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23. 1961년을 향하여
1960년의 마지막 날.
하얀 눈이 떨어지는 올드 트래퍼드 필드로 붉고 푸른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홈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지역 라이벌 맨체스터 시티.
TV 중계 카메라가 양 팀 선수들의 모습을 비췄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ITV 스포츠입니다. 잠시 후 열리는 퍼스트 디비전 24라운드, 맨체스터 더비가 시작됩니다!」
“Go! Glory United!”
“Manchester is Blue!”
양쪽 골대 뒤로 양 팀 서포터들이 경기 시작 전부터 뜨거운 응원전을 펼쳤다.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떨어지는 눈도 몽땅 증발시킬 기세였다.
“시티 잡것들아! 우리가 월드 챔피언이다.”
“챔피언은 개뿔! 런던 치킨한테 밀리고 있는 주제에!”
“한번 챔피언은 영원한 챔피언이지! 너희는 못해 봤지?”
“우린 너희보다 월드 챔피언 많이 할 거다!”
양측 팬들이 자리한 경계에는 시대를 앞선 랩 배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경찰과 경기장 관리 요원들은 두 진영 사이를 띄워 놓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했다.
분위기가 이렇게 가열되고 있었지만 양 팀 선수들, 특히 준영과 맨유 선수들은 차분했다.
해이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진지하지도 않은 수준에서 적절히 투지를 끌어 올리고 있었던 것.
「시즌도 이제 절반을 넘었습니다. 토트넘, 리버풀과 우승 레이스가 치열한 상황에서 오늘 유나이티드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맨유는 오늘 공격적인 포진으로 나왔다.
최전방에는 알렉스 퍼거슨, 알베르토 스펜서, 주제 토히스, 데니스 로를 출격시켰다.
중원에는 준영과 바비 찰튼이 자리를 잡고, 수비에는 레이 윌슨, 빌 포크스, 빌리 맥닐, 던컨 에드워즈가 배치.
마지막으로 골문은 주전 골키퍼 해리 그렉이 지켰다.
“올해 마지막 홈경기다. 화끈하게 이기자. 알겠나?”
“Yes, Captain!”
경기 시작 직전, 둥글게 어깨동무를 하며 선전을 다짐한 맨유 선수들.
심판의 휘슬이 울리자, 그들은 무서운 기세로 맨시티 진영으로 달려갔다.
***
“놈들이 온다! 수비 간격 유지해!”
“빈 공간으로 들어가는 놈들 놓치지 마!”
맨시티는 주장인 케네스 반즈를 중심으로 수비망을 구축했다.
포진 자체는 상당히 선진적이었다.
하지만 옷도 얼굴이나 체형이 되는 사람이 입어야 빛이 나듯, 선진적인 수비 전술이라도 선수들이 따라가지 못하면 소용없었다.
‘그래, 다들 그렇게 계속 움직여라. 그렇게 수비수를 유인하면 간격이 벌어지기 마련이니까.’
공격을 지원하러 올라갔던 준영은 자기 팀 공격수들의 부지런한 움직임에 만족한 기색을 보였다.
초반부터 이런 움직임이라면 곧 기회가 만들어질 것 같았다.
“알베르토가 공을 잡았다!”
“슛해라, 알베르토!”
준영이 찔러 준 패스를 받은 알베르토 스펜서.
홈팬들의 성원을 안고 박스로 들어간 그는 상대 수비수 배리 베츠를 제치고 슛을 쏘았다.
구석을 노리고 한 박자 빠르게 날린 슈팅.
그러나 맨시티의 수문장 버트 트라우트만이 야수 같은 몸놀림으로 공을 쳐 냈다.
“그렇지!”
“우리에겐 버트가 있…….”
반색을 하던 맨시티 서포터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중앙 수비수 블렌더리스가 리바운드 볼을 향해 달려들던 주제 토히스를 걸어서 쓰러트렸으니까.
‘으악, 페널티킥!’
‘제기랄, 망했네!’
심판이 휘슬을 불려는 찰나, 토히스 대신 공을 잡은 바비 찰튼이 냉큼 슈팅을 날렸다.
버트가 몸을 날려 보았지만, 공은 그대로 골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선제골! 바비 찰튼이 오늘도 부지런한 움직임으로 팀에 귀중한 골을 주워다 주는군요.」
주웠든 어쨌든 골을 따낸 맨유 진영은 신이 났다.
이에 반해 유니폼 색깔만큼이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은 맨시티.
주장 케네스 반즈는 그런 팀원들을 다독이며 전열을 추슬렀다.
