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27. 오늘의 영웅, 내일의 전설
보송보송한 구름이 뜬 화창한 봄날.
구슬땀을 뚝뚝 흘리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선수들에게 명주같이 보드라운 바람이 쓸고 지나갔다.
“10분간 휴식.”
이유형 감독의 지시에 선수들이 반색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목을 축이거나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냈다.
이유형 감독은 쉬 숨을 가다듬지 못하는 최정민에게 잔소리를 건넸다.
“최 군, 나이가 적잖은 건 아는데 체력이 너무 떨어진 거 아니야? 겨우 내내 빈둥거리기만 했나?”
“빈둥거리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황급히 고개를 젓는 최정민을 도와주듯, 함흥철이 사정을 일러두었다.
“이 녀석, 빈둥거릴 틈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훈련하랴, 밤에는 미스코리아 마누라 상대로 힘쓰랴…….”
“어이!”
화들짝 놀란 최정민이 함흥철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들을 사람은 다 들은 뒤였다.
키득거리는 선수들을 살며시 째려보며 조용히 시킨 이유형은 최정민에게 돌아서 말했다.
“최 군, 나라의 보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적당히 자제하게.”
“보, 보배요?”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라지 않나. 소파 방정환 선생이 하신 말이지.”
최정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함흥철처럼 능글맞게 놀려 대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엄격 진지 근엄한 표정으로 농을 건네니 받아치기도 힘들었다.
“에휴, 위 감독님 때가 좋았는데.”
“그러게. 훈련은 힘들어도 그때가 좀 널널한 구석이 있었지.”
이유형 감독이 좀 멀어지자, 최정민과 함흥철은 한숨을 쉬었다.
위혜덕 감독은 아시안컵이 끝나고 물러났다.
그다음 부임한 감독이 바로 이유형.
그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본선 진출에 공헌했으며, 1956년 홍콩에서 열린 첫 번째 아시안컵에서도 한국을 우승으로 이끈 수완가였다.
하지만 그는 꽤 엄격한 인물이라, 선수들의 일탈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거기다 선수들에게 강한 정신, 불굴의 투지를 심어 놓으려 애썼다.
스위스 월드컵 예선 때도 ‘일본에게 지면 바다에 몸을 던지겠다.’라는 맹세를 하며 배수의 진을 쳤을 정도.
“쪽바리들 맘에 안 드는 건 누구나 그럴 테지만, 이 감독님은 더한 것 같단 말이지.”
“감독님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셨다니까 그럴걸.”
“그러고 보니 황해도 신천군 출신이라고 그러셨지.”
자신과 같은 이북 실향민 출신.
감독에게 동질감을 느끼던 최정민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던지 함흥철에게 이야기했다.
“아 참, 너도 그 얘기 들었냐? 북괴 놈들도 올림픽에 월드컵 나가겠다고 설치고 있는 거.”
“응? 그런 얘기가 있었어?”
“그래, 특부대에서 정보 장교들에게 들었어.”
지난 올림픽에서 조 예선 탈락을 했지만, 한국 대표팀의 선전은 아시아 스포츠에서 화제가 되었다.
주최국인 이탈리아와 비기고, 축구 종가 영국에 승리했으니까.
당장 다음 올림픽 개최국인 일본은 물론이고, 북한도 굉장히 배 아파했다고.
“그래서 김일성이가 문화 체육 쪽 인사들을 굉장히 들볶고 있대.”
“우리에게 안 지려고 말이지? 근데 그럴 만한 선수들은 있나?”
“평양이나 신의주 쪽에는 축구 선수들이 많거든. 전쟁 때 월남하지 않고 남은 사람들도 꽤 있다고.”
인재와 인프라가 남아 있으니, 작정하고 육성하면 해내지 못할 것도 없다.
물론 당장은 불가능하겠지만.
“뭐, 걔들이 뭘 하든 지금 우리는 도쿄에서 열릴 2차전이나 신경 써야지. 그래야 플레이오프까지 올라가니까 말이야.”
“감독님은 2차전에서 아주 대승을 거두기를 기대하는 것 같더군.”
작년 11월에 있었던 1차전에서는 2 대 1로 승리했다.
부상으로 한 명이 퇴장한 상황에서 선제골을 내줬지만, 정순천이 2골을 터트리며 역전승을 거둔 것.
6월에 있을 2차전을 위해 다음 달에는 마두레이라라는 브라질 클럽팀과 두 차례 평가전도 잡았다.
“아무튼 잘 준비해서 월드컵 본선까지 갔으면 좋겠다.”
