 지시 사항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이희택의 이런 걱정은 유스팀 코치를 만나면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저분, 한국분인가요?”

“그래, 인사드려. 김용식 선생님이시다.”

“헉!”

이 시대 한국 축구계의 우상인 김용식 선생이라니!

희택은 곧장 허리를 직각으로 굽혔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김포에서 온 이희택입니다.”

“반갑네. 여기 이 군에겐 전화로 얘기를 들었지. 꽤 비범한 발재간을 가졌다지?”

준영이 인정해서 데려온 인재라니, 김용식도 이희택에게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주의를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여기 어린 선수들은 내가 가르치는 게 분에 넘친다 싶을 정도로 뛰어난 아이들이 많아. 재능 좀 있다고 자만하다간 금방 뒤처지고 말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모처럼 여기까지 왔으니 열심히 해 보라고.”

이렇게 김용식이 이희택을 격려하고 있을 때, 체력 훈련 중이던 유스팀 선수들은 새로 온 신참을 구경하고 있었다.

“동양인이네.”

“캡틴 리 형님이 한국에서 데려왔나 봐.”

“헹, 쪼그만데. 툭 치면 한 방에 날아가겠다.”

“하지만 너보다 빠를지 몰라.”

쑥덕이던 선수들은 준영과 김용식의 눈길을 받자, 냉큼 훈련에 전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보이는 눈길은 질책의 시선은 아니었다.

“제가 말한 독일 녀석들을 데려왔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걔들이라면 저쪽에 있지.”

김용식은 독일 트리오가 있는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확실히 뛰어난 재능을 가졌더군. 1군의 머피 코치도 보고 2~3년 안에 즉시 전력으로 써먹을 만하다고 평가했을 정도로.”

“네, 앞으로 저 녀석들이 유럽 축구를 주름잡게 될 겁니다.”

준영의 말에 김용식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만큼 확신이 들던가? 근데 저 애들은 어떻게 알았나? 암스트롱 씨도 그 점을 궁금하게 여기던데 말이야.”

“예전에 뮌헨으로 투어를 갔을 때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랬구만.”

준영이 거짓말을 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김용식은 수긍하고 넘어갔다.

그사이 준영은 조지 베스트와 훈련하고 있는 프란츠 베켄바워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라 불린 최강의 리베로.

자신에 의해 바뀐 역사에선 어떤 플레이어가 될지 기대가 되었다.

***

“다들 수고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야.”

“감사합니다!”

훈련을 마친 베켄바워는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베켄바워 군, 자네 앞으로 온 편지들이야.”

구단 직원이 건네준 편지들은 가족과 친구들이 보낸 것들이었다.

‘내용이 비슷하네.’

여러 가지 얘기들이 있었지만, 다들 자신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는지, 그리고 독일에서 왔다고 괄시하진 않는지.

사실 후자의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심하진 않았다.

‘입만 꾹 다물고 있으면 독일인인지, 영국인인지 구별을 못하니까.’

맨시티의 베르트 트라우트만이라는 독일 골키퍼가 좋은 활약을 하면서 적대적인 풍조가 많이 가라앉은 편이었다.

거기다 맨유는 차별적인 언행은 금기하고 있었다.

주장이 한국인에 에콰도르와 포르투갈 출신 선수들도 뛰고 있는 데다, 감독도 리투아니아 혈통이었기 때문.

‘내가 오기 전에 유스팀에서도 그 문제로 쫓겨난 선수들도 있다고 했지.’

김용식 코치를 향해 눈 찢기를 하다 쫓겨난 놈도 있고, 자메이카나 아일랜드 출신의 동료 선수들에게 ‘Nigger’라고 놀리다 강퇴당한 녀석도 있었다.

몇몇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이중적이라며 비꼬기도 했다.

과거 존 Y. 리나 맨유 선수들이 상대 팀의 일본인 선수를 ‘Jap’이라 부르며 비하한 적이 있다면서.

하지만 이런 지적은 큰 논란 없이 은근슬쩍 넘어갔다.

‘아무튼 지내는 데 크게 불편함은 없으니까.’

훈련 시설이나 장비도 좋고, 숙소도 쾌적했다. 거기다 식사 역시 양질에 맛도 좋았다.

