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19화 (319/400)

Round 319. 복수

11월 9일.

맨유는 1960-61 시즌 유러피언 컵 1라운드 경기를 치렀다.

그런데 대진 운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일까.

1라운드 상대는 지난 시즌 준결승에서 맞붙었던 FC 바르셀로나였다.

“정말이지, 4강쯤 가서 볼 팀을 이렇게 일찍 만나다니…….”

준영은 대기실에서 바르셀로나 선수들을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1라운드 상대가 바르셀로나라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농담인 줄 알았다.

진짜라는 것을 알고도 뭔가 좀 실감이 안 났는데, 이렇게 경기장에서 직접 만나 보니 정말 기가 막혔다.

“UEFA 놈들, 고의로 이런 건가?”

“어려운 상대라도 일찍 해치우면 이후에 편하지 않겠어? 이번에 유러피언 컵 16강에 오른 팀들이 그리 강해 보이지 않던데 말이야.”

던컨의 말에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리버풀은 무시 못하지. 그놈들, 최소 4강까지는 올라갈걸.”

“하긴……. 뭐, 그래도 리버풀을 제외하면 함부르크나 라피트 빈, 벤피카 따위밖에 없으니까.”

“나 참, 너 벤피카가 얼마나 센지 모르는구나.”

“어? 걔들, 강해?”

“그래, 우승 후보로 꼽을 만하다고.”

준영이 알기로 이번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 팀은 벤피카였다.

역사가 바뀌어 에우제비우가 토트넘으로 왔다지만, 주제 아구아스나 아우구스투 등의 주전들이 건재하기에 절대 만만하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바르셀로나는 주전 선수들은 지난 시즌과 비교해서 달라진 게 없군.’

라슬로 쿠벌러와 산도르 코츠시스 등 기존 멤버들이 그대로였다.

바뀐 게 있다면 감독.

올 시즌 새로 바르셀로나의 감독이 된 사람은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류비샤 브로치치였다.

전력 분석팀에서 조사한 정보에 따르면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와 유벤투스를 맡아 리그 우승을 거둔 적이 있을 정도로 실력 있는 지도자라고.

거기다 네덜란드와 이집트, 레바논 등에서 활동하며 국제적인 경험도 풍부하다고 했다.

‘아무튼 바르셀로나가 칼을 갈고 나왔겠군. 분명히 지난 시즌 준결승 탈락을 갚아 주려 할 테지.’

매우 힘든 경기가 될 게 틀림없다.

준영은 적절한 긴장과 경계심을 유지한 상태로 필드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심판의 휘슬과 함께 1라운드 1차전 경기가 시작되었다.

「골! 알베르토 스펜서가 마법의 머리로 벼락같은 선제골을 만들어 냈습니다!」

‘어?’

경기가 시작하고 겨우 2분.

왼쪽 측면에서 레이 윌슨이 올려 준 크로스를 알베르토가 놓치지 않고 헤딩슛으로 쏘아 내 골망을 흔들었다.

너무 이르게 선제골이 나오다 보니 준영은 기쁨보다 황당함이 더 컸다.

‘바르사 자식들, 전임 감독이 먹인 뽕이 아직 덜 빠졌나?’

초반부터 얼얼하게 한 방 맞은 탓인지, 바르셀로나는 이후에도 허둥댔다.

공격에서 패스 미스를 저지르고, 수비에서도 우왕좌왕.

결국 그러다 사고가 터졌다.

맨유의 강한 전방 압박에 후방으로 공 돌리기를 하다가 바비 찰튼에게 인터셉트를 당한 것.

일대일 상황에서 바비는 침착하게 골키퍼를 제치고 두 번째 골을 만들어 냈다.

전반이 3분의 1도 지나기 전에 2 대 0.

취재하러 온 스페인 기자들은 어이가 없던지 고개를 내저었다.

‘너무 긴장한 건가? 하긴 뼈아픈 패배를 갚아 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선제골을 맞았을 테니까…….’

이럴 땐 주장이 잘 다독여 줘야 한다.

문제는 바르사의 주장인 안토니오 라마예츠 골키퍼까지 정신줄을 놓았다는 점이다.

「알베르토, 문전으로 뛰어들며 슛! 아, 골키퍼, 이게 뭡니까!」

제대로 펀칭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대로 손에 튕기며 골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라마예츠가 황급히 공을 쳐 냈지만, 똑똑히 보고 있던 심판을 속일 수 없었다.

“대체 뭐 하는 거야!”

