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33화 (333/400)

Round 333. 열쇠

김홍일 대통령을 만나고 나온 준영은 저녁에 친지들과 한자리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하하,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그렇다니까. 거 황당하기 짝이 없었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가운데 준영의 종숙, 실제론 증조부인 이 씨가 문득 생각난 게 있다는 듯 말을 건네 왔다.

“준영아, 11일에 도쿄에 가서 월드컵 예선 경기를 할 거라고 했지? 혹시 그 전에, 그러니까 한 3~4일 전쯤에 잠시 시간을 내 줄 수 있냐?”

“멀리 이동하는 거 아니면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이죠?”

“그게, 널 잠시 봤으면 하는 분이 있어서 말이다. 내가 예전에 모셨던 분인데, 강윤이 이놈의 은인이기도 해.”

할아버지의 은인이라니 누군지 궁금해졌다. 이에 준영은 바로 누군지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그분은 황후마마시다.”

“예?”

“순종 황제 알지? 우리나라 마지막 임금님 말이야. 그분의 반려 되시는 분이시다.”

“아, 그분 말이군요!”

2년 전에 창덕궁에서 잠시 마주친 일이 있었다.

황후라는 게 믿어질 정도로 품위 있는 노부인이었는데, 할아버지의 은인이었다니!

“강윤이 이놈이 작년에 데모하다 절간으로 도망을 쳤거든. 그때 학생들 잡겠다고 들이닥친 경찰들을 꾸짖어서 쫓아낸 분이 황후마마이셨다고 하는구나.”

“대단한 일을 하셨군요.”

실제 그 일이 알려지면서 구황실에 대한 이미지가 나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김홍일 대통령의 호의로 다시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이 박사 시절에 참 고생을 많이 하셨지. 국유 재산이란 이유로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셨으니 말이야.”

이 씨의 말에 이억관이 약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난 이 박사 심정도 좀 이해는 되던데요. 윤비마마는 몰라도, 구황실 사람들이 딱히 잘한 것도 없지 않습니까. 황태자란 사람도 일본에 귀화해 버렸고.”

“그건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누군들 사정이 없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황태자였던 사람이 조국을 멸망시킨 나라의 국적을 얻다니…….”

혀를 차던 이억관이 준영을 보며 말했다.

“윤비마마가 무슨 일로 자넬 보자는 건진 모르겠지만, 혹시 무리한 부탁을 하거든 거절해. 잘못하다간 자네 평판만 나빠져.”

“예, 주의하겠습니다.”

준영은 이억관의 충고를 귀담아들었다.

이 시대에 레전드로 남기 위해서는 이미지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

다음 날, 준영은 동대문 운동장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그에게 한 수 지도를 받고자 하는 대학과 고교의 선수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100명, 아니 200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군요.”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공 좀 찬다는 친구들이 죄다 몰려왔으니까.”

준영의 말에 대답한 김화집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친구들이 전부는 아니야. 오늘 못 온 친구들은 내일하고 모레 또 올 거니까.”

“그렇군요. 근데 저쪽의 여자애들은…….”

“아, 행당동의 무학여중 학생들일세. 내가 지도하고 있지.”

10여 명의 이 어린 여학생들은 가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여자 축구 선수들이었다.

“여자 축구라……. 힘들지만 값진 도전을 하고 있군요. 포기하지 말고 힘내요.”

“고맙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준영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학생들을 격려하며 지도를 시작했다.

현재 유럽 축구의 동향과 추세 등을 섞어 강연도 해 주었고, 각 포지션의 전술 수행, 보다 효율적으로 공을 다루고 움직이는 방법 등도 알려 주었다.

당연히 말뿐만 아니라, 공을 가지고 직접 시현도 하면서 선수들을 훈련시켰다.

그러는 과정에서 꽤 인상적인 선수도 있었다.

“저 학생이랑 저쪽에 있는 고교생이 제법 공을 다룰 줄 아는군요.”

“어디 보자… 저 친구는 한양공고의 김청남이야. 원래 공격수 출신인데, 현재는 하프백과 스위퍼도 맡아 한다더군.”

김청남.

21세기 한국의 원로 축구인으로,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 대한민국 대표팀을 지휘했다.

