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30. 신성한 괴물
‘그렇게나 자신 있는 거냐.’
제르마누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준영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자신도 몸싸움이나 발재간엔 자신이 있었기에 종종 공격에 가담하러 전방으로 올라가곤 했다.
하지만 이 동양인은 단지 가담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해결할 기세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건방진 놈… 이라고 우습게 봐선 안 되겠지.’
존 Y. 리의 공격력은 유명했다.
장신을 이용한 헤딩슛과 강력한 중거리 슛, 웬만한 공격수들보다 뛰어난 드리블 능력.
듣자니 영국 풋볼 리그에서 직접 수십 미터를 드리블해서 유유히 상대 골문을 가른 적도 있다고 들었다.
‘패스는… 하지 않겠군.’
제르마누는 힐끔 좌우를 돌아보며 맨유 공격수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빈 공간으로 파고들긴 했지만, 굳이 그들에게 공을 줄 것 같지 않았다.
‘아마 날 제치고 골을 넣고 싶어 하겠지.’
자신이 존 Y. 리의 입장이래도 그리했을 것 같았다.
경기 중에 피를 보게 만든 상대에게 한 방 제대로 먹여 주고 싶을 테니까.
‘그래, 어디 와 보라고!’
돌파할 자신이 있다고 덤벼들면, 이쪽은 저지해 줄 뿐.
제르마누는 바로 준영의 앞을 막아섰다.
과연 어떤 재주를 부릴 것인가?
영상으로 보았던 헛다리 짚기일까, 아니면 발바닥으로 공을 굴리며 재빨리 방향 전환을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퉁-!
속도를 죽이지 않고 달려온 준영이 공 밑동을 살짝 걷어찼다.
그러자 둥실 떠올랐던 공은 제르마누의 머리 위를 훌쩍 넘어갔다.
그리고 준영은 잽싸게 제르마누의 옆을 스치며 빠져나갔다.
‘이런! 스피드로 제칠 속셈이었나?’
화려한 발재간 대신 한 박자, 아니 반 박자 더 빠른 간결한 움직임.
제르마누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잘 알기에, 그는 쫓아가는 대신 손을 뻗어 준영의 팔을 잡아챘다.
그 바람에 막 슈팅을 날리려던 준영의 자세가 무너졌다.
“반칙이다!”
준영의 슛이 크게 빗나가는 것과 동시에 심판이 휘슬을 불었다.
제르마누는 순순히 자신의 파울을 인정했다.
약간 위험한 위치이긴 했지만, 그래도 페널티킥이 아닌 게 어디인가.
‘쳇, 일부러 손을 쓰다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준영은 딱히 분통을 터트리거나 하진 않았다.
자신이 제르마누래도 그렇게 막았을 테니까.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을 얻어 낸 유나이티드. 빅 던과 캡린 리가 공을 앞에 두고 상의를 하고 있군요. 과연 누가 차게 될지?」
둘 다 킥 능력은 월드 클래스 수준.
그렇다 보니 수비벽을 쌓은 벤피카 선수들은 바싹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던, 플랜 S로 가자.”
“플랜 E나 L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알았어. S로 가자고.”
공을 앞에 두고 준영이 뒤로 물러섰다.
자근자근 발을 구르며 슈팅 준비를 하던 그가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이다!’
수비벽 사이에 있던 제르마누는 곧장 몸을 날렸다.
프리킥을 육탄으로 막으려 했던 것.
그러나 준영은 슛을 하지 않고 지나쳤고, 공 옆에 대기하고 있던 던컨이 박스로 침투하는 알베르토에게 가볍게 공을 띄워 올렸다.
플랜 S라는 말이 나왔을 때 준비하고 있었던 알베르토는 헤딩슛으로 시원하게 벤피카의 골망을 흔들었다.
“나이스 알베르토!”
“역시 마법의 머리!”
함박웃음을 짓는 알베르토에게 다가간 준영과 맨유 선수들은 얼싸안으며 선제골의 기쁨을 나누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제르마누의 얼굴이 벌겋게 구겨졌다.
‘제기랄, 완전히 속았어!’
분명 이준영이 슈팅을 하리라 생각했건만.
그를 너무 지나치게 신경을 쓴 게 화근이 되고 말았다.
‘한 방 제대로 먹었군. 하지만 K.O 당하는 건 네놈들이 될 거다.’
반드시 경기를 뒤집어 주리라.
제르마누의 투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
맨유의 선제골이 터지자, 벨라 구트만 감독의 표정이 굳어졌다.
먼저 수비를 튼튼히 하고, 상대 수비수들의 공격 가담을 유도하여 그 뒷공간을 파고들어 득점을 만든다.
이것이 오늘 그가 전반전에 내놓은 작전이었다.