독일에 있을 때와 비교해도 훨씬 나았던 것.

훈련도 상당히 체계적.

간단한 체력 훈련도 어떤 근육을 향상시키는지, 경기력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파악해서 시킬 정도.

전술 역시 마찬가지.

많이 뛰면서 다양한 상황에서 어떤 플레이를 해야 하는지 숙지시키곤 했다.

하지만 가장 흥미롭고, 항상 기대하고 있는 건 존 Y. 리의 지도였다.

‘유나이티드에 온 건 그 사람 때문이니까.’

베켄바워는 이미 지난 12월부터 맨유의 러브콜을 받았다.

원래는 고향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언젠가 바이에른 뮌헨의 정규 선수가 되어 팀을 1부에 올려놓으리라 다짐했으므로.

‘유럽, 아니 세계 최고의 수비수가 널 눈여겨보고 있다고 하는구나. 유나이티드에 가면 배울 수 있는 게 정말 많을 거다.’

뮌헨 유스팀 코치의 권유도 있고, 존 Y. 리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이 있었던 베켄바워는 바로 계약해서 영국으로 왔다.

기대한 대로 존 Y. 리의 지도는 굉장했다.

세계 최고의 선수답게 그의 기술과 노하우는 한 세대, 아니 두 세대는 앞서 보였다.

베켄바워는 그가 알려 주는 기술과 노하우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훈련이 끝난 후에도 따로 개인 연습을 하거나 필기해 가며 배운 것을 숙지해 나갔다.

‘두고 봐. 3년, 아니 2년 안에 1군 주전을 꿰차고 말 테니까.’

이렇게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건 베켄바워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독일에서 온 게르트 뮐러도, 제프 마이어 역시 그랬다.

깜짝 놀랄 만한 발재간을 가진 조지 베스트도 마찬가지.

그리고 미래를 향해 도전장을 내민 소년이 또 한 명 있었다.

“서른여섯, 서른일곱…….”

베켄바워는 숙소에서도 열심히 체력 단련 중인 룸메이트를 바라보았다.

비범하게도 2층 침대 위에 다리를 걸치고 거꾸로 윗몸 일으키기를 하는 녀석.

그는 존 Y. 리의 고국에서 왔다는 리틀 리였다.

원래 이름이 HuiTaek Lee라고 하는데, 발음이 어려워서 다들 ‘리틀 리’라고 불렀다.

주장과 같은 성씨인 데다 체격이 작았기 때문.

“리, 그거 안 힘들어?”

“힘들어. 하지만 해야 돼.”

베켄바워도 아직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고, 이희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 방에서 부딪치다 보면 대화를 안 할 수 없는 일.

그래서 짤막하게 영어나 보디랭귀지로 대화를 주고받곤 했다.

“나 키 작아. 이거 해야 키가 커.”

“누가 그래? 주장?”

“아니, 학교 체육 선생님.”

이희택은 팀원들 중에 체격이 왜소한 부류에 속했다.

그래서 식사 때도 우유와 달걀을 더 받고 있었다.

그래도 베켄바워는 그를 얕잡아 볼 수 없었다.

‘완전 야생 동물 같은 녀석이니까.’

정교한 슈팅에 뛰어난 위치 선정 능력을 가진 게르트 뮐러.

뛰어난 득점력에 효율적이고 번개 같은 드리블을 자랑하는 조지 베스트.

이희택은 이들과 다른 특성의 공격수였다.

다듬어지지 않은 듯 엉성해 보이는 구석이 많지만, 빠른 데다 균형 감각이 좋고, 예상하기 힘든 즉흥적인 움직임을 펼치는 데 능했다.

어제 연습 경기에서도 공을 잡다 미끄러져 넘어진다 싶었는데, 잽싸게 팔을 딛고 쓰러진 몸을 튕기듯이 일어나서는 바로 쏜살같이 골대로 튀어 나갔다.

‘마치 겨울에 스케이트 선수들이 코너를 도는 모습이랑 비슷했지.’

어제 경기 상황을 떠올리던 베켄바워는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 휴식 중이던 이희택에게 물음을 건넸다.

