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17. 저마다의 바람
‘그 녀석에게 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지.’
로저 헌트와 콤비로 유명했던 이안 세인트 존.
역사가 바뀐 상황에서도 그런 점은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준영은 패스 차단 후에 잽싸게 전진해 올라갔다.
그러자 가까이 있던 이안 캘러헌이 곧바로 마크를 붙었다.
“반격은 못한다, 존 Y. 리!”
“큰소리를 치고 싶거든 실력을 더 늘리고 와!”
가볍게 툭 치고 가속도를 높인 준영은 캘러헌의 마크를 뿌리쳤다.
그리고 최전방에서 손을 드는 주제 토히스 쪽으로 바로 롱 볼을 날려 보냈다.
“Bom trabalho!”
토히스는 자신이 전진하는 방향으로 정확히 떨어지는 패스에 감탄했다.
이미 훈련이나 이전의 경기들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저 동양인 주장은 자를 대고 패스를 하는 것 같았다.
‘과연 세계를 평정한 실력자!’
앞으로 그와 함께 세계 정상에 오를 것을 생각하니, 절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흥분을 맛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떨어지는 공중볼을 향해 경쟁자도 덤벼들고 있었으니까.
“까불지 마라, 포르투갈 촌놈!”
리버풀의 중앙 수비수 론 예이츠가 토히스와 공중 경합을 벌였다.
188센티미터인 예이츠는 191센티미터인 토히스에 비해 조금 작았지만, 경합 능력은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그 바람에 토히스는 공을 확보하고도 쉬 돌아서지 못했다.
“토히스, 나한테 줘요!”
측면에서 접근한 데니스 로의 외침에 토히스는 그에게로 패스를 보냈다.
데니스는 곧장 리버풀 페널티 박스 중앙으로 크로스를 올려 보냈다.
그러자 번개같이 뛰어든 알베르토가 리버풀 수비수 딕 화이트를 뿌리치고 헤딩슛을 내리찍었다.
“골……! 아니, 옆 그물인가?”
“와, 아까웠는데!”
아쉬워하던 맨유 팬들은 알베르토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경기 초반이라 영점 조준이 덜 되었던 알베르토는 크로스를 올려 준 데니스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마법의 머리라는 별명이 있다더니만, 진짜 헤딩을 잘하는군.’
황급히 자기 진영으로 복귀하던 펠레는 방금 전 알베르토의 플레이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헤딩도 헤딩이지만, 귀신같이 달려드는 침투 능력은 기가 막혔다.
‘에콰도르 출신이라고 했지? 그 나라에 저 정도 실력을 가진 선수가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마냥 감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알베르토는 자신의 팀 문전을 노리는 적이었으니까.
***
우승 레이스를 펼치는 팀들답게 맨유와 리버풀은 치열한 공방을 펼쳤다.
최전방으로 정확하게 전달되는 롱 패스와 측면의 빠른 돌파는 지켜보는 관중들에게 잠시도 눈 돌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오늘 경기 펠레는 주로 2선에서 패스 공급을 담당하고 있군.”
“패스도 꽤 잘하는데? 골만 잘 넣는 줄 알았더니…….”
“팀의 입장에선 저렇게 다재다능한 선수가 좋은 거라고. 유나이티드도 그렇잖아. 바비 찰튼과 빅 던, 캡틴 리는 어디서든 그 이상의 활약을 해 주고 있지.”
축구계 인사들과 기자들이 감탄하는 가운데, 양 팀은 과감하고 위협적인 공격을 주고받았다.
경기 초반에 리버풀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알베르토는 전반 12분 다시 한번 헤딩슛을 날렸다.
이번엔 골대로 날아든 유효 슈팅이었지만, 리버풀 골키퍼 버트 슬레이터가 가까스로 쳤다.
이에 리버풀도 지지 않겠다는 듯, 이안 캘러헌의 패스를 받은 로저 헌트가 페널티 아크에서 멋진 터닝슛을 선보였다.
빌리 맥닐의 몸에 맞고 골대 옆으로 나간 공은 코너킥으로 이어졌다.
펠레가 올린 코너킥은 기습적으로 쇄도한 론 예이츠의 헤딩슛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정확히 머리에 맞지 못한 공은 골대 오른쪽 옆으로 흘러 나갔다.
“와, 리버풀의 장신 수비수도 제법인걸?”
“장신을 활용한 든든한 수비에 과감한 공격 가담……. 캡틴 리랑 비슷해 보이는군.”
“에이, 그래도 캡틴 리한테는 안 되지.”