“걱정할 거 없다, 얘들아. 이제 경기 초반이야. 이 반즈 형님께서 10분 안에 동점 골을 만들어 주지!”
“믿습니다, 주장!”
측면에서는 잉글랜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해결사 케네스 반즈.
그는 장담한 대로 활약을 펼쳐 보였다.
부지런히 맨유 진영 왼쪽 측면을 파고들다가 레이 윌슨을 제치고 박스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그리고 빌 포크스와 빌리 맥닐마저 속여 넘기고는 쇄도하던 동료 콜린 버로우에게 패스를 건넸다.
버로우가 주저 없이 찬 슛은 그대로 골망을 흔들었다.
“그래, 해낼 줄 알았지!”
“시티는 죽지 않는다, 버스비의 악마 새끼들아!”
동점 골이 터진 순간, 맨시티 서포터들은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은 채 5분을 가지 못했다.
「전방을 주시하는 캡틴 리, 왼쪽 측면의 알렉스 퍼거슨에게 길게 패스! 아, 오프사이드가 아닙니다!」
준영의 절묘한 스루패스를 받은 알렉스는 버트 트라우트만과의 일대일 상황에서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켰다.
맨유가 다시 리드.
경기 분위기도 다시 탈환한 그들은 이후 주제 토히스의 날카로운 헤딩슛과 데니스 로의 연속 돌파 등 좋은 찬스들을 만들어 냈다.
만약 버트 트라우트만이 아니었다면 맨시티는 그대로 대량 실점을 했을 정도.
그렇게 골키퍼 선방으로 꿋꿋이 버티던 맨시티도 다시 한번 카운터를 날렸다.
전반 35분, 동점 골을 만들어 냈던 반즈가 직접 과감하게 슈팅을 날린 것.
화들짝 놀란 해리 그렉이 슛을 펀칭으로 쳐 냈다.
그리고 리바운드 볼을 향해 맨시티의 미국인 공격수 제라드 베이커가 달려들었다.
「제라드, 찬스! 아, 미끄러지고 맙니다! 시티가 통한의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으아아아아!”
맨시티 팬들의 원통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건드리기만 해도 골이건만.
하늘에서 내린 하얀 쓰레기는 맨시티에 불운을 안겨 주었다.
‘아, 이러면 안 좋은데.’
필드 밖에서 경기를 보던 맨시티의 레스 맥도웰 감독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다시 한번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 너무 아쉬웠다.
‘선수들이 빨리 잊어버리고 경기에 집중하면 좋으련만…….’
그러나 선수들이 아쉬움을 떨치기도 전에 또 한 번 벼락이 떨어졌다.
측면에서 중앙으로 내준 던컨의 패스를 받은 이준영이 과감하게 중거리 슛을 날린 것.
‘이건 들어갔다!’
모스크바에서 야신이 와도 못 막는다.
준영의 확신대로 공은 허공에 선명한 궤적을 그으며 날아가 맨시티 골대에 박혔다.
벼락 골에 어울리는 우레 같은 함성이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크하하! 세 번째 골!”
“이게 월드 챔피언 팀의 월드 클래스다!”
준영의 호쾌한 세 번째 골은 경기 분위기를 완전히 맨유 쪽으로 기울여 놓았다.
새하얀 눈송이들은 마치 그들의 승리를 미리 축하하기라도 하듯 펑펑 쏟아져 내렸다.
***
전반을 3 대 1로 마친 맨유는 후반에도 공세를 계속 이어 갔다.
전반부터 계속 골을 노리던 알베르토가 후반 3분에 단독 돌파 후, 네 번째 골을 성공시켰다.
20분 후에는 주제 토히스의 헤딩 패스를 받은 데니스 로가 득점에 성공.
이후에도 찬스들을 계속 만들며 맨시티를 완전히 주저앉혔다.
최종 스코어는 5 대 1.
마지막 경기에서 화끈한 대승을 거둔 덕분에 송년 파티를 매우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좀 아쉽더라고. 득점 기회가 더 있었는데…….”
알렉스의 말에 토히스는 동의하며 짧은 영어로 대꾸했다.
“독일 골키퍼, 잘 막더라.”
“풋볼 리그에서도 톱 기량의 골키퍼니까요. 근데 요새 팀이 좀 못 받쳐 주는 것 같더라고요.”
승자의 여유를 누리는 맨유 선수들은 라이벌의 부진을 딱하게 여겼다.
버스비 감독도 이를 안타깝게 보는 건 마찬가지였다.
