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25. 맞수
기선을 제압하는 준영의 중거리 슛 이후, 맨유는 연이어 좋은 찬스를 잡았다.
코너킥에서 토히스의 헤딩슛이 살짝 골대를 벗어나는가 하면, 데니스 로가 전방 압박으로 공을 가로챈 후 유효 슈팅을 때리기도 했다.
그렇게 거세게 공격하는, 필승의 의지가 묻어 있는 맨유 선수들의 플레이에 홈팬들도 신이 나서 박수를 치고 아낌없이 함성을 터트렸다.
‘쳇, 계속 두들겨 맞기만 할 거라 생각하지 마라.’
슈넬링거가 빼낸 공을 넘겨받은 대니 블란치플라워는 때맞춰 맨유 진영으로 달려가는 에우제비우를 향해 패스를 보냈다.
‘좋아, 한번 휘저어 볼까.’
에우제비우가 공을 잡고 드리블을 해 가려는 찰나, 갑자기 번개같이 달려든 맨유의 하프백이 태클로 에우제비우의 발밑에서 공을 걷어 냈다.
예상치 못한 훼방을 받은 에우제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쳇, 이 녀석은 누구지?’
맨유가 자랑하는 준영과 바비, 던컨 삼총사는 아니다.
준주전으로 슬슬 이름을 날리고 있는 짐 박스터나 조니 자일스도 아니다.
완전 처음 보는 놈.
사전에 정보를 들은 적이 없는 무명 선수였다.
‘어린 데다 체격도 볼품없고, 이상한 안경까지 쓰고 있는 게 뭔가 모자라 보이는군.’
왜 이런 녀석이 출전한 걸까?
동료의 스로잉으로 공을 다시 건네받은 에우제비우는 자신을 따라오는 무명 선수를 가볍게 따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쉽사리 뿌리칠 수 없었다.
발재간으로 제쳐 냈다 싶으면 금방 따라붙어 훼방을 놓고, 거친 태클과 몸싸움도 서슴지 않았다.
“와, 저 꼬맹이, 악착같이 따라붙네.”
“누구야, 저 녀석? 우리 팀 주전은 아닌 것 같은데?”
“그게 작년 10월에 데뷔한 신인일걸. 이름이 뭐더라…….”
맨유 팬들은 잘 알지도 못하던 자기 팀 애송이가 악명 높은 에우제비우를 꽁꽁 묶는 것을 보고 연방 감탄을 터트렸다.
준영도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노비 녀석, 예상 이상이잖아.’
노버트 피터 스타일스.
통칭 노비라 불리는 이 애송이 하프백은 에우제비우와 동갑인 18살이었다.
키는 170도 안 될 정도로 왜소했고, 심한 근시였다.
준영은 처음에 노비를 봤을 때 얘가 정말 프로로 뛸 수 있을지 의문을 가졌다.
그래도 가능성이 없다고 보지 않았던 건, 터너 신부님에게서 그에 대해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겉보기와 달리 창의적이고 강한 기질을 가진 선수였지. 바비 찰튼이 활약할 수 있었던 것도 노비 스타일스라는 든든한 동료가 있었기 때문이야.’
거기다 불리한 조건을 갖고도 뛰어난 선수가 된 이들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대한민국 축구가 자랑하는 레전드 플레이어 박치성.
그는 체격도 왜소하고 평발이었지만, 2002 월드컵 4강의 주역이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자이언트 킬러로 명성을 날렸다.
이에 준영은 노비를 계속 지켜보았다.
심한 근시인 그를 위해 경기 중에도 착용할 수 있는 고글을 조셉 포스터에게 부탁해서 만들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준영보다 더 노비를 주시하고 있었던 사람은 버스비 감독이었다.
그는 이 작은 소년이 보여 주는 끈질긴 투쟁심과 두려움을 모르는 저돌적인 플레이를 눈여겨보았다.
그래서 10라운드 볼턴전에 데뷔시켰으며, 코칭스태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오늘 경기에도 과감히 출전시켰다.
그렇게 버스비가 던진 수는 제대로 통했다.
「정말 놀랍군요. 무명의 선수가 토트넘이 자랑하는 초특급 공격수를 꽁꽁 묶고 있습니다!」
토트넘 서포터들은 이게 대체 뭔 일인가 싶은 표정이었지만, 맨유 팬들은 그야말로 신이 났다.
그런 상황에서 노비는 기어코 에우제비우에게서 공을 빼내 재빨리 오버래핑을 시도하는 던컨에게 패스를 보냈다.
맨유의 반격에 토트넘 선수들은 황급히 수비로 전환했다.
