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20. 마무리
“그러니까 그 멍청이가 잡혔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 이건가?”
화이트 디펜스의 당수 오스왈드는 싱클레어가 전한 소식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뭔가 좀 찜찜했기 때문이다.
“MI6가 감시를 소홀히 할 자들이 아닌데?”
“내부 동조자들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측근의 말에도 불구하고 오스왈드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뭔가 함정 같아 보였으므로.
“우릴 끌어내려는 노란 원숭이의 수작이 틀림없어. 싱클레어도 봤다지 않은가. 그놈이 MI6 녀석들과 함께하고 있는 걸 말이야.”
“하지만 당수님, 만약 진짜인데 거부한다면 우리는 큰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겁니다.”
아무래도 간부들은 진짜 거사가 일어날 거라 믿는 모양이다.
노팅힐 사태 이후로 점점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보니 조바심이 커진 탓이었다.
더구나 꼬리 끊기를 했다지만, 싱클레어가 저지른 짓 때문에 대중의 지탄까지 받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조직의 앞날도 위태롭게 될지 모른다.
“지금 떨어지는 폭격에 겁을 먹고 참호 밖으로 뛰쳐나가면 저격을 당할 수 있어. 당장 급하지 않으니 살펴보고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오스왈드는 조바심을 내는 간부들을 다독였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저녁 상황이 급변하고 말았다.
과자 독극물 사건의 주범으로 이탈리아에서 체포, 송환된 싱클레어가 도주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건 따로 있었다.
“뭐? 나와 우리 간부들을 체포하러 온다고?”
“싱클레어 탈출의 배후에 우리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젠장, 그건 정보부에 있는 내부자들 소행인데……!”
“사실 그 내부자들이 우리에게 동조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 일단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오스왈드는 허둥지둥 켄싱턴을 떠났다.
하지만 은신처마다 경찰과 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제대로 숨기도 힘들었다.
심지어 신문과 TV에 독극물 사건의 공범들을 수배한다며 커다랗게 인상 파기가 나도는 판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이 미친 파시스트 새끼들!”
“비열하게 애들이 먹는 과자에 독극물이나 뿌리고 말이야!”
“여왕 폐하께서도 즐겨 드신다잖아. 잘못되면 어쩔 뻔했어?”
“이런 역적 놈들은 싹 다 잡아서 교수형을 시켜야지!”
이렇게 민심이 격앙된 상황에서 미디어에서는 화이트 디펜스가 새로운 테러를 준비 중이라며 보도했다.
“이런 미친놈들! 뭐? 우리가 비행기를 하이재킹해서 웨스트민스터 궁전 시계탑을 들이받을 거라고?”
“수원지에 독극물을 살포할 거란 누명도 씌우고 있습니다.”
“아무튼 얼굴 들고 다니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나마 오스왈드와 간부들이 추적을 따돌릴 수 있었던 건 MI6 내부 동조자들이 전해 준 정보 덕분이었다.
지금 숨어 있는 은신처도 그들이 제공해 준 것이었다.
“그 동조자 녀석들이 거사 어쩌고 지껄였다지 않나. 비행기 테러나 수원지 독극물 살포도 그놈들이 구상하다 우리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닐까?”
“당수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숭고한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들이 아니면 벌써 우린 체포되었을 겁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들과 동조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오스왈드도 이러한 간부들의 의견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후 전달된 정보부 동조자들의 제안에 수락했다.
“템즈강 하류에 배를 구해 두었으니 그걸 타고 프랑스로 가라고?”
“이미 수배까지 된 상황이니 국외 도피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본 거겠지요.”
더 이상 방법이 없다.
그렇게 판단한 오스왈드는 간부들과 함께 프랑스로 간다는 화물선에 탑승했다.
***
“꿇어, 이 흰둥이 새끼들아!”
화물선이 영국 영해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흑인 선원들이 밀항자들을 선실에서 끌어냈다.
배를 탔을 때만 해도 상전인 양 으스댔던 오스왈드 일행은 돌변한 상황에 아연실색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오스왈드의 항변에 날아온 건 대답이 아니라 몽둥이였다.
선원들은 마치 타작을 하듯이 오스왈드 일행을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 납작하게 몸을 숙였다.
하지만 영국에서 나름 저명한(?) 정치인이던 오스왈드의 입은 쉽게 죽지 않았다.
