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22화 (322/400)

Round 322. 남쪽에서 온 편지

“자자! 더 빨리, 더!”

“놓치지 말고 쫓아가!”

맨유의 클럽 하우스 오스길리아스.

그 훈련장에서는 여느 때처럼 선수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여느 때와 달리 클럽 하우스 펜스에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선수들의 훈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는 월담을 시도하다 경비원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평소보다 더 많은 것 같군.”

“그래, 그것도 여자애들이.”

“누구 때문인지 알 만하구만.”

선수들은 원인 제공자인 존 레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공연 때문에 한동안 팀에서 이탈했던 레논은 팬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훈련에 집중했다.

그렇게 진지한 그가 공을 잡을 때마다 펜스에 매달린 소녀들은 연방 환호성을 질렀다.

“힘내요, 레논!”

“캡틴 리도 제쳐 버려요!”

소녀들의 열성적인 응원에도 불구하고, 레논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환호성 때문에 집중이 안 되는 것도 있지만, 팀 내 경쟁자들의 기량이 올라간 것도 똑똑히 보였기 때문.

‘휴, 잘못하다간 후보도 못하겠군.’

밴드 활동 탓에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댈 순 없다.

자신 말고도 부업을 하는 선수들이 있었으니까.

당장 주장인 준영은 요즘 대학 강의까지 듣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골! 골!”

“오빠, 너무 멋져!”

레논이 날린 슈팅이 시원하게 골망을 흔들자, 소녀 팬들은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다.

그 호들갑에 레논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손이라도 좀 흔들어 주지 그래?”

알렉스 퍼거슨의 말에 레논은 고개를 저었다.

“여긴 무대가 아니야.”

“축구 선수 입장에선 필드는 무대라고. 뭐, 지금은 연습 경기 중이지만.”

“맞아. 서비스는 적당히 필요해. 그래야 고정 팬이 계속 유지되지.”

동갑내기 조니 자일스도 끼어들어 한마디 했다.

“내가 너였다면 소녀 팬들을 위한 셀레브레이션을 따로…….”

“이놈들아, 뭘 쑥덕이고 있어! 집중 안 할 거야! 아직 안 끝났어!”

머피 코치의 호통에 세 젊은 선수들은 황급히 자기 진영으로 내려갔다.

지퍼처럼 잠겼던 자일스의 입은 훈련이 끝난 뒤에 다시 열렸다.

“야, 레논,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저렇게 좋다고 쫓아다니는 여자들 중에 맘에 든다 싶은 애 있지 않았어? 혹시 사귀어 보고 싶다거나 말이야.”

자일스의 물음에 레논은 고개를 저었다.

“매니저가 웬만하면 연애하지 말래.”

현재 브라이언 앱스타인은 비틀즈를 대중적인 아이돌 스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당연히 소녀 팬들을 실망시킬 만한 요소는 배제하려 애썼다.

다만 폴의 경우는 묵인해 주고 있었다.

일단 사귀는 걸 비밀로 하고 있었고, 앤지 역시 폴이나 밴드의 성공을 위해 자중한 채 뒷바라지만 했기 때문.

“사실 고향 친구들 중에 여자 소개해 주겠다고 나선 녀석이 있었고, 실제로 소개받기도 했어.”

“그래? 어땠는데?”

자일스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흥미를 보였다.

남의 연애 얘기, 그것도 몰래 한 이야기는 제법 흥미진진했으니까.

그러나 레논의 대답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름이 신시아 포렐이던가? 미술 학교 다니고 있는 아가씨였는데 내 취향은 아니었지.”

“신시아 포렐이라고?”

근처에서 목을 축이다 이야기를 들은 준영은 흠칫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아가씨는 실제 역사에서 레논의 아내였으니까.

“예. 왜 그래요, 주장?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

“…아니, 그냥 아는 사람 이름이랑 비슷해서. 근데 네 취향이 아니었다고?”

“예. 옛날이면 모를까 지금은 맘에 안 드는 스타일이었죠.”

레논이 만난 신시아는 브리지트 바르도와 비슷한 이미지의 금발 미녀였다.

그러나 바르도가 준영에게 보였던 폭언과 무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던 레논으로서는 썩 호감이 가지 않았다.

“사람을 외견만 보고 판단하면 안 돼.”

“알아요, 주장. 아는데… 매니저의 주의를 무시할 정도로 끌리진 않더라고요.”