“똑바로 하라고! 마드리드 놈들에게 비웃음당하고 싶냐!”

분통을 터트린 스페인 기자 한 명이 필드로 카메라를 집어 던졌다.

그 바람에 경기가 잠시 중단되었지만, 그 덕에 바르사는 전열을 추스를 수 있었다.

놓쳤던 정신줄을 되잡고 혼란을 수습한 그들은 안정을 되찾았다.

비록 전반은 그대로 3 대 0으로 끝났지만, 후반전엔 쿠벌러와 코츠시스, 수아레스가 상당히 날카로운 공격을 선보였다.

특히 명불허전의 활약을 보인 건 루이스 수아레스.

지난 시즌 준결승 1차전 맨유 원정 승리의 일등 공신이었던 그는 후반 22분 기습적인 중거리 슛으로 만회 골을 만들었다.

이후로도 끊임없이 맨유 수비진을 흔들더니, 정규 시간 종료 2분을 남기고 한 골 더 넣었다.

“3 대 2까지 쫓아오다니…….”

“어차피 경기도 다 끝났는데, 뭘.”

“아냐. 아직 모른다고!”

느긋하게 경기를 보던 맨유 팬들은 막판에 염통이 쫄깃해지는 상황에 진땀을 흘렸다.

특히 정규 시간이 끝나고도 심판이 쉬 휘슬을 불지 않고, 바르사가 동점 골을 넣겠다고 총공세로 나오자 초조함은 더해졌다.

물론 압박감은 지켜보는 관중보다 필드에 있는 맨유 선수들이 더했다.

“내려와! 수비 간격 유지하고!”

“측면이 비었잖아. 빨리 가서 막아!”

갑자기 바빠진 준영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공을 잡고 있던 쿠벌러가 파고드는 코츠시스를 노려 크로스를 올렸다.

정확히 공에 머리를 댄 코츠시스는 맨유 골망을 흔들었다.

“들어갔… 아아…….”

환호성을 지르려던 그는 선심이 치켜든 깃발을 보곤 고개를 떨궜다.

‘휴, 간발의 차이였어.’

아슬아슬하게 오프사이드 트랩을 만들어 낸 준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해리 그렉의 킥을 마지막으로 심판이 종료 휘슬을 불었다.

굴곡이 있긴 했지만, 맨유는 1라운드 1차전 홈경기를 승리하는 데 성공했다.

***

경기가 끝나고 인터뷰까지 마치고 나온 준영에게 반가운 사람이 찾아왔다.

“오랜만입니다, 캡틴 리.”

“와! 번즈 씨, 기다리고 있었어요.”

MI6의 제이미 번즈.

안 그래도 준영은 그가 돌아오기를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임무가 많았나 보군요.”

“네. 그것도 그거지만, 이탈리아나 독일에서 파시스트들 동향을 조사하는 데도 시간이 좀 걸렸죠.”

전후 15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나치와 국가 파시스트당 잔당들이 활동을 재개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계에도 다시 진출하려 들고 있었고, 일부는 군부 쪽도 넘보고 있다고.

“지금이 냉전 중이라지만 독초가 다시 돋아나는 걸 용납할 수는 없거든요. 특히 그 독초가 우리 밭으로도 번지면 더 곤란한 일이죠.”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묻는데, 일전에 이탈리아에서 찾았다는 놈은……?”

“데려왔습니다. 독초가 번지는 연관 관계에 대해서 취조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죠. 아무튼 함께 가시죠. 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준영은 번즈와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앞으로 처리할 문제에 대해서 이런저런 논의를 했다.

어느 정도 결론이 났을 즈음, 두 사람이 탄 차는 맨체스터 교외에 있는 버려진 목장에 도착했다.

“여기에 있다고요?”

“딱히 호강시켜 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준영은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낡은 의자에 포박이 된 뚱뚱한 중년 사내를 볼 수 있었다.

“당신이 싱클레어라는 작자로군. 화이트 디펜스의 간부인지 뭔지.”

“어어? 우어어…….”

재갈이 물린 싱클레어는 준영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앞으로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기에 그는 사시나무가 된 것처럼 떨었다.

“댁이 한 짓 덕분에 난 굉장한 손실을 봤어. 그래도 그게 오히려 평판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니 그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을게. 진짜야.”

준영의 말에 싱클레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구나 번즈가 창고 안에 있는 요원들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들은 곧장 포박을 풀어 주었다.

‘오, 이대로 보내 주는 건가.’

노란 원숭이가 인자한 척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

굴욕적이긴 하지만, 싱클레어는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사지에서 벗어나야 나중에 이 굴욕을 갚아 줄 것이 아닌가.

