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24. 리벤지 매치
“이번 겨울은 눈이 자주 내리는군.”
이른 아침, 준영은 고용인들과 함께 저택과 마을 도로에 쌓인 눈을 치웠다.
빗자루로 쓸고, 넉가래로 밀고.
마을 어른들이 총출동해서 눈을 치우는 사이, 아이들은 어른들이 모아 놓은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하며 놀았다.
그렇게 노는 아이들 중에는 카린도 있었다.
“거인이 나타났다! 용사들이여, 마을을 지켜라!”
“와, 거인을 물리치자!”
눈싸움하던 카린과 아이들이 갑자기 준영을 표적으로 삼아 눈덩이를 던졌다.
분노한(?) 거인은 빗자루를 휘두르며 호통을 쳤다.
“이노무 쉐키들! 혼 좀 나 볼래?”
“와, 도망쳐~”
아이들은 냉큼 줄행랑을 놓았다.
용감하게(?) 남아 있던 카린은 준영에게 훈계를 들었다.
“카린, 너도 여름 지나면 중학생(Secondary)이잖냐. 조금은 조신해져야지.”
“치, 오빠도 늙었구나. 학교 선생님이나 아저씨들처럼 말하고 있어.”
“뭐, 인마?”
“아야얏, 항복! 항복!”
준영이 큰 손으로 머리를 잡고 꾹꾹 움켜쥐자 카린은 냉큼 백기를 들었다.
어느 정도 제설 작업을 마무리한 준영은 말괄량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한 후, 느긋하게 휴식을 취했다.
“오빠야, 오늘은 훈련 안 가?”
“오늘은 오후에 있어. 오전에는 공부나 좀 하려고.”
“대학교 입학했으니 공부 안 해도 되잖아. 할아버지한테 정식으로 인정받았으면서.”
“기왕에 시작한 거 마무리를 짓는 게 낫단다.”
그러나 준영은 계획대로 오전 일정을 보낼 수 없었다.
저택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
“오랜만입니다, 형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쇼.”
“오, 철호구나. 그동안 잘 지냈냐?”
노르웨이의 한국인 이철호.
원래 역사에서 미스터리 푸드 컴퍼니의 창업자인 그는 현재 준영의 후원을 받으며 스위스에서 요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때? 요리 공부는 잘되어 가냐?”
“예,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배우고 있어요. 거기다 형님이 알려 주신 튀김닭 사업도 아주 잘되는 중이죠.”
준영에게 레시피를 배운 이철호는 요리 공부를 하고 남는 시간에 닭을 튀겨 팔았다.
미스터리 치킨에서 파는 것과 똑같은 프라이드치킨과 양념 통닭은 스위스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이에 정식으로 미스터리 치킨 분점을 냈는데, 금세 입소문을 타서 엄청난 매출을 냈다고 한다.
“자신들 지역에 분점을 내고 싶다고 연락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래? 그렇게 반응이 좋다면 유럽 진출에 보다 박차를 가해도 되겠는걸.”
고개를 끄덕이던 준영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지 물음을 건넸다.
“스위스에는 앞으로 얼마 정도 더 머물 거냐?”
“그게, 짧으면 1년, 길어도 2년 안에 요리 공부를 끝낼 겁니다.”
이철호가 요리 공부를 하는 건 요리사가 되기보다, 호텔이나 식품 공장 등으로 사업을 하기 위함이었다.
준영 역시 사업가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었고.
“그래, 끝나면 노르웨이로 돌아갈 거지?”
“네, 거기가 제2의 고향이니까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죠?”
“너도 소식을 들었을 거다. 북해에서 유전이 발견되었다는 거 말이야.”
“예. 그 때문에 노르웨이에 있는 제 지인들이 꽤 흥분했었죠. 노르웨이 근처에도 석유가 있을지 모른다고 말이죠.”
“그래, 가능성이 꽤 높아.”
영세한 어업 국가 노르웨이는 장차 부유한 산유국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현재 노르웨이 국적을 가진 이철호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당장은 기술과 장비를 가진 영국계 기업들이 북해 유전 개발을 주도하겠지. 하지만 노르웨이도 기술과 자본을 도입할 거고, 자국 기업을 밀어주고 싶어 할 거야.”
“그렇군요. 제 명의로 회사를 세우면, 형님이 자본과 기술을 대 줘서 성장시키려는 거군요.”
“그래, 그렇게 하면 노르웨이의 노른자위 유전들을 확보하는 데 유리할 테니까.”
준영의 이야기에 이철호는 솔깃해하면서도 부담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아직 자신은 젊고, 유전 개발과 관련해서는 문외한이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어차피 사업을 진행하고 관리할 실무 담당자들은 따로 영입해서 붙여 줄 테니까.”
“그렇다면야……. 근데 그렇게 전망이 좋은 겁니까?”