그러면서 레논은 현재 자신의 이상형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단 단아하면서도 어느 정도 교양도 있고, 지적이면서도 겸손하고 상냥한 아가씨면 좋겠어요. 음악이나 예술에 이해가 높으면 더 좋고요.”

“짜식, 까다롭구만.”

사실 레논이 말한 이상형은 리즈가 모델이었다.

준영은 주변인들이 리즈에 대해 물을 때마다 ‘내가 뿌리내릴 수 있게 해 준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 얘기를 들은 레논은 주장의 연인이 어떤 아가씨인가 더 궁금해졌다.

그리고 직접 만난 후, 왜 준영이 그녀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자신도 리즈 같은 아가씨와 사귀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 것이다.

“거기다 기왕이면 신비한 동양의 미인이면…….”

“야, 너 설마 그 요코라는 여자가 맘에 들던?”

“천만에요! 그 여자는 이름대로 ‘Oh, no’라고요.”

걱정스러운 준영의 물음에 레논은 펄쩍 뛰었다.

사실 외모에 살짝 혹하긴 했지만, 형님 같은 주장을 씹는 언행을 보자니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주장, 레논이 동양 미녀를 들먹여서 궁금해서 그러는데, 한국에도 미녀가 많나요?”

자일스는 요새 옆구리가 시리기라도 한지 이성에 꽤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한국 미녀 동향은 갑자기 왜 묻냐?”

“왜긴요. 작년에 런던서 열린 미스 월드 대회에서 Seo라는 한국 대표가 최종 선발전까지 진출한 적이 있으니까 묻는 거죠.”

“아, 서정애 씨 말인가…….”

준영도 소식을 들은 적이 있지만, 크게 관심을 두진 않았다.

그냥 이 시대 미인 대회에도 한국 여성들이 참여했구나 싶은 정도.

다만 이후에 최정민이 그녀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긴 했다.

일정이 바빠 결혼식에 참석하진 못했지만, 선물과 축의금은 두둑이 보냈다.

“헤헤, 주장, 한국 미녀들 좀 아시면 소개 좀…….”

“자일스, 네가 우리 팀 간판이면 남에게 부탁할 것도 없이 아가씨들이 너에게 관심을 보일 거야. 그러니 일단 축구부터 더 열심히 해.”

준영의 무자비한 팩트 폭력에 자일스의 입이 잠겼다.

다만 불만이 좀 있었던지, 오리처럼 툭 튀어나온 입술은 쉬이 들어가지 않았다.

***

훈련을 끝낸 선수들이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클럽 하우스 직원이 선수들에게 온 편지와 팬레터를 전달해 주었다.

“누가 보낸 거냐?”

“스코틀랜드에 있는 어머니가요.”

“우와, 레논은 팬레터가 박스째로 오는구나.”

“주장도 만만찮은걸.”

“당연하지. 월드 클래스 플레이어 아니냐.”

선수들이 희희낙락하며 편지를 살펴보는 사이, 준영도 자신에게 온 편지들을 살펴보았다.

대부분 영국 혹은 한국에서 온 팬레터들이었다.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보냈구나.’

대개 선전을 기원하거나, 현기증 나니 빨리 토트넘을 제치고 1위 자리를 탈환해 달라는 재촉들이 많았다.

그리고 축구와 관련 없이 장학비 지원에 감사한다는 둥, 미스터리 치킨 덕분에 농장 양계 사업이 잘된다는 둥 하는 서신들도 있었다.

그중에 눈에 띄는 편지가 하나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준영 선수. 저는 김포 사는 이희택이라 합니다. 저는 축구가 좋은데, 저희 선생님은 자꾸 체조가 제 적성에 맞는다고 권유합니다. 이준영 선수가 설득 좀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희택? 진짜 내가 아는 이희택이 맞나?’

1960~70년대 아시아의 표범이라 불린 대한민국 역대급 스트라이커.

유럽에서도 관심을 가질 정도로 당대에 상당한 재능을 가진 선수였다.

그렇다 보니 이 편지를 보낸 아이가 과연 그 천재 공격수가 맞는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내 답신에 따라 운명이 바뀔지도 모르겠군.’

이에 준영은 소년 이희택의 편지를 따로 빼놓았다.

그리고 계속 편지를 살펴보았다.

“어때, 존? 팬레터에는 언제 1위 탈환하냐는 물음이 많은데?”

던컨이 건넨 말에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근데 이상한 편지들도 많군.”

다짜고짜 결혼하자고 하거나, 내가 실은 니 애비라고 하거나, 황제의 황금을 가로챈 너를 처단하겠다고 하거나.

