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34. 우리는 세계로 나간다
창덕궁 낙선재.
증조부 이 씨를 따라 이곳에 온 준영은 순정효황후 윤씨를 만났다.
정중히 큰절을 올리는 준영을 바라보던 늙은 황후가 말했다.
“너무 어렵게 대할 필요 없으니 편히 앉으시게.”
“감사합니다.”
“고맙다는 인사는 이 늙은이가 해야지. 한창 바쁜 사람을 부르지 않았나.”
꼬박꼬박 신문을 보고 라디오를 들으며 지내던 황후는 준영이 현재 한국에서 얼마나 바쁜지 잘 알았다.
대학과 고교 선수들 지도에 자선 행사에도 참여했으며, 국내 기업인들과 사업 문제로 만나기도 했다.
최근에는 대표팀에 합류하여 도쿄에서 열리는 월드컵 최종 예선에 대비하고 있기도 했다.
“이 늙은이가 듣자니, 그대는 영국에서 조선의 왕족으로 대접받는다던데?”
“그게… 집안 내력에 대해 이야기했던 걸 현지인들이 부풀린 겁니다.”
딱히 악용하진 않았지만, 그 내력이 도움은 되었다.
사교 모임에서 지역 명사들이나 유산가들의 호기심을 일으켜 친분을 쌓을 수 있었으니까.
“그대의 집안도 광평대군 가계이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내 그걸 꾸짖으려고 하는 건 아닐세.”
실제로 구황실 사람들 일부는 이를 항의하고 꾸짖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루머에 낚여서 준영이 가진(?) 고종 황제의 금괴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물론 황후는 그런 헛소리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미 이 소사에게도 들었겠지만, 이 늙은이가 그대를 만나고자 한 까닭은 한 가지 청이 있기 때문일세.”
“혹시 일본에 있는 영친왕 전하나 덕혜옹주 때문입니까?”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이은.
준영이 따로 알아보니 그는 뇌일혈로 쓰러진 후 일본의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였다.
영화로 유명해진 덕혜옹주 역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들었고.
곧 있으면 자신도 일본에 갈 일도 있으니 황후가 그들의 귀국에 대해서 부탁하려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 영친왕과 옹주의 치료나 귀국 문제는 대통령이 알아봐 준다고 하였네.”
“그럼 어떤 일로……?”
“사동궁 때문에 부른 걸세. 의친왕의 10남이지.”
사동궁 이석은 작년에 외대에 입학해서 스페인어를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문제는 생계가 힘들어 학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학자금 지원을 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거저 요청할 마음은 없네. 그대의 장학 재단에서 우수 학생을 선별해서 학자금과 유학을 지원한다고 들었네. 그러니 사동궁에게도 한번 기회를 주지 않겠나?”
소위 말하는 ‘내놔.’가 아니라, 장학생 선발에 참여할 기회를 달라는 정도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사실 황후가 ‘내놔.’라고 했어도 준영은 기꺼이 주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할아버지를 구해 준 은인이 아닌가.
덕분에 자신도 소멸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알겠습니다. 재단에는 제가 연락해 두겠습니다.”
“고맙네.”
이후로도 황후와 얼마간 이야기를 더 나누고 물러난 준영은 구황실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오재경 사무국장을 만났다.
오 사무국장은 준영이 건넨 수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렇게나 많이…….”
“황후마마께서 지내시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준영 선수.”
젊었을 때 옥새를 지키려 했을 때도, 몰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것도, 그리고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들을 지켜 준 일도.
황후는 항상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행동했다.
준영은 그런 그녀가 편안하게 노후를 보낼 수 있기를 바랐다.
***
“때려! 슛-!”
“으아, 아깝다!”
환호성과 탄성이 오가는 동대문 운동장.
지금 이곳에선 한국과 중화민국의 친선전이 치러지고 있었다.
국공 내전에서 패하고 대만으로 밀려난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은 국민 통합의 목적으로 정책적으로 축구를 권장했다.
그런 국가적인 지원 덕분에 이 시기 중화민국은 아시아 축구 강호로 꼽히고 있었다.
1954년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에서도 한국을 5-2로 대파한 적이 있었을 정도.
