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29화 (329/400)

Round 329. 벤피카의 도살자

“안녕하십니까. 김기복이라 합니다.”

깍듯이 허리를 숙이는 소년의 인사에 준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했다.

머릿속으로는 혹시 이 애가 이 시절에 이름을 날린 선수인가 생각해 보면서.

‘음, 들어 본 것 같기도……. 근데 김용식 선생님이나 최정민 형님같이 함자 한번 들어 봤을 정도로 유명하진 않은 것 같은데?’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한국에 있는 승리제화 법인에서 축구 용품을 지원해 주는 유망주 선수 명단을 보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있던 이름이었던 것.

“반가워요. 여기 윤옥이랑은 어떤 사이인지?”

“제 선배님입니다.”

“선배?”

“예, 전 조 선배님이 나온 동북중에서 공을 찼고, 얼마 전까지 동북고 축구부에 있었습니다.”

김기복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시안컵에서 선배 조윤옥의 활약을 보고 영국 유학을 생각하게 되었단다.

조윤옥이 그에 대해서 설명을 덧붙였다.

“제 은사이신 박병석 감독님께서 부탁하셨죠. 제가 좀 맡아서 지도해 달라고요.”

“그래서 수락한 거야?”

“예. 저도 형님 덕에 어느 정도 앞가림은 할 수 있게 되었고, 동생 한 명 데리고 지내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아서요.”

“기특하구나.”

준영은 대견한 눈길로 윤옥을 바라보았다.

만약에 자신이 윤옥의 입장이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겨우 2부 리그에 입성한 데다, 급료도 많다고 할 수 없는데 친동생도 아니고 후배를 데리고 산다니.

‘확실히 이 시대 한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다르군. 21세기에 태어난 나보다 훨씬 순박하다고 해야 하나?’

준영이 한국 쪽을 돕는 이유도 단순한 그리움이나 애국심 때문은 아니다.

일단은 한국 축구의 레전드로 이름을 남기겠다는 목표가 있고, 한국에 투자하면 득이 되기 때문이다.

‘나라도 빼앗겼고, 전쟁 때문에 다 같이 힘들고……. 그래서 서로 뭉치고 돕고 지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걸지도.’

준영은 그 순박함을 절대 비웃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그 순박한 사람들이 흘린 피땀 위에 태어났고, 지금은 그들의 성원을 받고 있으니까.

지난번 독극물 사건 때도 고국의 사람들이 다들 십시일반 해서 자신에게 성금을 보내 준 걸 보고 찡한 감동을 받기도 했다.

“김기복이라고 했지? 윤옥이 후배라니 나도 편하게 말을 놓을게. 괜찮지?”

“물론입니다.”

김기복은 마치 군기가 바싹 든 이등병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윤옥만 해도 국가대표에 영국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대단한 선배인데, 이준영은 그보다 훨씬 유명 인사였으니까.

“영어는 좀 할 줄 알고?”

“예, 넉 달 동안 기본적인 회화는 할 수 있게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래, 일단 말이 잘 통해야 해. 의사소통이 안 되는 상황에서 축구를 하긴 힘드니까.”

예전에 FA에서 선수의 영어 회화 능력을 강조한 까닭도 그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 규정이 풀렸지만, 그래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외국인 선수를 선호하고 있었다.

맨유 구단에서도 알베르토 스펜서나 주제 토히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전담 교사를 따로 붙였다.

알베르토의 경우는 부친이 자메이카 출신 영국인이라 금방 영어를 습득했다.

“그리고 타향이니까 심한 텃세는 각오해야 할 거다. 그걸 극복하는 방법은 네가 충분한 실력을 갖추는 것 외에는 없어.”

“명심하겠습니다.”

김기복은 고국에 있는 가족과 지인들을 떠올렸다.

자신의 결정을 끝내 수락해 준 부모님, 비행기 값으로 쓰라며 돈을 모아 준 학교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 등등.

그들을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하리라 마음먹었다.

“열심히 부딪쳐 봐. 정말 힘들면 나한테 연락하고.”

유명하진 않지만, 어떻게 자라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뀔 수 있으리라.

준영은 그 새싹이 잘 커 가는지 앞으로 지켜보기로 했다.

***

베른의 방크도르프 스타디움.

스위스 리그의 강호 BSC 영 보이스의 홈구장인 이곳에 낯선 유니폼의 선수들이 입장했다.