실제 이 작전은 토트넘이 FA컵에서 맨유를 상대로 써서 성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실점을 하고 말았으니, 이제 작전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이런 상황에도 대비해 놓은 게 있으니까.’
구트만이 사인을 보내자, 미드필드에 있던 마리우 콜루나가 전진하고 그 뒤를 페르난도 크루즈가 받쳤다.
패스가 뛰어난 마리우 콜루나가 본격적으로 공격에 나서자, 벤피카의 공세도 훨씬 매서워졌다.
‘마치 미들급 복서가 헤비급으로 증량을 한 것 같군.’
시야가 넓은 마리우 콜루나는 짧은 패스와 긴 패스를 적재적소에 사용했다.
그러자 아우구스투, 클러프, 아구아스, 산타나 4인방의 움직임도 사뭇 달라졌다.
그들은 마치 콜루나가 언제, 어떻게 자신들에게 공을 건넬지 알고 있는 것처럼 과감하게 침투와 돌파를 시도했다.
‘진짜 날카롭군. 사전에 분석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어.’
콜루나의 패스와 연계된 상대 공격수들의 움직임.
준영과 맨유 선수들은 이 패턴을 파악해서 상대 공격에 적절히 대처하고 있었다.
그러자 콜루나가 공격 방식을 바꾸었다.
계속 패스를 공급하는 대신 과감하게 치고 들어온 것이다.
“흥, 어디 덤벼 봐라, 꼬맹이!”
노엘 캔트웰은 자신의 앞으로 달려오는 콜루나를 막아 세웠다.
분석 영상을 보면 콜루나는 패스가 뛰어나고 슈팅 능력도 상당했다.
드리블 능력도 수준급이었지만, 막아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훈련 때 캡틴이나 던컨, 알베르토에게 시달린 걸 생각하면 너 정도는 충분히…….’
그 정도 발재간에 속지 않는다.
그러니 몸싸움으로 얼마든지 밀어낼 수 있다.
그리 확신하고 어깨로 밀어붙이던 노엘은 콜루나에게 밀려 나동그라졌다.
‘저런……!’
준영은 황급히 콜루나에게 마크를 붙었다.
그러나 콜루나는 자신보다 훨씬 큰 준영과의 몸싸움에도 밀리지 않고 슈팅을 날렸다.
거의 각이 없는 위치.
하지만 빠르고 날카로운 슈팅은 해리 그렉의 손을 스치고 골대 안에 박혔다.
「Gooo-ooal! 마리우 콜루나, 동점 골! 벤피카가 다시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벤피카 선수들의 환호를 받으며 미소 짓는 콜루나.
그를 보며 준영은 혀를 내둘렀다.
‘마치 볼링공 같았어.’
작지만 무겁고 단단했다.
분명 몸싸움에도 능하다는 정보가 있었지만, 체격이 월등한 자신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왜 신성한 괴물이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군.’
실제 역사에서 FC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라는 거함들을 침몰시킨 괴물.
잠자코 있던 그 괴물이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콜루나의 골로 동점을 만든 벤피카는 여세를 몰아 맨유 수비진을 흔들어 댔다.
콜루나의 크로스를 받은 아우구스투의 헤딩슛과 아구아스의 발리슛이 골대를 스쳐 지나갔고, 산타나의 돌파에 이은 클러프의 슈팅이 해리 그렉의 펀칭에 막혔다.
계속 수비가 흔들리자, 버스비 감독은 곧장 사인을 보내 던컨을 내려 수비를 보강했다.
그리고 콜루나에게는 바비 찰튼이 전담 마크로 붙었다.
‘콜루나의 발을 묶어 두시겠다? 하지만 그러면 유나이티드의 공격력이 무뎌질 텐데?’
이러한 구트만의 예상과 달리 맨유에는 중원에서 공격을 만들어 내는 인재가 또 있었다.
바로 짐 박스터.
기술이 좋고 효율적으로 공을 다룰 줄 아는 그는 벤피카의 공세 상황에서도 역습의 토대가 되는 패스를 만들어 냈다.
「빌리 맥닐이 헤딩으로 차단, 존 Y. 리가 전진하며 박스터에게 패스해 주고… 아, 잡지 않고 그대로 측면으로 달려가는 데니스 로에게 밀어 줍니다.」
박스터는 준영이 건네준 패스를 방향만 돌려놓아 역습 찬스를 만들었다.
그의 패스를 받은 데니스 로는 빠르게 측면을 내달리다 중앙에 있는 주제 토히스에게 크로스를 올려 주었다.
그런데 토히스가 가슴으로 공을 받기 무섭게 제르마누가 마크를 붙었다.
“날 상대로 돌아설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토히스?”
“쳇!”
터닝슛은 실패.
알베르토 쪽으로 패스를 보낼까 하던 토히스는 접근하는 짐 박스터에게 공을 보냈다.