“전망이 나빴다면 시작도 안 했어. BP도 간을 보다 뒤늦게 끼어들려고 허둥댈 정도라고.”
준영은 연말에 BP 관계자가 찾아왔던 일을 이야기하며 그와 찍은 사진이 실린 신문도 보여 주었다.
이철호는 신문에 실린 것과 똑같은 준영의 확신 어린 표정에 의문을 거뒀다.
생각해 보면 준영은 스포츠든 사업이든, 지금까지 놀라운 일을 해낸 사람이다.
그가 확신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형님 하는 일을 미력하나마 열심히 돕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각자 다른 제2의 고향에서 뿌리를 내린 두 한국인은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맨유의 신년 첫 경기는 FA컵 3라운드였다.
상대 팀은 미들즈브러.
비록 승격권에는 도달하지 못해도 2부 리그 상위권에 올라 있었다.
“저기가 클러프 녀석 친정 팀이지?”
“안 그래도 어제 연락이 왔어요. 얼간이들이니 아주 박살 내 주라고.”
“그 자식도 참, 아무리 그래도 친정 팀인데 야박하게…….”
맨유는 클러프의 소원대로 미들즈브러를 박살 냈다.
클러프와 맞트레이드된 주제 토히스가 해트트릭을 몰아치며 전반부터 압도했다.
후반에는 오른쪽 풀백으로 출전한 노엘 캔트웰과 알베르토 스펜서가 한 골씩 추가하며 5 대 0의 대승으로 경기를 끝냈다.
그리고 단골 클럽에서 기분 좋게 뒤풀이를 즐겼다.
“모두 잘했어. 이제 푹 쉬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자.”
다음 경기를 말하는 준영의 말에 모두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리그 25라운드에 맞붙는 상대는 바로 토트넘 핫스퍼였으니까.
현재 1위를 달리고 있는 토트넘은 작년 8월 맨유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겨 준 바 있었다.
다들 그 패배를 시원하게 갚아 주고 싶어 했다.
물론 단지 복수심 때문에 승리를 원하는 건 아니었다.
“닭집 녀석들, 이번에 한 방 제대로 먹여 줘야 해요. 그래야 기세가 꺾이지.”
“그러게. 그 녀석들, 요즘 보면 완전 폭주 기관차야. 미친 것 같다니까.”
토트넘은 10월 10일 맨시티와 비길 때까지 11연승을 달렸다.
한 달 후 리버풀 원정에서 1 대 2로 패하기 전에는 16경기 무패를 기록할 정도.
이후에도 버밍엄 시티를 6 대 0으로 대파하는 등 연전연승을 이어 나갔다.
“에우제비우인지, 유세비오인지 하는 흑표범 자식은 진짜 괴물 같긴 하더라. 데뷔 첫해에 득점왕을 차지할 기세라니…….”
“슈넬링거라는 크라우트 놈은 어떻고? 그렇게 악착같이 막는 놈은 처음 봤다고.”
“쳇, 다른 팀들도 문제야. 우리랑 할 때는 사생결단할 기세로 덤벼들면서 왜 토트넘이나 리버풀한텐 그렇게 못하는지!”
준영은 탁자를 두들기며 이리저리 떠드는 선수들을 진정시키고는 말했다.
“퍼기 말대로 놈들의 기세를 꺾어 줘야 해. 우리가 이긴 후에도 놈들이 계속 승승장구해서 승점을 따면 이번 시즌 우승도 물 건너갈 테니까.”
“네, 아주 박살을 내 주자고요!”
“유나이티드를 위하여!”
필승, 그것도 대승을 거두고 말리라!
버스비의 붉은 악마들은 뜨겁게 투지를 피워 올렸다.
***
1961년 1월 16일.
곧 25라운드 경기가 열리는 올드 트래퍼드에는 구수하고 향긋한 닭튀김 냄새가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구내매점 앞에 줄을 늘어선 관중들은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전사들처럼 비장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손님, 무엇을 드릴까요?”
“토트넘 한 마리 주세요.”
“튀긴 걸로요? 아니면 양념? 그렇지 않으면…….”
“튀긴… 아니, 반반으로 줘요! 그리고 절인 무는 많이!”
관중들은 토트넘, 아니 치킨을 사 들고 경기장에 입장했다.
닭을 뜯으며 하얀 무를 씹는다.
토트넘을 타도하는 퍼포먼스로 이보다 좋은 게 있겠는가.
“네 토트넘은 색깔이 왜 그러냐?”
“아아, 이건 새로 나온 소이 치킨이라는 거야. 콩으로 만든 소스를 쓴 거지.”
“어디 하나만……. 오, 땅콩 맛이 나면서도 짭조름한 게 기가 막히는군.”
“야 인마! 하나만 먹는다며!”
이렇게 맨유 홈팬들이 대동단결하며 승리의 퍼포먼스를 즐기는 사이, 엄청난 번뇌에 빠진 남자가 있었다.