하지만 현재 양 팀의 전력은 서서히 벌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전반전에만 2 대 0으로 한국이 리드하고 있었고, 볼 점유율 역시 눈에 띌 정도로 차이가 났다.
“이거야 원! 아무리 한국의 홈경기라지만…….”
중화민국 대표팀 감독 리후이탕은 찌푸려진 미간을 펴지 못했다.
특히 겨우 만들어 낸 역습 찬스도 흐지부지 날려 먹는 모습에 길게 한숨을 토했다.
“어이구, 내가 10년만 젊었더라도!”
현역 시절 통산 1,260골을 넣은 홍콩의 축구왕 리후이탕.
그는 제자들의 답답한 플레이에 연방 가슴을 치는 와중에도 한국 선수들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공수 가릴 것 없이 많이 뛰고, 수비에서부터 공격을 차근차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뛰어나군.’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체력과 스피드.
단지 육체적으로 향상된 게 아니라, 자신감이 강해지고 판단력이 빨라진 것 같았다.
‘최근에 한국 축구인들이 유럽 축구, 특히 영국 축구를 많이 배우고 있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김용식 같은 유명인도 영국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다 들었고, 영국에서 활동하는 선수들도 있었다.
중화민국과 홍콩 축구인들 역시 이에 자극을 받아 유럽 무대를 두들겼지만, 한국과 달리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성과를 낼 수 있게 견인해 주는 조력자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그런 인물이 있지.’
후반전이 시작되자 문제의 그 인물이 교체 출전했다.
태극기가 박힌 붉은 유니폼을 입은 장신의 선수가 등장하자, 관중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일어났다.
“이준영이다!”
“드디어 국가대표 이준영을 보는구나!”
준영은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관중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필드로 들어갔다.
리후이탕 감독은 그런 준영을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도대체 저놈은 정체가 뭐지?’
영국 언론을 보면 이준영은 한국계 홍콩 시민으로, 국공 내전 기간에 홍콩에 흘러들어 와 축구를 배운 것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하지만 리후이탕은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대륙에서 망명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하지만 저렇게 키가 크고 발재간이 뛰어난 선수에 대해서 아무런 소문이 없었다고?
일반인들이야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축구왕 소리를 들을 정도로 홍콩 축구계에 영향력을 가진 자신이 저 정도 기량을 가진 유망주를 못 들을 리 없었다.
실제 홍콩 축구인들도 이준영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아니, 어쩌면 중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따돌렸을지 몰라. 실제로 존 Y. 리 본인은 영국인 신부에게서 축구를 배웠다고 했고.’
그게 사실이라면 홍콩, 아니 중국 축구계는 정말 뼈아픈 실수를 한 게 된다.
발밑에 있던 돌이 보석인 줄도 모르고 지나친 셈이니까.
“슛-! 고오오오올!”
“우와, 시작하자마자 꽂아 버리네!”
순식간에 공을 치고 들어간 준영이 강력한 중거리 슛을 터트리자, 관중석은 또다시 크게 들썩였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5분 후, 측면에서 차태성이 올려 준 크로스를 박스로 뛰어들며 그대로 헤딩골로 터트렸다.
수비수 궈진훙과 루바오가 동시에 경합했지만, 볼링 핀처럼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하… 역시나 수준 차이가 엄청나군.’
아시아에서는 저 거인을 막을 선수가 없다.
이런 판단을 내린 리후이탕은 씁쓸한 눈길로 이준영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손에 넣었을지 모르는 보석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쓰렸다.
***
준영은 후반 20분에도 멋진 돌파로 또 한 골을 추가하며 국가대표 데뷔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대한민국 대표팀은 중화민국에 6 대 0의 대승을 거두었다.
당연히 경기가 끝나고 준영에게 기자들의 인터뷰가 쇄도했다.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른 기분이 어떻습니까?”
“매우 뿌듯했습니다. 마치 먼 여행을 떠났다가 고향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라고 할까요.”
21세기에 있을 때,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데뷔전을 치렀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느꼈던 뿌듯한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어 정말 좋았다.