“그래, 우리에겐 마지막 기회일 테니까.”
가장 화려한 꿈의 무대.
만약 본선에 올라가면 최정민은 독일과 맞붙고 싶었다.
꿈에서 보았던 2 대 0의 극적인 승리.
그것을 정말 현실에서 이룰 수 있는지 도전해 보고 싶었으므로.
“휴식 끝. 다들 정렬해!”
감독의 외침에 최정민과 함흥철 두 고참 선수는 후배들을 이끌고 다시 훈련에 돌입했다.
힘들어도 꿈의 무대로 나가기 위해서는 한 방울의 땀이라도 더 흘릴 필요가 있었다.
***
열이 나고 머리가 띵했다.
몸은 납덩이를 두른 것처럼 무겁고 가슴과 등에는 붉은 발진까지 일어났다.
“수두로구만.”
팀 닥터는 별로 살펴볼 것도 없다는 듯이 진단을 내렸다.
두통 때문에 찡그리고 있던 준영의 얼굴은 더욱 찌푸려졌다.
“수두요? 지금 퍼기나 자일스가 앓고 있는 그거 말입니까?”
“그래. 잠복 기간이 있는데 설마 자네까지 걸렸을 줄은…….”
수두는 성인에게 발병할 확률이 낮지만, 스트레스 등의 원인으로 면역이 약해지면 걸릴 수 있고 증상도 더 심하다고 한다.
“혹시 모르니까 선수단 모두 전수 조사를 해 봐야 할 것 같군.”
팀 닥터의 말에 준영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이거 심각한 겁니까?”
“괜히 법정 전염병이겠나. 심하면 폐렴이나 뇌염에 걸릴 수도 있어. 아,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건 없네. 약만 잘 먹고 몸조리 잘하면 회복되니까.”
“그럼 경기 출전은……?”
“당연히 못하지. 최소 일주일, 아니 10일은 쉬어야 할걸.”
선수 보호 차원에서 그리 조치해야 한다고 했다. 더구나 다른 팀 선수들에게 전염시켜서도 안 되고.
납득할 수밖에 없었지만, 준영의 입에서 한숨이 길게 터져 나왔다.
‘왜 하필 이 상황에서?’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거참, 올해는 정말 마가 끼었나…….”
1월 중순에 토트넘에 완승을 거두었을 때만 해도 역전 우승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후, 던컨이 전열에서 이탈했다.
계속 가슴이 욱신거려 병원에 가서 검사받아 봤더니 늑골에 실금이 갔다는 것.
토트넘과의 경기 때 상대 골키퍼와 충돌했던 탓이었다.
그렇게 던컨이 4주간 이탈한 가운데 얼마 후 수비수 빌 포크스도 훈련 중에 쓰러져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토트넘과의 경기 때 부상이 의심되었던 햄스트링 부위가 문제였다.
본인은 괜찮다고, 참을 만하다고 보고 계속 버티다 상태가 더 악화되고 말았다.
‘그때만 해도 크게 걱정하진 않았는데.’
빌 포크스의 자리에는 빌리 맥닐이나 셰이 브레넌 같은 대체 요원들이 있었고, 던컨은 노련한 노엘 캔트웰이 대신할 수 있었으므로.
실제 2~3경기에서는 별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2월 들어 울버햄프턴이나 노팅엄, 아스날 등 강호들과의 경기에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연방 선수들을 자극하는 거친 플레이를 하며, 맨유의 취약한 부분을 집요하게 찔러 댔다.
‘이미 우승은 포기했으니 월드 챔피언이나 한번 잡아 보자는 심보였지.’
그들의 짜증 나는 투혼(?)에 맨유가 지지부진하는 사이, 토트넘은 연전연승을 거두며 사실상 리그 우승을 확정 지었다.
“주장, 뭐래요?”
“10일간 쉬란다.”
클럽 하우스 내에 마련된 감염자 격리실에 온 준영은 알렉스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얏, 왜 때려요?”
“쓸데없이 전염병을 주워 왔으니 그렇지.”
“나도 걸리고 싶어 걸린 건 아니라고요! 어디서 걸렸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알렉스는 연방 투덜댔다.
사실 맨체스터 일대에 수두가 돌고 있다는 뉴스는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 걸린 사람이 없으니 딴 세상 얘기로 취급했던 것.
정말 이렇게 덜컥 병에 걸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진짜 미치겠다고요. 캐시는 전화해서 잔소리하지, 데니 그 자식은 애들이 걸릴 병에나 걸렸다고 놀려 대지……!”
