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35. 열도 침몰
준영이 내뱉은 ‘열도 침몰’이라는 출전 구호는 금방 일본에 알려졌다.
외신으로부터 보도가 나간 것도 있지만, 9일 오전 도쿄에 입성한 준영이 일본 취재진들에게도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열도 침몰이라는 발언이 사실이냐고요? 11일에 경기장에 오면 볼 수 있을 겁니다.’
오만방자한 발언에 일본 축구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과 정치인들도 격분했다.
특히 우익 인사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그 망할 조센징 놈, 공 좀 찬다고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군!”
“가서 확 그냥 찔러 버릴까?”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일본 정부나 경찰은 한국 대표팀에 대한 경호를 대폭 강화했다.
그들도 좋아서 이준영을 보호하는 건 아니다.
외국인 선수가 경기하러 방일했다가 살해당하거나 다치는 사건이 벌어지면 단단히 망신살이 뻗칠 수밖에 없기 때문.
당장 3년 후에 도쿄에서 올림픽을 치르기에 이런 문제는 각별히 신경 써야 했다.
“어찌 되었든 그 시건방진 조센징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 줘야 하는데…….”
“우리도 영국에서 뛰는 선수들이 있잖습니까. 그들이 야마토 정신을 불태우면 승리도 불가능하진 않을 겁니다!”
멋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떠들었지만, 정작 영국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의 생각은 달랐다.
“리준욘을 막을 방법? 그런 건 없는데…….”
“칙쇼! 그 망할 조센징 자식은 왜 극동에 와 있는 거야!”
축구계 안팎에서 가하는 압박에 히라키 류조나 나가누마 겐은 죽을 맛이었다.
안 그래도 이길까 말까 한 경기를 반드시 이기라고 닦달하고 있으니!
“정상적으로 막을 수 없다면 비정상적으로 막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일본 대표팀 수비수 미야모토 마사카츠가 뭘 그리 걱정하느냐는 투로 자신이 생각한 방책을 이야기했다.
“경기하다 보면 부딪치고 엉키는 경우가 허다하잖아요. 팔꿈치로 턱을 갈기거나 뒤에서 태클을 날리면 그놈도 쓰러질 수밖에 없을걸요.”
“미야모토, 그건 네가 리준욘을 상대해 보지 않아서 그래.”
히라키와 나가누마는 대놓고 난투극을 벌이자는 후배 미야모토를 만류하고 나섰다.
“우리가 거칠게 굴면 그쪽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가뜩이나 우릴 못 잡아먹어 환장한 놈들인데?”
“너 가와부치가 어떤 꼴 당했는지 못 들었냐? 몸싸움 잘못했다가 쇄골이 한 방에 부러졌다고.”
“그래, 코쟁이들도 그놈에게 함부로 시비를 걸지 않아.”
가와부치의 이야기가 나오자 미야모토의 표정이 구겨졌다.
영국 FA컵에서 대형 사고를 치고 쫓겨난 가와부치는 일본으로 돌아온 후에도 선수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나라의 체면을 구겨 놓은 놈을 기용하는 팀은 없었기 때문.
결국 가와부치는 고향인 오사카로 낙향했고, 거기서도 직장을 구하지 못해 폐인처럼 살고 있었다.
미야모토는 대학 선배인 가와부치의 처지를 딱하게 여겼다.
일본 축구의 샛별로 숭배받다가 한순간에 역적으로 전락했으니까.
이게 다 리준욘 때문이라고 하지만, 가와부치를 몰아붙인 국민들 역시 원망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 국민들은 지금 자신들도 사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전쟁 때 양키 군함에 달려들던 가미카제 특공대원의 기분을 알 것 같군요.”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가 된 것 같달까…….”
“그냥 대표팀 은퇴해 버리면 안 되나?”
일본 선수들이 한숨을 토하는 가운데, 무정하게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
1961년 6월 11일 도쿄 메이지 신궁 외원 경기장.
경기 시작 전에 수용 관중을 채운 경기장 필드에서는 한국과 일본 양국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상당히 활기 넘치는 한국 쪽과 달리 일본은 비장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비장함을 가장한 긴장감.
일본 선수들의 시선은 유달리 눈에 띄는 장신 선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리준욘인가.’
‘진짜 괴물같이 크네!’
‘저걸 어떻게 막으라고? 우리 팀엔 180이 넘는 선수는 하나도 없는데…….’
오늘 이준영을 처음 본 선수들은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보니 간단한 패스나 트래핑에서도 실수를 하기 일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오늘 주장 완장을 찬 나가누마 겐은 악귀같이 호통을 날렸다.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어! 집중하라고, 이 등신들아!”
“はい!”
한껏 목청을 높이는 그들의 외침에 한국 선수들은 화들짝 놀랐다.
“어이구, 깜짝이야.”