“첫 경기임에도 대표팀 선수들과 호흡도 상당히 잘 맞더군요. 특별한 비결이 있었습니까?”
“뭐, 특별하다고 할 건 없고, 대표팀이 영국에 왔을 때 같이 훈련한 덕분일 겁니다.”
거기다 대표팀은 김용식을 통해 맨유의 전술을 도입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대표팀 선수들 역시 맨유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고 익히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렇다 보니 준영은 큰 마찰 없이 대표팀에 스며들 수 있었다.
“내일 오전에 출국해서 11일 일본전을 치를 텐데, 어떤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실 겁니까?”
“그거야 다들 잘 아실 거 아닙니까.”
“그럼 오늘 경기처럼 박살을 내 놓겠다는 말씀이군요.”
기대 어린 표정을 짓는 기자의 말에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취재진 앞에서 준영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열도 침몰.”
박살이 아니라 완전히 바다 밑으로 침몰시키겠다.
상대에게 그 정도 쇼크를 안겨 주겠다는 게 준영의 목표였다.
“열도 침몰이라니. 저 녀석, 진짜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는군.”
“왜놈들이 들으면 오싹하겠는데요?”
“그러게나 말이다. 곧 이준영이라는 핵폭탄이 떨어질 테니…….”
주변에서 인터뷰를 듣고 있던 대표팀 선수들은 혀를 내둘렀다.
아무도 준영의 말을 농담이나 허풍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늘 경기만 봐도 충분히 저지르고도 남을 녀석이니까.
“후후후, 열도 침몰이라……. 좋구만. 출전 구호로 딱 좋아.”
이유형 감독은 상당히 맘에 드는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이참에 일본을 밟아 놓자고 생각하고 있었고, 전임 감독이 해내지 못한 이준영의 발탁을 반드시 이뤄 내리라 마음먹었던 참이다.
그런데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오다 못해 아주 큼지막하게 여물었다.
‘열도 침몰이라……. 요즘 같은 시국에 딱 맞는 말이구만.’
‘암, 반성도 안 하고 헛소리를 하는 놈들은 가루가 될 때까지 두들겨 줘야지.’
다들 어린 시절 혹은 젊을 때 일제의 핍박을 경험했다 보니, 준영의 말에 상당한 기대감을 품었다.
그때 외국인 기자 한 명이 손을 들고 준영에게 질문을 건넸다.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의 조나단 양입니다. 리 선수는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월드컵에 나갔다가 이번에 한국 대표팀을 선택했는데, 후회는 없으십니까?”
“네, 없습니다.”
준영이 딱 잘라서 말하자, 홍콩 출신의 외신 기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다 다시 물음을 건넸다.
“FIFA에서 앞으로 선수들의 국적 변경을 금지할 거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리되면 월드컵에 나갈 수 없을 텐데, 그래도 후회가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 월드컵에 나가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거죠?”
“아시아 예선을 통과해도 유럽과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하니까요.”
기자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현재 아시아에 배당된 본선 티켓은 0.5장이니까.
준영이 Hell급 난이도라고 봤던 것도 이 때문.
하지만 영 가망이 없다고 봤다면 애초에 이 게임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플레이오프든 뭐든 까 봐야 아는 겁니다. 공은 둥글고, 어느 쪽으로든 굴러갈 수 있으니까.”
그리 말한 준영은 모든 기자들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똑똑히 지켜보십시오. 우린 세계로 나갈 겁니다.”
***
리후이탕은 현역 시절 1,260골을 넣었다고 하기도 하고, 1,800골을 넘게 넣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정확한 기록은 모릅니다.
아무튼 1965년에 FIFA 부회장까지 맡은 적이 있고, 대만 축구의 전설과도 같은 인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가 지도자 생활을 할 때, 장제스는 일본의 식민지 시절 흔적을 대만에서 지운다고 야구를 홀대하고 축구를 정책적으로 육성했습니다. 야구장을 허물고 그 자리에 축구장을 지어 버릴 정도로.
하지만 아무리 높으신 분이 축구를 권장해도 국민들은 야구를 훨씬 더 좋아했고, 결국 대만 축구는 쇠퇴해서 아시아에서도 동네북으로 전락하고 말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