“으으윽… 감히 누구에게……. 이러고도 너희가 무사할 거 같으냐? 프랑스에 도착하면…….”
“이 배는 프랑스에 안 가. 프랑스령 모리타니로 가지.”
무어인 선장의 비웃음 섞인 대꾸에 오스왈드 일행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멍한 표정을 짓는 그들의 귓가로 선장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아, 곧 독립한다니 도착할 때쯤이면 더 이상 프랑스령도 아니겠구만. 아무튼 거기에 갈 때까지 얌전히 있는 게 좋아. 상어 밥이 되고 싶지 않거든 말이야.”
선원들은 오스왈드 일행에게 족쇄를 채웠다.
그러고는 배의 가장 아래쪽 선창에 가뒀다.
비좁은 선창에 10여 명이 가둬지다 보니 앉거나 눕기는커녕 몸을 돌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이, 이봐, 사람을 이렇게 짐짝처럼 넣는 게 어딨나?”
“어딨긴? 너희 조상들이 그렇게 했잖아.”
흑인 선원은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곧 겪게 될 오스왈드 일행의 운명에 대해 알려 주었다.
“우리 조상들이 당했던 것처럼, 네놈들도 노예로 팔려 갈 거야. 땡볕 아래에서 채찍을 맞으며 중노동을 하게 되겠지.”
모리타니는 아직 노예 제도가 남아 있었다.
지방에서 워낙 음성적으로, 그것도 방만하게 이뤄지고 있다 보니 당국에서도 사실상 방관하는 실정이었다.
“우, 우리를 노예로 팔겠다고!”
“웃기지 마! 나는 위대한 대영제국의 신민이다! 누구를 감히……!”
흑인 선원은 악을 쓰는 그들에게 비웃음을 날려 주고 발걸음을 돌렸다.
동료 선원이 궁금한 듯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근데 저것들, 팔릴 수 있을까? 나이도 많고 아예 늙은이도 있는데?”
“흰둥이들에게 시달렸던 족장들이면 얼마든지 살 거야. 개중에 취향이 유별난 작자들도 있을 거고.”
“으으, 상상하고 싶지 않군.”
선원들이 자리를 뜬 상황에서 어두운 선창에는 한동안 고성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유러피언 컵 1라운드 2차전이 열리는 11월 23일.
맨유는 7개월 만에 캄 노우를 다시 찾았다.
그때보다 훨씬 더 많은, 무려 12만의 관중들이 캄 노우를 찾았다.
지난 시즌 준결승에서의 탈락, 그리고 앞서 1차전의 패배를 이 경기에서 화끈하게 앙갚음해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Som la gent Blaugrana!”
“Barça! Barça! Barça!”
12만의 관중들이 광적인 응원을 펼치는 가운데, 바르사의 공격수들은 연방 맹공을 펼쳤다.
쿠벌러의 위협적인 중거리 슛, 코츠시스의 날카로운 헤딩, 그리고 수아레스의 과감한 돌파까지.
하지만 골은 쉽게 터지지 않았다.
1차전보다 맨유의 수비는 더 견고했던 것.
특히 루이스 수아레스에 대한 분석을 몇 번이나 하면서 대처를 세워 두었다.
“토히스, 전방에서 더 압박해, 더!”
“간격 넓히지 마! 파고들 공간을 주면 안 돼!”
“안전하게 걷어 내! 그래, 잘했어!”
오늘도 준영은 부지런히 선수들을 지휘하며 독려했다.
그뿐만 아니라, 바르사의 날카로운 공격들을 수차례 끊어 내며 후방을 든든하게 지켰다.
그 덕에 바르사 팬들의 광적인 응원에 다소 주눅이 들어 있던 공격수들도 안심하고 제 기량을 펼쳤다.
「치보르, 좌우를 살피다 수아레스에게 패스… 아, 이게 또 끊깁니다. 역습 조심해야죠.」
후반 18분, 바르사의 패스를 잘라 내며 전진한 던컨이 최전방을 향해 스루패스를 넣었다.
오프사이드를 기가 막히게 피한 알베르토 스펜서는 그 패스를 받아 바르사 골대로 달려갔다.