“테리, 빅 던을 막아!”
“반대편으로 쇄도하는 놈을 조심해!”
과감하게 치고 들어간 던컨은 테리 다이슨의 태클을 뛰어넘은 후, 상대 박스로 침투하는 알베르토를 향해 크로스를 올렸다.
그러나 알베르토의 머리에 닿기 전, 슈넬링거가 먼저 크로스를 라인 밖으로 걷어 냈다.
찬스는 아쉽게 무산.
하지만 플레이 자체는 좋았기에 관중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유나이티드의 코너킥으로 공격이 이어집니다. 장신 선수가 많은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토트넘이 어떤 수비를 보여 줄지?」
TV 중계 카메라가 토트넘 박스로 모여든 양 팀 선수들의 모습을 비췄다.
토트넘은 공격수들까지 전원 박스 안으로 들어와 수비를 거들었다.
“큰 놈들이 골 에어리어로 못 들어오게 해!”
“젠장, 밀지 말라고!”
박스 안에서 한창 경합이 일어나고 있는 사이, 에우제비우는 박스 외곽 쪽에 자리를 잡았다.
반격이 시작되면 얼마든지 튀어 올라갈 수 있게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코너킥이 들어온다!”
“막아! 막아!”
공이 떨어지는 곳을 향해 준영과 토히스, 알베르토가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들의 머리에 닿기 전, 토트넘의 골키퍼 빌 브라운이 펀칭으로 공을 쳐 냈다.
‘좋아, 바로 반격을…….’
공이 있는 곳으로 곧장 달려간 에우제비우.
하지만 그보다 앞서 공을 잡은 선수가 있었다.
그는 바로 노비 스타일스.
공을 툭 차올리곤 수비수의 태클을 피해 낸 노비는 그대로 골문을 향해 슛을 쏘았다.
지면을 굴러간 공은 골키퍼의 손을 스치며 골대 하단 구석에 박혔다.
“Ahhhhhh!”
“애송이 녀석이 일을 냈어!”
“어쩐지 심상찮더라니!”
관중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장내 아나운서가 득점자의 백넘버와 이름을 크게 호명했다.
이에 관중들은 곧바로 노비의 이름을 연호하며 새 영웅의 탄생을 축하했다.
“잘했다, 노비. 데뷔 골 축하한다.”
“고마워요, 주장. 다 주장 덕분이에요.”
준영은 빙긋 웃는 노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스코어보드의 시계를 보았다.
‘전반 15분… 이른 시간에 기선을 제압했으니, 경기 주도권을 잡는 데 수월하겠군.’
토트넘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모르지만, 좀 더 유리한 입지에 오른 것은 틀림없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이 분위기를 유지하며 토트넘의 기세를 꺾어야 했다.
***
토트넘은 선제골을 내줬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아직 경기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데다, 이쪽도 언제든 상대 골망을 흔들 특급 선수들이 있으니까.
이에 대니는 선수들이 조급해하지 않게 다독여 가며 전진해 나갔다.
「대니 블란치플라워, 전진하며 스미스에게… 스미스, 주춤주춤 기회를 보다 유세비오에게 넘겨줍니다.」
공이 에우제비우에게 가자마자 노비가 자석처럼 그에게 달라붙었다.
미간을 찌푸린 에우제비우는 슬쩍 페인트를 걸어, 노비를 제쳐 냈다.
‘훗, 그럼 그렇지.’
에우제비우는 지금까지 풋볼 리그 정상의 수비수들을 제치며 골을 넣어 왔다.
맨유의 이준영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랬는데 듣도 보도 못한 초짜에게 당할 리 없지 않은가.
“거기 서!”
‘이 자식이……!’
막 슛을 하려던 차에 제쳤다 생각한 노비가 달려들었다.
에우제비우와 어깨싸움을 하던 노비는 안 되겠다 싶자 다리를 비집어 넣어 태클을 날렸다.
그 바람에 에우제비우가 박스 안에 나동그라졌다.
“허억!”
맨유 선수와 관중 모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파울.
거기다 박스 안에 들어온 상황에서 넘어트렸으니 심판의 판정은 뻔했다.
“으악, 페널티킥이다.”
“아, 왜! 잘하다가 왜?”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한숨과 원성에 노비는 어쩔 줄 몰랐다.
“미, 미안해요, 주장.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됐어. 퇴장 안 당한 게 다행이네. 다음에는 같은 실수 하지 마.”
준영은 노비의 어깨를 툭 쳐 주고는 골대 쪽을 바라보았다.