붉은 상의에 하얀 하의의 벤피카, 그리고 위아래 하얀 어웨이 키트를 걸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60-61 시즌 유러피언 컵 챔피언을 가리기 위한 시합이 곧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GK:코스타 페레이라

DF:마리우 주앙, 제르마누, 안젤로 마르틴스, 페르난도 크루즈

MF:도미시아누 카벰, 마리우 콜루나

FW:주제 아우구스투, 브라이언 클러프, 주제 아구아스(주장), 아킴 산타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GK:해리 그렉

DF:노엘 캔트웰, 이준영(주장), 빌리 맥닐

MF:던컨 에드워즈, 바비 찰튼, 데니스 로, 짐 박스터, 레이 윌슨

FW:알베르토 스펜서, 주제 토히스

출전 선수들을 살펴보던 기자들은 얄궂은 운명의 선수들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브라이언 클러프와 주제 토히스는 전 소속 팀의 골문을 노리게 되었군요.”

“이렇게 만날 거라 생각을 했을까? 과연 누가 옛 팀에 비수를 꽂으려나.”

기자들이 쑥덕이는 사이, 양 팀 선수들이 악수를 나누었다.

옛 동료들과 반가운 해후를 나눈 클러프는 특히 준영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날렸다.

“존, 너랑 함께 뛰었을 땐 정말 재미있었어. 하지만 오늘 널 이기면 더 재밌을 것 같아.”

“날 이길 수 있을진 모르지. 하지만 유나이티드를 쓰러트릴 순 없을걸.”

마지막에 누가 웃을지는 90분 후에 판가름 날 것이다.

잠시 후, 양 팀 선수들이 포진을 마치자 오늘 경기 주심으로 나온 고트프리트 심판이 경기 시작 휘슬을 불었다.

「결승전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아구아스가 카벰에게, 카벰, 다시 측면의 아킴 산타나에게 패스…….」

벤피카는 초반부터 활발하게 움직이며 득점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미드필드를 두껍게 한 맨유의 수비를 쉽사리 뚫지 못했다.

그렇다고 벤피카가 쉽게 공을 내준 건 아니었다.

‘역시 분석팀이 알려 준 대로 발재간이 좋군.’

‘스피드나 탄력은 스페인 놈들보다 빨라 보여. 아프리카 쪽 선수들의 특징인가?’

맨유 선수들도 성급하게 공을 뺏으려 들지 않았다.

파울은 상대에게 기회를 줄 뿐이니까.

그렇게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다, 마침내 벤피카 공격수들이 맨유의 박스 근처까지 다가왔다.

앙골라 출신의 아킴 산타나가 오른쪽 측면 공간으로 파고들어 아구아스 쪽으로 낮고 날카로운 패스를 보냈다.

‘좋은 패스군.’

노엘의 마크를 받은 아구아스가 이를 슬쩍 흘려 냈다.

그러자 뒤에서 달려들던 브라이언 클러프가 바로 슈팅을 날렸다.

하지만 클러프의 슈팅은 골대 옆으로 지나쳤다.

‘쩝, 존이 붙지 않았으면 발에 제대로 걸렸을 텐데.’

클러프와 벤피카 선수들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물러난 후, 해리 그렉이 최전방으로 길게 공을 내찼다.

낙하지점에 딱 맞춰 가 있던 토히스는 그 공을 알베르토 쪽으로 돌려놓았다.

재빨리 공을 치고 달려간 알베르토는 마리우 주앙을 앞에 두고 과감한 중거리 슛을 쏘았다.

골대 쪽으로 날아간 정확한 슈팅은 벤피카 골키퍼 코스타 페레이라의 가슴에 안겼다.

“마치 답례하는 것처럼 공격을 한 번씩 주고받는군.”

“경기 진행을 보니 작년처럼 어느 한쪽이 압도적으로 이기지는 못할 것 같아.”

아무래도 1골 승부가 나지 않을까.

과연 언제, 어느 쪽으로 승부가 기울어질지 기자들은 경기를 계속 지켜보았다.

***

전반전도 금세 반이 넘게 흘러갔다.

스코어는 아직 0 대 0.

선제골은 쉽게 나오지 않고 있었다.

“양 팀 모두 공격에 적극적이지만, 수비가 무척 견고해.”

“둘 다 실점이 적은 팀이었으니까 말이지.”

맨유는 이준영이 중심이 된 3백 수비와 하프백으로 출전한 던컨과 바비가 중원에서부터 벤피카의 예봉을 꺾었다.

벤피카 역시 중원에서 마리우 콜루나의 조율과 팀의 살림꾼인 카벰의 다재다능한 움직임으로 맨유의 공격을 막아 냈다.