“아, 좀! 조용히 해 줘. 안 그래도 머리 아파 죽겠구만.”
증상이 심한 자일스는 거의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열도 심해서 머리에 물수건까지 얹고 있는 상태였다.
“흑흑… 장가도 못 가고 이렇게 죽어야 한다니…….”
“죽긴 뭘 죽어, 인마.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안 그래도 재수 없는 상황이라고.”
리그야 이미 우승이 물 건너갔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곧 있을 유러피언 컵 준결승 경기와 FA컵 결승이 문제였다.
‘상대도 만만찮은데 큰일이군.’
유러피언 컵 준결승 상대는 옆 동네 리버풀.
1차전은 맨유가 2 대 1로 이겼지만, 안필드에서 열린 2차전은 펠레가 골을 터트리며 리버풀이 1 대 0으로 승리했다.
최종 합계 2 대 2가 된 양 팀은 5월 3일 중립 지역에서 재경기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준영은 출전할 수 없는 상황.
5월 6일 열리는 FA컵 결승전도 마찬가지였다.
번리를 3 대 0으로 가볍게 밟아 주고 결승에 오른 토트넘 핫스퍼는 더블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나 없이 잘할 수 있으려나? 감독님이 많이 고민되시겠는걸.’
준영도 매 경기 출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중요한 경기는 거의 빠지지 않았다.
동료들의 실력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1958년 2월 그 비행기 사고 이후 맨유는 거의 자신이 키우다시피 했으니까.
‘거창한 사고는 아니지만, 지금 이 상황도 위기인 건 확실하군.’
자칫하면 무관으로 끝나 버릴 수 있는 시즌.
준영은 부디 이 위기를 동료들이 굳세게 극복해 가기를 기원했다.
***
1961년 5월 3일.
유러피언 컵 준결승 재경기가 열리는 런던 웸블리에 10만의 관중들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왜 하필 재경기를 런던까지 와서 하는 건지.”
“입장 수익을 잔뜩 빼먹자는 주최 측의 의도겠지, 뭐.”
웸블리가 중립 지역으로 된 건 맨유 입장에선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현지에 남아서 바로 사흘 후의 FA컵을 대비할 수 있으니까.
“다들 잘 들어. 오늘은 매우 힘든 경기를 해야 한다는 거 다들 잘 알고 있을 거다.”
준영을 대신해 주장 완장을 찬 던컨의 말에 모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버스비 감독과 머피 코치 역시 던컨이 어떻게 선수들을 고양시키는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존이 이끌어 준 덕분에 우린 절망을 딛고 영광을 누릴 수 있었어. 하지만 오늘은 그가 없어. 하지만 난 여기에 존이 있다고 생각해.”
없는데 있다니?
궤변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다들 던컨이 느끼는 기분과 비슷한 심정이었으므로.
“존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 심장을 뜨겁게 불태웠지. 그 녀석이 지펴 준 투지는 내 마음에 그대로 불타고 있어.”
“나도 그래!”
“주장이 붙여 준 건데 꺼질 리가 없잖아!”
선수들이 맞장구를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뜨겁게 전의를 불태우는 그들에게선 주눅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기자! 주장도 보고 있을 테니까!”
“주장을 위해! 맨체스터를 위하여!”
뜨거운 투지를 불태우며 필드로 나가는 선수들의 모습에 버스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준영의 부재로 느꼈던 불안과 아쉬움이 마치 햇살에 눈이 녹는 것처럼 사라지는 느낌이었기에.
‘그래, 존은 함께하고 있어. 언제나 함께하겠지.’
오늘 이 경기를 뛰는 선수들뿐만 아니라 10년, 20년… 그보다 훨씬 미래에 뛸 맨유의 새로운 선수들에게도.
그의 활약과 투혼은 언제나 기억되며,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든든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바로 오늘의 영웅, 그리고 내일의 전설이니까.
***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에 서정원 선수가 출국 직전에 아들에게 수두가 옮아서 대회에서 컨디션 난조를 겪은 적이 있습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도 토고 대표팀에 수두가 돌아서 고열과 근육통 때문에 선수들이 고생했다지요. 첫 경기 상대였던 우리에겐 호재였지만요.
최근에도 코로나 문제로 주전 선수가 이탈하거나 훈련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등의 상황이 각국 클럽이나 국가대표팀에도 흔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들을 보면 팀이 강하려면 축구 외적으로 여러 가지 신경 쓸 게 정말 많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