살짝 몸을 기울인 해리 그렉이 페널티킥 키커로 나선 로버트 A. 스미스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물러났던 스미스는 천천히 공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던컨과 준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차지 않고?”
“골키퍼를 초조하게 만들려는 수작인 거지. 해리가 저런 데 넘어가면 안 되는데…….”
공 앞에 오고도 잠시 대기해 있던 스미스는 마음을 굳혔는지 마침내 공을 찼다.
한참 고민한 성과가 있었던지, 그가 찬 공은 해리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굴러갔다.
“아! 골대 옆으로 지나갔어!”
“너무 꺾었네.”
“크하핫! 바보 자식, 온갖 짓은 다 하더니 꼴좋다!”
실축을 하고 만 스미스에게 맨유 팬들의 조롱이 쏟아졌다.
리그 득점왕도 했던 그의 실수에 에우제비우는 황당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개를 떨군 스미스는 후배 공격수에게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보냈다.
「아, 중요한 기회를 날리고 마는 스퍼스……. 니콜슨 감독이 무척 안타까워합니다.」
그와 달리 싱글벙글하는 버스비 감독의 표정이 중계 카메라에 비쳤다.
그리고 울상을 짓다가 이내 밝아진 표정으로 뛰는 노비의 모습도.
금세 기운을 되찾은 노비는 이후 토트넘이 다시 공격해 오자, 다시 에우제비우에게 덤벼들었다.
페널티킥을 내줘서 주눅이 들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제길, 귀찮은 자식!’
‘절대 놓치지 않아!’
공을 두고 에우제비우와 노비가 치열하게 부딪쳤다.
에우제비우가 스피드와 개인기로 제친다 싶으면, 노비는 왕성한 활동량과 과감한 몸놀림으로 끈질기게 그의 공격에 훼방을 놓았다.
이렇다 보니 에우제비우를 활용하는 토트넘의 빠른 공격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결국 에우제비우 쪽으로 가는 공은 줄어들고, 반대편에 있는 인도 공격수 고스와미 추니 쪽으로 패스가 많이 가게 되었다.
추니도 재능 있는 공격수였지만, 에우제비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보기 좋게 맨유 수비진을 헤집거나 시원스러운 슈팅은 잘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에우제비우 쪽을 살려야 하는데……. 저 작은 애송이가 만만치 않구만.”
답답한 건 지켜보는 니콜슨 감독뿐만 아니라 에우제비우 본인도 그랬다.
어쩌다 패스가 와도 노비가 끈적하게 달라붙는 바람에 공을 제대로 다룰 수가 없었다.
“좀 떨어지라고!”
참다못한 에우제비우는 자신과 몸싸움을 벌이는 노비를 손으로 밀어서 쓰러트렸다.
당연히 결과는 파울.
경기가 잠시 중단된 사이, 대니는 황급히 에우제비우에게 달려가서 그를 다독였다.
“뜻대로 안 될 때도 있고, 예상 밖의 만만찮은 상대를 만날 때도 있어. 하지만 그런 걸 감수하고 극복해 가는 게 프로야. 명심하라고.”
“Yes.”
아직 영어가 서툰 에우제비우는 주장의 말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부러 찾아와서 한참 말하는 모양새를 봐서 무엇을 우려하는지는 눈치챘기에,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자, 또 한 골 넣어 보자!”
경기가 재개되자 맨유 선수들은 잽싸게 패스를 주고받으며 토트넘 진영으로 넘어갔다.
그 빠르고 깔끔한 패스 플레이에 니콜슨 감독은 혀를 내둘렀다.
푸시 앤 런을 하는 토트넘 선수들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뛰어나 보였으니까.
「바비 찰튼의 패스가 알베르토에게… 하지만 여의치 않은지 다시 뒤로 공을 돌립니다.」
공격 지원을 하러 올라갔던 노비가 공을 잡았다.
좌우를 부지런히 살피며 드리블을 해 가던 그는 토트넘 박스 쪽으로 살짝 공을 띄워 보냈다.
토히스가 껑충 뛰어올랐지만, 공은 그의 머리에 닿지 않았다.
‘흥, 손발이 좀 안 맞았…….’
조소를 짓던 토트넘 수비수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토히스를 넘어간 공이 측면으로 우회한 데니스 로의 앞으로 정확히 떨어진 것이다.
***
노비 스타일스는 1960년에 데뷔해서 맨유와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굉장한 활약을 한 미드필더입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준결승에서도 에우제비우를 틀어막는 활약을 보여 주기도 했죠.
본문에 언급했던 단점이 있는 선수지만, 많은 활동량과 거침없는 수비로 상대 공격수들에게 ‘디스트로이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