관중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은 론 예이츠는 서둘러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의 시선은 좀 전에 경합을 했던 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해받지 않았으면 분명히 골이었는데…….’
분명히 노마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딩하려고 뛰어오른 순간, 앞에 이준영이 떡하니 있었다.
‘이게 세계 정상급 수비수의 실력인가.’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잉글랜드에 오기 전에 많이 들었다.
심지어 던디 유나이티드에 있을 땐 이런 얘기도 있었다.
‘버스비 감독이 널 영입하고 싶어 했어. 존 Y. 리의 추천을 받았다고 하더군.’
스코틀랜드 2부 리그 팀 소속, 그것도 부업으로 도축장에서 일하는 아마추어 무명 선수인 자신을 어떻게 알았던 걸까.
아무튼 당시엔 아쉽게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가지 못했다.
‘그때 날 대신해 영입된 놈이 저기 맥닐이란 녀석이라 했던가.’
그 아쉬움은 올해 리버풀의 올레드를 걸치며 풀어졌다.
섕클리 감독은 자신의 영입에 대해 무척이나 만족한 반응을 보였다.
‘론, 나는 널 이 리버풀의 차기 주장으로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 존 Y. 리와 같은, 아니 그 이상의 뛰어난 수비수가 되어 다오!’
그런 기대를 받으며 이번 경기에도 출전했다.
그리고 존 Y. 리와 맞붙었다.
‘만만치 않지만, 넘어서 주지.’
이렇게 각오를 다지고 있던 론 예이츠를 유심히 노려보는 선수가 있었다.
바로 맨유의 최전방 공격수 주제 토히스.
그는 론 예이츠의 강력한 견제 때문에 제대로 슈팅을 시도하지도 못했다.
‘주장에게서 뛰어난 수비수라고 들었지만… 확실히 만만치 않군.’
지금까지 경기한 풋볼 리그 수비수들과 수준이 달랐다.
적극적인 몸싸움이나 공중 경합 능력은 준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어렵지만 뚫어야 해. 그래야 주전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어.’
토히스는 SL 벤피카에서 가능성을 인정받았지만, 경기에 많이 나가진 못했다.
포르투갈 최고 공격수로 꼽히는 아구아스를 비롯해 아우구스투 등 기존 터줏대감들이 워낙에 잘했기 때문.
그런 와중에 맨유에서 영입 제안이 들어왔다.
그리고 토히스는 해외 진출에 흥미를 보인 브라이언 클러프와 맞트레이드되었다.
‘여기서도 후보로 남을 순 없어. 반드시 주전 멤버가 되어 내 손으로 우승 트로피를 들겠어!’
그러니 지난 시즌 우승 팀인 리버풀과의 이 경기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렇게 저마다의 목표와 바람을 안은 양 팀의 선수들은 투지를 불태우며 경기에 몰입해 갔다.
***
경기는 쉴 새 없이 공방이 이어지며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득점이 쉽사리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
하지만 양 팀 공격수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분명히 좋은 기회를 잡았지만, 수비수들이 무산시켰기 때문.
맨유의 이준영과 리버풀의 론 예이츠.
위압적인 체격과 뛰어난 수비 능력을 가진 양 팀 핵심 수비수들은 위기 상황에서 여러 차례 팀을 구원해 냈다.
「알베르토, 들어갑니다. 리버풀 박스 안에서 한 명 제치고 슛-! 아, 이번에도 예이츠가 막아 냅니다!」
현장의 관중들은 물론, TV로 경기를 보던 맨유 팬들도 탄식을 내뱉었다.
방금 전 알베르토 스펜서의 슛은 정말 좋았다.
한 명 제쳐 낸 다음 골키퍼가 나오는 걸 보고 구석을 노려 휘어 찼는데, 론 예이츠가 몸을 날려 걷어 냈다.
분명히 들어갔다고 보고 골 셀레브레이션까지 준비하던 알베르토는 화가 나서 발을 구를 정도였다.
‘진짜 잘 막네. 괜히 리버풀 레전드가 아니구만.’
명불허전.
론 예이츠의 활약을 본 준영의 머릿속에 이 단어가 뚜렷하게 떠올랐다.
물론 그렇게 명불허전인 사람은 론 예이츠뿐만이 아니었다.
「위기를 모면한 리버풀, 빠르게 역습으로 이어 나갑니다. 유나이티드는 수비가 부족한 것 같은데요?」
준영과 던컨이 공격 가담을 한다고 전진한 터라 남아 있는 수비수는 빌리 맥닐과 레이 윌슨뿐.