심지어 팬을 가장한 안티나 다른 팀 서포터들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도 있었다.

그런 것들은 하나같이 욕설과 저주로 가득했다.

‘트롤러와 악플러 재능을 가진 이들은 이 시대에도 많구만.’

준영은 이상한 편지들은 대충 살펴보고 바로 휴게실 벽난로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계속 정리하다 반가운 사람이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와, 이건 숀 형이 보낸 건데?”

“어디 나도 좀 보자.”

“저도요!”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숀 코너리가 보낸 편지.

준영은 팀원들과 함께 숀이 보낸 편지와 동봉된 사진을 보았다.

“와, 스페인에서 영화 촬영을 하고 있다고?”

“의상을 보니 중세 영화 같군.”

“제목이 뭐죠? 엘 시드?”

“같이 사진 찍은 사람을 봐! 찰턴 헤스턴이야! 십계와 벤허에 나왔던 할리우드 스타라고!”

숀 코너리가 캐스팅된 작품 ‘엘 시드’는 미국과 이탈리아가 합작해서 만드는 시대극 영화였다.

11월 초에 주연 배우들의 캐스팅이 끝나 현재 스페인 과다라마에서 한창 촬영을 진행 중이라고.

“찰턴 헤스턴이 주인공인 엘 시드, 로드리고의 역이군. 여주인공 히메나는 이탈리아 출신의 여배우 소피아 로렌…….”

“숀 형님 배역이 뭐죠? 설마 엑스트라는 아니겠죠?”

“알폰소 6세라는 왕 역할이래. 주인공의 주군이지.”

편지에는 숀의 푸념이 약간 적혀 있었다.

배역을 따내고 조사해 보니, 알폰소 6세는 용맹왕이란 칭호가 붙을 정도로 뛰어난 군주였다.

그래서 자신의 배역에 대해 꽤 기대했는데, 막상 대본을 보니 완전 소인배 캐릭터로 잡아 놓았다는 것.

‘주인공을 매번 의심하고 딴지 거는 역이라…… 이순신 장군을 갈궜던 선조랑 비슷하게 만들었나 보군.’

그래도 주인공을 부각시키는 게 옳다고 보았기에, 불만을 참고 연기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감독이 좀 더 찌질 맞게 연기하라고 해서 짜증이 난다나 봐.”

“형님, 많이 힘드시겠군.”

준영은 감독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

연기력은 접어 두더라도, 왕으로 분장한 숀은 사진을 봐도 패기 넘치는 중세의 군주 그 자체.

거기다 체격도 육체파 스타로 유명한 찰턴 헤스턴에 뒤지지 않았다.

‘아마 감독 입장에선 배우 잘못 캐스팅했다 싶겠지.’

대충 연기 좀 한다는 무명의 배우를 데려와서 찌질이 국왕 역할을 맡기려 했는데, 포스가 패왕급이니 난감했을 터이다.

<그래도 계속하다 보니 어떤 식으로 연기하면 되는지 감은 가더군. 후보 선수로 구를 적에, 주전 선수들에게 느꼈던 질투심이나 내 자신에 대한 자괴감을 반영하면 되겠다 싶었지.>

방황하던 시절의 심정을 녹여 내겠다는 내용에서 준영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 그를 만났을 때 일이 떠올랐으니까.

“이 사진은 또 뭐야?”

“나 참, 이 아저씨, 왕년에 축구 선수였다는 거 티 내나.”

숀이 보낸 사진 중에는 촬영하다 휴식 시간 때 잠시 축구를 하며 노는 광경도 찍혀 있었다.

중세풍의 의상을 걸치고 트래핑을 하는 모습에 다들 너털웃음을 짓고 말았다.

‘본드 형, 파이팅! 열심히 하세요.’

나중에 영화가 개봉하면 바로 찾아가서 봐 주리라.

그리 마음먹은 준영은 옛 동료의 행보가 순탄하기를 빌었다.

***

1. 최정민 선수와 서정애 씨는 우리나라 스포츠 스타-미스코리아 커플 1호로 꼽히고 있습니다. 서정애 씨가 미스 월드 대회에 참여하고 귀국하던 중에 일본에 잠시 들렀을 때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하네요.

2. 실제 영화 엘 시드에서 알폰소 6세 역을 맡은 건 존 프레이저라는 영국 배우입니다.

위의 사진에서처럼 숀 코너리 옹은 촬영하다 휴식 때 종종 축구를 즐기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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