“어지간히 긴장한 것 같네요.”
준영의 말에 최정민이 동감했다.
“하긴 겁 많은 개가 시끄럽게 짖기 마련이라니까.”
예열을 끝낸 양 팀 선수들은 라커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선수 대기실로 나왔다.
안 그래도 긴장해 있던 일본 선수들은 한국 팀 유니폼을 바라보았다.
작년에 봤을 때만 해도 꽤 세련된 디자인이라 여겼는데, 오늘 입고 나온 것은 또 달랐다.
옆구리나 백넘버가 있는 쪽은 망사로 되어 있었는데, 척 봐도 가볍고 통풍이 잘될 것 같아 보였다.
‘이놈들은 유니폼도 신경 써서 입는 건가.’
‘쳇, 거지 나라 주제에…….’
부러우면 지는 거다.
그런 생각에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둔하고 촌티 나는 자신들의 유니폼을 보자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がんばれ, 日本!”
“諦めないでね!”
잠시 후, 양 팀 선수들이 다시 필드로 나오자 관중들이 북을 치며 함성을 높였다.
한쪽에는 소수이긴 하지만,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하는 재일교포들도 있었다.
“이겨라, 대한민국!”
“축구왕 이준영 만세!”
양국의 국가가 울리고, 동전을 던져 진영을 정한 양 팀은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삐익-!
홍콩 출신의 프래틀렛 주심이 호각을 불면서, 일본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일본>
GK:호사카 츠카사
DF:스즈키 료조, 미야모토 마사카츠, 미치히로 오자와, 카마다 미즈오
MF:히라키 류조, 미야모토 테루키
FW:우치노 마사오, 야에가시 시게오, 나가누마 겐(주장), 와타나베 마사시
<대한민국>
GK:함흥철
DF:차태성, 김홍복, 박승옥, 차준만
MF:이준영, 김찬기
FW:조윤옥, 정순천, 최정민(주장), 유판순
한일 양 팀 모두 최신의 4-2-4 포메이션을 사용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일본이 수비 지향적인데 반해, 한국은 상당히 공격적이라는 것.
이미 1차전에서 패배한 점을 생각하면 일본이 더 공격적으로 나와야 했지만, 그리할 수 없었다.
선축으로 시작했음에도 한국 박스 근처에 가 보지도 못하고 공을 빼앗겼으니까.
‘선수비 후역습인가? 왜놈들이 과연 이준영이를 어떤 식으로 막으려나?’
이유형 감독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을 때, 일본 감독인 타카하시 히데토키가 버럭버럭 함성을 지르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기합! 기합이다! 기합으로 막는 거다!”
‘막을 방법이 딱히 없었나 보군.’
타카하시 감독의 애처로운 외침에 이유형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언제 골이 나올까 궁금하던 차에 이준영이 공을 잡았다.
“리준욘이다!”
“잡아! 포위하는 거다!”
수비수, 공격수 가리지 않고 일본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 벌 떼 같은 움직임은 마치 미래 네덜란드의 토털 사커를 연상시켰다.
‘비슷하긴 한데 실속은 없군.’
준영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중앙의 빈 공간으로 패스를 보냈다.
전진하며 패스를 받은 김찬기는 최정민에게 공을 전달했다.
페널티 박스에 있던 일본 수비수들은 곧장 밀착 마크에 나섰다.
최근에 이준영에게 가려졌지만, 최정민 역시 아시아의 황금발이라 불릴 정도의 특급 공격수니까.
하지만 최정민은 수비수들을 유인하며 공을 흘려 버렸고, 이것을 쇄도하던 정순천이 논스톱으로 골대에 때려 넣었다.
“나이스 골!”
“잘했다, 순천아!”
전반 4분, 정순천의 선제골.
한창 목청을 높이던 일본 관중들은 조용해졌고, 구석의 재일교포들은 쾌재를 불렀다.
“어휴, 내 저럴 줄 알았지.”
관중석에 있던 오카노 슈니치로는 고개를 떨군 일본 선수들을 보며 혀를 찼다.
그는 이번에 서독에서 돌아와 리준욘에 대한 정보들, 풋볼 리그와 유러피언 컵에서 상대 팀들이 그를 어떻게 막았는지 모은 자료들을 대표팀에 전달했다.
그런데 그 자료들을 제대로 보기나 한 건지, 우르르 몰려가더니만 아주 멍청하게 실점을 했다.
“분명 리준욘은 월드 클래스 선수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는데…….”
자신이 감독이었다면 3-5-2 포메이션으로 수비를 단단하게 굳힌 다음, 리준욘은 한두 명에게 번갈아 밀착 마크하도록 지시했을 것이다.
그리고 중원을 두껍게 하면서 상대가 패스할 길목을 끊어 내면 보다 효율적으로 막아 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일본 대표팀은 리준욘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다른 한국 선수들은 그냥 방치하고 있었다.