그 상황에서 리버풀은 알란 아코트, 이안 세인트 존, 로저 헌트 셋이 총알같이 맨유 진영으로 밀고 들어왔다.
“막아. 얼른 막으라고!”
“오, 일단 파울로 끊어 냈어.”
로저 헌트가 St. 존에게서 패스를 받은 순간, 맥닐이 그를 걸어 넘어트렸다.
프리킥을 내줬지만, 박스에서는 좀 먼 거리.
거기다 경기가 잠시 중단된 덕분에 준영과 유나이티드 선수들이 재빨리 수비로 복귀할 수 있었다.
“키커는… 역시 펠레로군.”
“한 골 넣어라, 펠레!”
콥스가 응원의 함성을 높여 가는 가운데, 공 앞에선 펠레가 잠시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살폈다.
‘이 정도 바람이면 충분히 할 수 있겠어.’
확신이 들자 펠레는 곧장 달려들어 공을 때렸다.
멋진 궤적을 그으며 날아간 그의 슈팅은 골대 왼쪽 구석으로 떨어졌다.
몸을 날린 골키퍼 해리 그렉이 힘껏 손을 뻗었지만, 공은 그대로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Goooo-ooal!”
“해낼 줄 알았어, 펠레!”
“넌 정말 축구의 황제, 아니 신이야!”
0 대 0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콥스의 함성이 올드 트래퍼드에 울려 퍼졌다.
워낙에 깔끔하게 잘 찬 슛이다 보니, 맨유 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저런 건 정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저 거리에서 저렇게 때리다니…….”
“걱정 말라고. 우리에겐 캡틴 리가 있으니까!”
거기다 골만 터지지 않았을 뿐, 공격이 형편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경기 시간도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Go, United!”
“한 골 넣어! 그리고 역전해 버리라고!”
홈팬들의 성화가 아니라도 준영과 맨유 선수들은 바로 동점 골을 넣을 생각이었다.
이대로 리버풀에게 경기 흐름을 넘겨줄 수는 없으니까.
「선제골을 내준 유나이티드, 하지만 침착하게 패스를 넣으며 반격에 나서고 있습니다. 바비 찰튼이 캡틴 리에게 공을 넘겨주고 전진, 오른쪽에서는 데니스 로가 손을 들고 있습니다.」
전방의 공격수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가운데, 준영은 한 차례 더 치고 들어갔다.
‘저 녀석, 직접 때릴 셈인가?’
‘충분히 할 놈이니까.’
‘막지 않으면…….’
리버풀과의 경기 때마다 골을 터트렸던 준영.
그렇기에 리버풀 선수들은 그가 전진해 오면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상대 수비수들의 시선을 유도한 준영이 돌파해 들어가다가, 허를 찌르는 패스를 건넸다.
그 패스를 받은 토히스는 론 예이츠가 준영에게 눈을 돌리는 틈을 타서 골문으로 돌아서며 슛을 날렸다.
방향은 골키퍼의 정면.
그러나 토히스의 터닝슛은 버트 슬레이터 골키퍼가 잡기엔 너무 강했다.
그가 펀칭으로 쳐 낸 순간, 알베르토가 리바운드 볼을 잡아채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론 예이츠가 라인 밖으로 걷어 냈다.
‘제길, 좀 더 꺾었어야 했는데!’
준영은 아쉬워하던 토히스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아직 공격이 끝나지 않았으니 힘내라는 듯.
「리버풀 박스 안으로 양 팀 선수들이 잔뜩 몰려 있습니다. 과연 유나이티드가 이 기회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을지?」
기대와 염려가 양 팀 서포터들 사이를 오가는 가운데, 맨유의 코너킥이 리버풀 박스 안으로 날아들었다.
‘이번엔 반드시 넣는다!’
‘어림없다!’
토히스와 예이츠가 동시에 뛰어올랐다.
떨어지던 공을 바라보던 그들은 이내 큰 충격을 받았다.
‘어?’
속절없이 밀려 공과 함께 골대로 나뒹굴어진 두 장신 플레이어.
그들의 눈에 거대한 산처럼 우뚝 선 한 사람이 보였다.
***
론 예이츠는 1961년 리버풀로 이적해 왔을 때 바로 주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로도 10년간 리버풀의 주장을 맡았죠.
빌 섕클리 감독은 그를 처음 봤을 때, 그의 체격에 무척이나 감탄했다고 합니다.
덩치만큼이나 실제 몸싸움에서 지지 않았으며 상대 팀 공격수들은 그의 앞에 서면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다고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