바르사 2번, 수비수 판초가 그의 앞을 막아섰지만, 알베르토는 능숙하게 그를 따돌리고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당황한 판초는 알베르토의 유니폼을 잡아챘다.
막 슈팅을 하려다 중심이 흐트러진 알베르토는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삐익-
오늘 경기 주심으로 나온 네덜란드 심판 요한 브롱호르스트는 주저 없이 휘슬을 불었다.
“으악, 페널티킥이다!”
“판초 저 등신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12만의 한탄이 캄 노우에 흐르는 가운데, 알베르토는 자신이 얻어 낸 페널티킥을 깔끔하게 성공시켰다.
득점을 해야 할 판에 실점을 내준 바르사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침착해! 일단 한 골부터 넣고…….”
바르사의 브로치치 감독은 어떻게든 선수들을 추스르려 애를 썼다.
하지만 지휘봉을 잡은 지 반년도 되지 않은 감독의 외침은 선수들을 다잡기에 부족했다.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성급한 플레이만 나왔다.
슈팅은 골대를 벗어나기 일쑤였고, 패스는 쉽게 차단당하거나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제길, 엉망이군!”
“이제 20분도 안 남았다고!”
12만이 쏟아 내는 원성과 질타는 바르사 선수들을 더욱 초조하게 몰아붙였다.
공격, 슛, 골.
머리에 3개의 단어만 남은 채 뛰어다니던 그들은 또 한 번 맨유에게 역습을 내줬다.
「존 Y. 리가 끊어 낸 공이 바비 찰튼에게… 아아, 바르셀로나, 수비가 부족한데요. 위험합니다!」
선제골을 터트린 알베르토가 수비 한 명을 따돌리며 바르사 박스로 들어왔다.
골키퍼가 황급히 각을 좁히자 그는 중앙으로 크로스를 올렸고, 뛰어 들어오던 바비 찰튼이 헤딩으로 가볍게 밀어 넣으며 추가 골을 만들어 냈다.
“제기랄, 0 대 2라니…….”
“휴, 다 끝났어. 집에 가자고.”
남은 정규 시간은 5분.
경기장에 남은 바르사 팬들은 혹시나 반전을 기대했지만,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맨유가 바르셀로나를 누르고 2라운드, 8강에 진출했다.
***
(축하합니다, 캡틴 리.)
경기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준영은 번즈의 전화를 받았다.
먼저 오늘 경기 승리를 축하해 준 번즈는 일전에 의논했던 계획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들려주었다.
(싱클레어를 제외하고 전원 모리타니로 갔습니다. 공식적으론 실종 처리가 되겠죠.)
“염전, 아니 사막 노예가 되는 거군요. 혹시 탈출할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 정도 역량이 있는 이들이라면 우리가 던진 미끼를 덥석 집어 들지 않았겠죠.)
오스왈드가 좀 신중하긴 했다.
자신이 진짜 탈출한 줄로 알고 있던 싱클레어의 보고에도 응하지 않았던 것.
하지만 주범인 싱클레어가 잡힌 시점에서 화이트 디펜스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잘 끝난 거죠. 만약 법정으로 가서 끝까지 시치미를 떼거나 뻔뻔하게 굴었다면 귀찮아졌을 테니까요.)
“하긴, 그런 놈들도 은근히 지지하는 인간들이 있을 테니까요.”
오노 요코 때도 생각한 거지만, 순교자 비슷하게 만들어 줘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에 바로 체포하는 대신 스스로 사지로 가도록, 그리고 대중이 철저히 외면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아무튼 매번 고맙습니다.”
(국가에 소중한 정보를 알려 주셨으니 이 정도 수고는 해야죠. 다음에 또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연락하십쇼.)
“알겠습니다. 다음에 뵙죠. 그때 한턱 푸짐하게 쏘겠습니다.”
(네, 기대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준영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흑룡회에 이어 화이트 디펜스까지 정리했으니, 이제 더 이상 신변을 위협받는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도 마냥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법.
하지만 극복해 나갈 것이다.
지금까지 있었던 수많은 난관을 헤쳐 왔듯이.
***
1960년 11월에 독립한 모리타니는 현재도 노예제가 청산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사람들이 처벌받을 정도죠. 치안도 나쁘고 부정부패도 심하다 보니 상황이 쉬이 좋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2021년 마지막 날인데 코로나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2022년은 모든 분들께 희망찬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