“제기랄, 유나이티드 놈들이 날 죽이려고 작정했나.”
치킨을 무척 좋아하는 토트넘의 주장 대니 블란치플라워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고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좀 참아요, 주장.”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참을 수 있겠냐? 안 그러냐, 막내야?”
대니의 물음에 에우제비우는 씩 웃음을 지었다.
그도 런던의 미스터리 치킨 매장에서 튀긴 닭 요리를 먹어 본 적이 있었다.
그 맛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 단연 최고라 할 만했다.
“진짜 유나이티드로 이적했으면 좋겠다.”
“야 인마, 대니! 경기가 코앞인데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어!”
정신줄을 놓으려는 대니에게 빌 니콜슨 감독이 불호령을 날렸다.
“정신 차리고 곧 있을 경기에나 집중해! 이기기만 하면 꿩이든 닭이든 뭐든지 먹게 해 줄 테니까.”
그리 약속한 니콜슨 감독은 출전 준비를 마친 선수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저 붉은 악마 놈들은 오늘 우릴 잡으려고 작정하고 덤벼들 거다. 그러니 우리 진영으로 공이 넘어왔을 때 수비를 소홀히 하지 말도록.”
“Yes, Sir!”
“공격은 언제나 하던 대로 푸시 앤 런이다. 부지런히 달리면서 패스하면서 상대를 밀어붙여라. 그 꺽다리 한국 놈이 설칠 여유를 주지 마!”
맨유의 핵심 선수는 바비 찰튼, 던컨 에드워즈, 그리고 이준영이다.
이 삼총사 중 가장 팀에 영향력이 강한 인물이 주장인 이준영.
공수에서 놈의 플레이를 차단해야 승산이 있었다.
“자, 다들 나가라! 가서 승리를 쟁취해! 이번 시즌, 아니 앞으로의 시대는 스퍼스의 것임을 만방에 알려 주는 거다!”
감독의 독려를 받으며 토트넘 선수들은 라커룸을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필드로 나간 그들은 벌겋게 투지를 불태우고 있는 맨유 선수들을 볼 수 있었다.
‘감독님 말대로군. 우릴 잡아먹으려고 작정한 기세야.’
대니는 라커룸에서 치킨을 갖고 번뇌했던 자신의 철없는 행동을 반성했다.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자 바쁘게 선수들을 진두지휘하며 맨유의 공격을 막았다.
“테리, 내려가서 켄을 도와줘! 론은 측면에서 크로스 올리지 못하게 견제해 주고!”
대니와 토트넘 선수들은 바쁘게 쫓아다녔다.
맨유는 마치 탐색전도 필요 없다는 듯, 곧바로 맹공으로 나섰기 때문.
최전방에서 그 맹공을 선도하는 건 알베르토 스펜서였다.
그는 바비 찰튼에게 공을 넘겨받자마자 가속을 올리며 순식간에 토트넘 박스로 달려갔다.
“때려, 알베르토!”
“슛!”
모리스 노먼을 슬쩍 제쳐 낸 알베르토.
그가 슈팅 자세를 취하는 순간, 토트넘의 중앙 수비수 슈넬링거가 달려들어 공을 멀리 걷어 냈다.
아쉬움을 삭이던 홈팬들의 눈에 준영이 공을 잡는 모습이 보였다.
‘이크, 저 녀석에게 공 가면 큰일인데.’
대니는 황급히 달려가 준영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재빨리 턴하며 대니의 마크를 뿌리친 준영은 곧바로 슈팅을 날렸다.
뻐엉-!
묵직한 소음을 울리며 터진 슈팅은 골키퍼 정면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워낙에 빠르고 강하다 보니 골키퍼 빌 브라운은 이를 받아 내지 못하고 크로스바 너머로 쳐 내야 했다.
간담을 서늘한 걸 넘어 얼려 버리는 위협적인 슈팅에 대니는 혀를 내둘렀다.
‘진짜 그냥 두면 위험한 놈이라니까.’
‘눌러 주마, 토트넘.’
양 팀 주장들이 날카롭게 눈빛을 주고받는 가운데 경기는 더욱 가열되기 시작했다.
***
1960-61 시즌은 토트넘에게 영광의 시즌이었습니다. 10년 만의 리그 우승, FA컵 제패로 더블 우승을 이뤄 냈으니까요.
이 우승을 발판으로 1961-62 시즌에 유러피언 컵에 진출, 4강에서 그 시즌 우승 팀 벤피카에게 아쉽게 패했습니다.
당시 1, 2차전 합계가 4 대 3, 2차전 홈경기에서는 선제골을 내주고도 역전을 이뤄 냈을 정도로 저력을 보였죠.
안타깝게도 그때 이후로 벌써 60년이 넘게 리그 우승을 못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보니 무관으로 끝날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