“앗! 저길 그냥 두면 안 되지! 빨리 가서 막으라고!”
오카노가 생각에 잠긴 사이, 다시 공이 한국으로 넘어가 공격이 전개되었다.
패스를 받은 준영은 충분히 일본 선수들을 유인한 후, 잽싸게 측면으로 공을 보냈다.
그가 공을 끌지 않고 바로 보내는 바람에 일본 선수들은 대놓고 거칠게 파울을 할 틈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지나칠 때 발을 걸거나 침을 뱉는 정도.
하지만 준영은 그 정도 도발에는 걸려들지 않았다.
“조센징 놈들, 패스가 무척 빠르군.”
“패스도 그렇지만, 굉장히 활발하게 움직이는… 어어! 위험하다고!”
조윤옥이 옆으로 슬쩍 건네준 공이 오버래핑을 하던 차태성에게 깔끔하게 전달되었다.
수비를 제치며 과감하게 박스 안으로 들어간 차태성은 조윤옥 쪽으로 숏백을 보냈다.
공을 잡은 조윤옥이 드래그 백으로 스즈키 료조를 제치고 슈팅을 날렸다.
황급히 몸을 날린 호사카 골키퍼가 펀칭으로 가까스로 슛을 막아 냈다.
하지만 안도할 틈도 없이 유판순이 달려들며 공을 골대로 밀어 넣었다.
“아, 벌써 0 대 2…….”
“아직 전반 10분밖에 안 됐다고!”
“이 등신 같은 것들이! 제대로 안 할 거냐!”
관중석 여기저기에서 한탄과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아무리 한국이 일본보다 축구를 더 잘한다고 하지만, 대놓고 열도 침몰 운운하며 조롱하는 상대에게 무기력하게 당해서야 쓰겠는가.
‘이대로 가다간 진짜 일본 축구는 침몰이다.’
‘지더라도 더 이상 골은 주지 말이야…….’
2점 차가 되자, 일본 페널티 박스에는 6명의 선수들이 진을 쳤다.
여기에 플레이도 훨씬 더 거칠어졌다.
준영뿐만 아니라 다른 한국 선수들에게도 거침없이 발바닥을 들어 올리고, 손으로 잡거나 팔로 치곤 했다.
심판은 홈팀인 일본을 동정하는지, 이런 파울을 대체로 묵인해 주었다.
하지만 봐주는 것도 한도가 있는 법이다.
삐익-!
히라키 류조가 박스 근처까지 돌진해 왔던 차태성의 하의를 잡아챘다.
그 바람에 차태성의 엉덩이가 홀랑 드러나 버렸고, 관중석에서는 순간 ‘와!’ 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야 이 쪽바리 새끼야! 넌 오늘 뒤졌어!”
“참아라, 태성아! 참아!”
최정민과 준영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며 펄펄 뛰는 차태성을 만류했다.
괜히 여기서 난투극으로 갔다간 경기 흐름이 엉뚱하게 흘러갈 수 있으니까.
“아우님, 프리킥 잘 차라고. 태성이의 희생을 잊어선 안 돼.”
“풉, 알겠습니다.”
피식 웃음을 지은 준영은 공 앞에 섰다.
“우우우-!”
“消えろ! くそ, 朝鮮人!”
준영의 집중력을 흩뜨려 놓으려는 속셈인지 관중석에서 야유와 욕설이 쏟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골대를 응시하던 준영은 달려들며 강슛을 날렸다.
뻐어- 엉!
묵직한 소음과 함께 무회전으로 날아간 슈팅이 수비벽을 스치며 골대에 꽂혔다.
바로 머리 위로 지나갔지만, 호사카 골키퍼는 전혀 반응하지도 못했다.
“아…….”
소문으로 들었던 엄청난 중거리 슛.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말문이 막힌 일본 관중들 앞으로 준영이 유유히 산책 세리머니를 펼쳤다.
나가누마 겐은 부들부들 떨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빌어먹을……!”
전반 21분, 스코어는 0 대 3.
팀이 무너지고, 일본 축구가 침몰하고 있었지만, 아직 슛도 날리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
도쿄의 메이지 신궁 외원 경기장은 1925년에 완공되어 일본 축구대표팀과 럭비대표팀의 홈경기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58년 아시안게임을 위해 개축되었고, 1991년에 다시 한번 보수되었지요.
그러다 2020 도쿄 올림픽 주 경기장으로 재건축되면서 철거되었습니다.
참고로 1997년 도쿄 대첩으로 유명한 경기도 여기서 치러졌지요.
일본 축구대표팀 입장에서는 터가 별로 안 좋아서 그런지, 현재는 사이타마 스타디움을 국대 홈으로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