두 번의 간결한 터치로 수비수를 뿌리친 박스터는 달려 나오는 골키퍼를 보며 로빙슛을 날렸다.
펄쩍 뛰어오른 페레이라 골키퍼의 손끝을 스친 공은 크로스바를 맞고 나왔다.
화들짝 놀랐던 벤피카 수비수 마리우 주앙이 황급히 공을 멀리 걷어 냈다.
“큭, 아깝군!”
“골대 맞히면 못 이긴다고 하던데…….”
“그런 건 미신이야!”
알렉스 퍼거슨과 조니 자일스 등, 오늘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맨유 선수들은 초조하게 경기를 지켜보았다.
박스터의 슛이 비록 무위로 끝났지만, 경기 흐름을 다시 맨유 쪽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레이 윌슨, 드로잉. 알베르토가 받아서 짐 박스터에게… 박스터, 다시 알베르토에게 넘겨줍니다. 찬스입니다!」
주고받는 멋진 삼각 패스로 벤피카 박스로 들어온 알베르토.
하지만 그는 벤피카 수비수 안젤로 마르틴스의 태클에 걸려 넘어졌다.
“페널티킥이다!”
맨유 선수들은 바로 파울을 지적했지만, 고트프리트 주심은 그대로 경기를 진행시켰다.
알베르토는 땅을 치며 항변했지만, 주심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젠장, 눈알을 어디 두고 다니는 건지!”
“공이 아니라 발목을 걸었던 태클이라고!”
맨유 선수들뿐만 아니라 경기장을 찾은 소수의 영국 관중들도 심판에게 야유를 보냈다.
몇몇 기자들은 자신들이 분명히 파울 장면을 찍었노라며 카메라를 가리키기도 했다.
하지만 주심은 상큼하게 무시해 버렸고, 잠시 후 전반전을 끝냈다.
“쳇! 분명히 페널티킥인데!”
“참아, 알베르토. 이미 지나간 건 어쩔 수 없어.”
준영은 원통해하는 알베르토를 다독이며 라커룸으로 돌아갔다.
아쉽긴 해도 이제 전반전은 잊고 후반전에 총력을 다해야 한다.
***
하프타임에 양 팀의 화두는 마리우 콜루나였다.
맨유의 버스비 감독은 ‘콜루나를 봉쇄할 방책’을 세웠고, 벤피카의 구트만 감독은 ‘콜루나를 좀 더 활용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분명히 패스 능력이 좋고, 발재간이나 피지컬도 뛰어나. 그러나 활동량 자체는 많지 않아. 번갈아서 전담 마크를 붙이면…….”
“유나이티드는 후반전에 콜루나를 묶으려 들 거다. 아우구스투는 측면에서, 카벰은 미드필드에서 활발히 움직이면서 상대 수비를 교란하도록.”
두 감독의 지시를 받은 선수들이 다시 필드로 나왔다.
전반과 달라진 맨유의 포메이션이 벤피카 선수들의 눈에 들어왔다.
“4-2-4로 바꾸었군.”
“좀 더 공격적으로 나올 셈인가?”
“모르지. 쟤들은 공격수도 수비를 열심히 하니까.”
벤피카의 포메이션은 전반과 동일했지만, 대신 선수들 위치에 변화가 있었다.
전반에 중원에서 경기를 조율했던 도미시아누 카벰이 오른쪽 측면 공격수로 이동하고 산타나가 미드필드 지역으로 내려왔다.
“만능 플레이어인 카벰을 공격에 활용하겠다는 건가. 벤피카도 후반전에 공격에 사활을 걸 모양이군.”
“당연히 골을 만들어야 우승을 할 테니까.”
과연 45분 후 우승컵의 주인은 누가 될까.
관중과 기자들이 긴장해서 지켜보는 가운데, 후반전 시작을 알리는 심판의 호각이 울렸다.
“가자. 죽기 살기로 뛰어!”
“우승컵이 바로 코앞에 있다!”
디펜딩 챔피언과 강력한 도전자.
우승이라는 고지를 두고 양 팀 선수들이 다시 격돌하기 시작했다.
***
마리우 콜루나는 에우제비우와 같은 모잠비크 출신입니다. 부친이 포르투갈인, 모친이 현지인인 점도 에우제비우와 같았죠.
1954년 20살의 나이에 프로에 데뷔, 첫 시즌에 26경기 16골을 넣으며 소속 팀 벤피카에 우승컵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당시 ‘남미에 디디(브라질)가 있다면 유럽엔 콜루나가 있다.’라고 할 정도였지요.
그의 정교한 패스는 에우제비우의 스피드와 주제 토히스의 높이를 제대로 활용하게 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가 없었다면 두 선수의 활약도 반감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얘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