그리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를 요원들이 잡아서 바닥에 짓눌렀다.

그대로 엎어져 버린 싱클레어는 ‘왜?’라는 눈길로 준영을 바라보았다.

“근데 다른 건 몰라도 애꿎은 애들과 아가씨들에게 독극물을 먹인 건 도저히 용납이 안 되더라고.”

“읍! 으읍!”

“뭐, 그래도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으니 살려는 드릴게.”

그리 말한 준영은 번즈에게서 크리켓 배트를 건네받았다.

스포츠 용품이지만,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계도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준영 역시 후자로서 다룰 생각이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는 범죄자의 볼기를 때려 주는 형벌이 있었지. 당신도 한번 문화 체험을 해 보라고. 아주 색다른 경험이 될 거야.”

“읍! 으으으읍!”

싱클레어는 거절의 의사를 보였지만, 그대로 묵살되었다.

요원들이 그의 바지를 끌어내리기 무섭게 준영이 크리켓 배트로 싱클레어의 엉덩이를 후려갈겼다.

“으어억……!”

퍼억! 퍽! 빠아악!

묵직하고 넓적한 크리켓 배트가 찰지게 후려칠 때마다 싱클레어는 비명을 토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찌나 아팠는지 그만 실금을 해 버렸을 정도.

아마 재갈이 물려 있지 않았다면 혀를 깨물었을지 모른다.

“캡틴 리, 그만하죠. 더 맞으면 저 작자는 죽을 겁니다.”

“그러죠. 회복되면 또 패면 되니까.”

준영의 말에 싱클레어는 치를 떨었다.

이 수치와 고통이 쉽사리 끝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무거운 절망감이 마음을 짓눌렀다.

“들어가!”

싱클레어를 빈방에 가둔 요원들은 바셀린 한 통을 던져 주고는 문을 걸어 잠갔다.

“어흑, 흐흐흑…….”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어기적어기적 기어간 싱클레어는 낡고 냄새나는 침대 위에 엎드렸다.

“크흐흑! 두고 보자, 노란 원숭이 놈! 이 굴욕은 기필코…….”

나중에 똑같이, 아니 배로 되갚아 주고 말리라!

그렇게 이를 가는 사이 밤이 되었다.

하지만 볼기가 퉁퉁 부어오른 싱클레어는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왜 이리 늦었어? 교대 시간이 한참 지났다고!”

“미안. 따로 볼일이 있어서.”

“근데 왜 혼자야? 2명이 오기로 하지 않았나?”

“기어서 도망도 못 갈 거라며? 나 혼자도 충분하다고.”

“하긴 그렇군.”

밖에서 잠시 대화가 들리더니, 발소리를 끝으로 이내 잠잠해졌다.

그리고 방금 전 교대했던 금발의 요원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싱클레어 씨, 움직일 수 있습니까?”

“당신은…….”

“구하러 왔습니다. 정보기관에도 저처럼 유니언잭에 검고 누런 얼룩이 묻는 걸 원치 않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아아!”

기대하지 않았던 구원자의 등장.

눈물을 글썽이던 싱클레어는 기운을 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발의 요원은 그를 부축하며 밖에 세워 둔 차에 태웠다.

앉을 수 없다 보니 뒷좌석에 엎드려야 했지만, 지금 이 정도 굴욕이야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아마 싱클레어 씨가 탈출하고 난 뒤에 한바탕 뒤집어질 겁니다. 우린 그사이에 행동에 나설 계획입니다.”

“행동이라니?”

“당연히 대의를 위한 거사지요. 그러기 위해선 재야의 우국지사들의 도움이 절실해요.”

재야의 우국지사들이 누구를 말하는지는 뻔했다.

그리고 싱클레어는 그들을 연결시켜 줄 수 있었다.

‘어떤 거사인지 몰라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해. 그럼 이 굴욕도 갚아 줄 수 있을 테지!’

원한으로 물든 싱클레어의 두 눈이 붉게 타올랐다.

***

크리켓은 현재도 영연방 일대에서 인기가 많은 스포츠입니다.

옛날 영연방 축구 선수들 중에는 크리켓 선수를 겸해서 활동한 이들도 상당히 많았죠.

그래서 그런지 해트트릭이란 용어도 크리켓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사진 보면 아시겠지만, 배트를 보면 딱 곤장이 연상됩니다.

그렇다 보니 사람 잡는 용도로도 엉뚱하게 사용되곤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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