준영도 그와 조금 안면이 있었다.

북미 월드컵에 출정하기 전에 그가 대표팀 선수들을 격려하러 온 적이 있었기 때문.

‘어르신, 참 풋풋하시군요.’

내심 미소를 지은 준영은 또 한 명 눈여겨본 선수에게 다가갔다.

발재간도 좋고, 강인한 인상 또한 낯익은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은 어디에서 왔죠?”

준영의 물음에 지목된 학생은 흥분한 나머지 목소리를 높였다.

“부산서 왔습니더! 동래고에서 뛰는 김효라고 합니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김효는 60~70년대 김청남과 콤비를 이루었던 뛰어난 수비수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 대표팀 감독을 맡은 적도 있고, 당시 신흥 구단인 수원을 K리그 챔피언으로 올려놓는 등 지도자로서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지가 축구하게 된 것도 이준영 선수 때문입니더. 이 선수의 활약을 보고 내도 함 세계를 주름잡아 보자 생각했다 아입니꺼.”

김효는 침을 튀기며 원래는 육상 선수였다는 둥, 준영과 같은 수비수로 뛰고 있다는 둥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

준영은 그가 투머치토커로서 재능을 싹틔우기 전에 어깨를 도닥이며 격려해 주었다.

“그래, 열심히 하세요. 꾸준히 실력을 쌓고 열정을 불태우면 반드시 뜻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고맙심더! 반드시 성공할 끼니께 지켜봐 주이소.”

그렇게 김효를 뒤로한 준영은 다른 선수들에게도 지도와 격려를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소란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그러니까 안 된다니까!”

“나도 오늘 여기 오기로 되어 있었다니까요!”

“명단에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럴 리 없어요. 분명히 명단에 올려 줬다고 했다고요!”

한쪽에서 계속되는 실랑이에 준영은 협회 직원을 불러다 무슨 일인지 물었다.

“별일 아닙니다. 웬 애송이가 자꾸 생떼를 부리면서 이준영 선수를 만나겠다고 해서 말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생떼를 부리지 않을 텐데… 이봐! 왜 애를 때리고 그래!”

실랑이 과정에서 경비원이 손찌검하는 광경을 본 준영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일단 자초지종을 들어 보자는 마음에 문제의 애송이를 불러들였다.

코피가 터진 소년은 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연방 씩씩댔다.

“젠장… 사람 말을 듣지도 않고…….”

“진정해.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

준영의 물음에 소년은 금방 얌전해졌다.

동경하던 스포츠 스타가 자신을 바라봐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이번에 이준영 선수가 선수들을 지도해 준다는 얘기를 듣고 상경했어요. 꼭 한번 가르침을 받고 싶었거든요.”

마침 서울에 사는 고향 선배가 이번에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리는 이벤트 참석 명단에 넣어 주겠다고 했다.

연줄이 있다는 그의 말을 믿은 소년은 힘들게 모아 둔 저금을 알선료로 지불했다고.

그런데 정작 당일에 찾아오니 명단에 없다면서 경비원들이 계속 쫓아내는 게 아닌가.

그 이야기를 들은 준영과 김화집 등 축구인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사기당했구나.”

“서울 와서 코 베였네.”

“몹쓸 놈이구만. 애를, 그것도 고향 후배를 등쳐 먹다니.”

주변에서 쑥덕이는 소리에 소년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분통한 눈물을 흘렸다.

“뚝! 사나이는 쉽게 우는 게 아니야. 사정이 딱하니 특별히 명단에 넣어 줄게. 근데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다시 찾아오도록 해.”

“저, 정말 고맙습니다.”

꾸벅 허리를 굽힌 소년은 얌전히 물러났다.

“기다려. 그냥 가면 어떡하냐? 이름은 적고 가야지.”

“아차, 그렇죠.”

소년은 머쓱해하며 내일분 명단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 이름을 본 준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희택?’

일전에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던 아시아의 표범.

한국 축구의 레전드 스트라이커로 이름을 날렸던 천재가 눈앞에 있었다.

***

준영은 이희택에 대해 따로 조사해 보았다.