“근데 주장은 언제 오냐?”

“나도 몰라. 전지훈련 중.”

올해도 맨유는 비시즌에 해외로 전지훈련을 나갔다.

이번엔 유럽이 아니라 미국과 멕시코.

특히 멕시코 축구협회나 클럽들은 맨유와 경기를 하기 위해 이미 시즌 종료 전부터 접촉을 해 왔다.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가진 팀을 초빙하여 경기함으로써 선진 축구를 배우고, 남미의 브라질 못지않은 강호가 되기 위해서였다.

“주장은 투어 중에 돌아올 거라는 얘기가 있던데?”

“누가 그래?”

“직원들 얘기 들었어.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고.”

그 개인적인 사정이 뭘까.

베켄바워도, 이희택도 몰랐지만, 어쨌든 준영이 빨리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래야 그에게 한 수 배울 수 있을 테니까.

***

멕시코 제2의 도시 과달라하라.

이곳은 클럽 데포르티보 과달라하라의 연고지였다.

지난 시즌 리가 마요르(* Liga Mayor, 리가 MX의 전신) 우승컵을 든 CD 과달라하라는 홈경기장인 에스타디오 할리스코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친선전을 벌였다.

“Hala, Campeonísimo!”

“La victoria es nuestra!”

홈팬들의 열성적인 응원을 받은 과달라하라.

그들은 간판 스트라이커 살바도르 레예스를 앞세워 맨유의 골문을 연달아 두들겨 댔다.

과달라하라의 맹공에 맨유는 무척 고전했다.

하지만 그것은 과달라하라의 전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맨유 선수들의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길, 숨이 금방 차오르는군.”

“이곳은 고산 지대니까. 그래도 여긴 나은 편이야. 볼리비아 같은 곳은 정말이지…….”

알베르토 스펜서는 예전에 해발 3,600미터에서 했던 경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긴 해도, 맨유는 꿋꿋하게 버텼다.

항상 든든하게 뒤를 받치는 주장이 오늘도 상대의 맹공을 잘 막아 주고 있었으므로.

거기다 준영은 단지 수비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공을 몰고 올라가 공격에도 적극 가담했다.

측면에서 오버래핑하는 던컨과 패스를 주고받으며 상대 진영 깊숙한 곳으로 올라간 준영은 수비수 한 명을 앞에 두고 과감히 슛을 날렸다.

뻐엉-! 좌아아악!

허공을 가른 슈팅은 시원하게 골망을 흔들었다.

“하하하, 역시 우리 주장이야!”

“필요할 때 꼭 한 건 하는 사나이라니까!”

준영의 선제골로 경기 흐름을 탄 맨유는 후반전 알베르토와 데니스 바이올렛이 골을 추가하며 3 대 0의 완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 준영은 바로 공항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

“어라? 주장은 미국에는 안 가는 건가요?”

“그래, 멕시코에서 경기만 하고 귀국하기로 했다고.”

던컨은 준영이 도중에 돌아가는 이유에 대해 알려 주었다.

“다들 응원해 주라고. 존의 인생에서 가장 뜻깊은 순간을 만끽하러 가는 거니까.”

던컨은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멀어지는 준영을 바라보았다.

***

1960년대 멕시코는 경제 성장을 발판으로 스포츠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래서 이때 월드컵과 올림픽을 치렀죠.

그에 반해 같은 북미 국가인 미국은 50년대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를 깜짝 격파하는 언더독으로 주목받았지만, 이후에는 별다른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미국 스포츠는 미식축구, 야구, 농구가 축구보다 훨씬 더 인기가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이후에 미국 축구도 경제성이 있다고 보고 여러모로 투자가 되고, 북미 리그가 창설되면서 펠레나 요한 크루이프 같은 선수들이 뛰기도 했죠.

하지만 1980년대까지 암흑기는 계속되었습니다.

이후 1990년대에 들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1999년에는 대륙간컵에서 독일을 격파했을 정도로 전력이 강했습니다.

근데 당시에 우리나라는 2002년 월드컵에서 미국이 제일 만만하다고 했었죠. ^^;;;

그때도 참 모르는 게 많던 시절이었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