여기에 최종 수비를 진두지휘하는 제르마누는 굳건한 바위산과 같았다.

‘으, 영상으로 본 것보다 무섭게 생겼네.’

벤피카 박스로 들어가던 데니스 로는 자신을 노려보는 제르마누를 보고 움찔했다.

체격은 노엘 캔트웰보다 약간 큰 정도였는데, 위압감은 거의 준영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느낌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 경합에 있어서도 제르마누는 강력한 모습을 보여 줬다.

몸싸움이나 공중전에서 알베르토는 물론 자신보다 큰 토히스에게도 우위를 보였던 것.

‘주장이 직접 상대한다면 어떨까?’

데니스가 궁금해한 상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졌다.

박스터의 중거리 슛이 수비수 몸을 맞고 나가면서 맨유가 코너킥 공격 찬스를 잡은 것.

이에 최후방에 있던 준영이 벤피카 박스 안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왔군.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작자가 바로 벤피카의 도살자란 말이지.’

준영은 제르마누에 대한 기록을 21세기에 있을 때 본 적이 있었다.

포르투갈 역대 레전드로 꼽히는 선수로 강력한 대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거기다 뛰어난 패스와 오버래핑 능력을 갖춰, 베켄바워 이전에 이미 리베로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 줬다고.

‘뭐, 그 점은 지금 던컨도 마찬가지이지만.’

다른 건 몰라도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드는 눈빛과 인상은 확실히 던컨보다 우위로 보였다.

‘좋아, 어디 한번 붙어 볼까!’

준영과 제르마누가 날카롭게 눈빛을 주고받고 있을 때, 레이 윌슨이 올린 코너킥이 박스 중앙으로 떨어졌다.

준영은 재빨리 낙하지점으로 이동하며 뛰어올랐다.

그러자 제르마누 역시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곧장 쫓아왔다.

‘헤딩…….’

퍼억-!

준영이 공에 머리를 대는 것과 동시에 제르마누의 넓은 이마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둔탁한 소음과 함께 눈앞에서 별이 번쩍였다.

그리고 몸은 잔디 위에 나동그라졌다.

“주장!”

“Germano, Você está bem?”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던 준영은 주변의 다급한 외침에 번쩍 눈을 떴다.

헤딩슛이 골대를 벗어난 걸 확인한 순간, 찡한 통증이 느껴지는 코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하얀 어웨이 유니폼은 금세 붉은 피로 얼룩졌다.

‘젠장, 이 망할 머머리가!’

제르마누도 진짜 아팠는지, 아니면 파울을 피할 목적인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어이, 존, 괜찮아?”

“응, 다행히 코뼈는 부러지지 않은 것 같아.”

팀 닥터가 황급히 들어와 준영의 상처를 살펴보고 솜뭉치를 코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잠깐 중단된 경기는 벤피카의 킥으로 재개되었다.

“방금 그거 벤피카 수비수의 파울 아니었나?”

“심판은 그냥 경합 과정에서의 충돌로 봤나 봐.”

“씁! 페널티킥을 줬어야지!”

영국 기자들이 아쉬워하는 가운데, 피해자인 준영은 침착하게 벤피카의 공격을 막아 냈다.

과감하게 돌파를 시도한 아우구스투의 진로를 선점한 다음, 공을 빼앗아 곧장 앞쪽의 바비 찰튼에게 보냈다.

‘리턴!’

바비는 준영이 앞으로 치고 나오는 걸 보곤 공을 내주었다.

마리우 콜루나가 끊어 내려 했지만, 준영은 공을 툭 쳐서 그의 다리 사이로 빼내 그대로 돌파해 나갔다.

“막아! 끊어 내!”

“제길, 태클도 넘었어!”

중앙선을 넘어 쭉쭉 벤피카 진영으로 치고 들어가는 준영.

이글거리는 그의 시야에 바위처럼 떡하니 버티고 선 제르마누의 모습이 보였다.

***

제르마누는 벤피카의 리그 무패 우승과 유러피언 컵 우승을 견인한 실력 있는 수비수입니다.

사진을 보면 진짜 한 인상 하는데, 젊었을 때 찍은 사진을 보면 프레디 머큐리 비슷한 스타일이었죠. 하지만 탈모 때문에……;;;

번외로 제르마누가 벤피카를 떠날 쯤에 새로운 젊은 수비수 움베르투 코엘류가 왔는데, 그 역시 포르투갈의 리베로로서 상당히 명성을 날렸습니다.

아마 기억하는 분이 있겠지만, 2002 월드컵 이후에 우리나라 감독을 맡았던 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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