사실 조사라기보다 신문에 가까웠다. 그가 머물고 있다는 서울 친척 집에 협회 직원을 보내 이것저것 물어본 것이니까.

“김포 출신인데, 발재간이 좋아서 김포 일대에선 꽤 유명하다더군요.”

“흠, 과연…….”

“서너 살 위의 고교생들보다 실력이 훨씬 나을 정도라고 하더군요. 정식으로 축구를 한 건 1년도 안 되지만, 발재간도 상당하다고 하고요.”

이 말을 들은 준영은 이희택이 왔을 때, 그의 움직임이나 기술을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저게 초짜라고? 말도 안 돼!’

볼 컨트롤이나 플레이 센스는 어지간한 고교 선수들보다 나을 정도였다.

더구나 준영이 가르쳐 주는 것도 금방 습득해서, 다양하게 활용할 줄 알았다.

특히 룰렛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환해 내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완전 먼치킨이잖아,’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진짜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 같은 능력을 갖고 있었다.

괜히 천재라고 후대에 명성을 날린 게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체조를 했다고 했지?’

체조는 가장 기초적인 스포츠로 근력과 지구력, 유연성과 민첩성, 밸런스를 두루 갖춰야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미적 표현을 위해서는 즉흥으로 동작을 만들어 내는 창의력도 필요로 한다.

그렇다 보니 준영은 이희택이 저만한 실력을 보이는 이유가 체조 선수로서의 재능도 뛰어나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 선생님이 체조하라고 권유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준영 선수, 저 녀석에게 너무 관심을 보이진 마십시오.”

축구협회 직원의 말에 준영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화집이나 다른 축구인들, 그리고 필드에 있는 선수들도 다 이희택에게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조사하면서 알았는데, 저 녀석 애비가 월북자입니다. 빨갱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다 보니, 모친도 어린 아들을 두고 재가해 버렸다고.

그래서 이희택은 지금 할머니와 살고 있다고 했다.

“하나를 보면 둘을 알 수 있다고, 애비가 빨갱이면…….”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릴 하고 있습니까.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입니까? 연좌제를 따지게.”

준영의 냉담한 반응에 협회 직원은 당혹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사회적인 시선이라는 걸 무시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런 시선이 잘못된 거죠. 그런 식이면 가장이 지주라고 그 집 식구들까지 죽이고 핍박하던 빨갱이들이랑 뭐가 달라요? 개가 물었다고 해서 똑같이 개처럼 물어서야 되겠습니까?”

그 반박에 직원도 더 할 말이 없어졌던지 합죽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 그를 두고 준영은 계속 이희택에게 눈길을 주었다.

단지 그의 재능 때문이 아니라, 가정환경에 대해서 들으니 연민이 느껴졌기에.

‘선수로 유명하다고 들었지, 그런 과거가 있을 줄은 몰랐군.’

단지 연민만이 아니다.

할머니 밑에서 자라난 이희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터너 신부님을 할아버지처럼 따르며 지냈던 자신의 어린 시절도 떠올랐다.

‘입장이 비슷하다면 의지도 비슷하겠지. 반드시 축구 선수로 성공하겠다는……!’

재능은 역대급.

하지만 그 정도론 아시아의 표범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세계를 호령하긴 힘들 것이다.

‘그 재능을 만개하게 하려면 여건이 필요하고 경험을 쌓게 만들어 줘야 하겠지.’

이희택을 바라보며 준영은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대한민국의 월드컵 도전.

어쩌면 이희택은 Hell급 난이도를 풀어 갈 열쇠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

현역 시절 김호 감독과 김정남 회장님의 모습입니다.

보시다시피 두 분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얼굴도 어디 안 지는 수준입니다.

이회택 옹은 현역 시절에 분데스리가 등에서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당시에는 유럽 축구에서 뛰는 게 얼마나 대단한 기회인지 몰랐기에 거절했다고 합니다.

뭐, 이건 이회택 옹만 그랬던 게 아니라 인도 축구의 전설 추니 고스와미도 그랬습니다. 토트넘의 정식 영입 제안을 거절했으니까요.

당시에 유럽에서 뛰는 아시아 선수가 있고, 그만큼 유럽 축구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으면 달랐을 텐데 아쉬운 일이지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