“레스도 참 힘들겠어. 하고자 해도 뜻을 쉬 펼칠 수가 없으니…….”
“그런 걸 ‘꿈은 높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라고 하죠.”
준영의 말에 버스비는 손을 내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시티가 시궁창까지는 아니지. 퍼스트 디비전에 자리를 잡고 있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만, 그것도 오래갈 것 같지 않더군요.”
준영이 그리 본 것은 이번 시즌 맨시티의 동향 때문이었다.
실속 있는 선수들은 떠났는데, 새로 영입된 이들은 변변찮았다.
이번 시즌 맨시티는 미국 국적의 공격수 제라드 베이커와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에서 모리스 세터스를 영입한 걸 빼면 이렇다 할 보강이 없었다.
‘원래는 이번 시즌에 데니를 영입할 텐데, 우리가 먼저 채 가 버렸으니…….’
준영은 동료 선수들과 즐겁게 떠드는 데니스 로를 바라보다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한때 팀을 든든하게 지탱했던 상당수 주전 선수들도 노쇠화되거나 팀을 떠난 상황이니, 상위권 도약이 쉽지 않은 건 당연하다고 할 수밖에요.”
머피 코치가 준영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존의 말이 맞아요. 지금 맨시티가 어떻게든 버티는 건 주장인 반즈나 골키퍼 트라우트만 덕분이죠.”
“아무튼 안타까운 일이군. 라이벌이긴 해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땐 돕고 지낸 사이가 아닌가.”
그리 말하던 버스비 감독은 준영을 보며 말했다.
“존, 자네가 시티를 좀 도와주는 건 어떤가? 지난번 독극물 사건 때도 그 친구들이 도와줬지 않나.”
“설마 저더러 시티로 임대 가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재정적으로 약간 도움을 줄 수 없겠냐는 거지.”
지난번 독극물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되었다.
대처를 잘해서 신뢰를 얻은 덕분이기도 하지만, 최근 광고 사업이나 해저 유전 개발로 들어오는 투자금이나 수익이 폭등했기 때문.
그러니 맨시티에 투자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하진 않았지만…….
“전 유나이티드의 주장이고, 주식까지 다량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맨시티 주식을 사면 그쪽 사람들이 과연 반길지 모르겠습니다만…….”
“직접적으로 할 필요는 없지. 주식이야 누군가 대리인을 세워서 매입하면 되지 않을까?”
버스비의 말에 지금까지 준영의 곁에서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리즈가 나섰다.
“그럼 제가 대리인이 될까요?”
“응? 리즈 양이 말인가?”
“네, 저랑 대학 선후배들이 뭉쳐서 세운 작은 회사가 있거든요. 넥스트라고 컴퓨터 개발 관련 업체죠.”
일전에 준영이 지원해 준 자금으로 창립한 벤처 기업 넥스트.
이들은 작년에 BASE라는 간단하고 혁신적인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 영국은 물론 미국의 전산 업계에서도 주목받고 있었다.
“넥스트 법인으로 그쪽 주식을 매입하면 될 거예요. 사실 저희 임원들 중에는 맨시티 팬도 있으니까요.”
“오, 그렇게 하면 되겠군! 어떤가, 존? 리즈 양 의견대로 해 보는 건?”
“네, 괜찮겠단 생각이 듭니다.”
아니, 괜찮다는 정도가 아니라, 흥미로운 일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석유 재벌 구단주의 맨유와 세계적인 IT업계의 스폰서를 받는 맨시티의 대립.
이 맨체스터 더비를 혹자들은 부부 싸움 더비라고도 하지 않을지?
‘그런 웅장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도 계속 노력해 가야겠군.’
새롭게 달라질 미래,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를 위하여.
4월 혁명과 인터콘티넨털 컵 우승 등 큼지막한 일들이 있었던 역사적인 1960년을 뒤로한 준영은 1961년을 향해 나가기 시작했다.
***
맨시티는 1960년 초에 데니스 로 영입을 위해 맨유와 경쟁을 펼쳤습니다.
그때 맨시티는 데니스 로의 이적료로 55,000파운드를 지르며 승리했는데, 이건 당시 영국 국내 축구 최고 이적료였습니다.
다만 그 이적료 중에 데니스 로의 몫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1960-61 시즌이 끝나고 영국보다 선수를 더 우대해 주는 이탈리아 세리에 리그로 떠나게 되었죠.
그리고 소설에는 맨시티로 갔다고 언급한 모리스 세터스는 1960년 1월에 맨유로 이적했습니다.
실제로 맨유에서는 하드맨이라 불릴 정도로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