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16. 새 시대의 주역들
“이 친구, 또 대단한 활약을 한 모양이군.”
김홍일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그가 보는 신문에는 웨스트햄전에서 페널티킥 골을 넣고 환호하는 준영의 모습이 커다랗게 실려 있었다.
“얼마 전엔 세계 대회에서 우승했다지? 인터… 뭐라고 하던 대회였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김홍일의 물음에 이번에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장준하가 바로 대답했다.
“인터콘티넨털 컵입니다, 각하. 구라파와 남미 최고 프로축구팀끼리 맞붙어 자웅을 겨루는 대회지요.”
“그래, 그런 큰 대회에 출전하다니……. 그 친구를 보면 대한 사람도 얼마든지 세계를 주름잡을 수 있단 희망이 든단 말이지.”
“그래서 국민들이 이준영을 다 좋아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장준하는 시사 잡지 사상계에서 집필을 맡을 때만 해도 이준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국민들의 우민화를 꾀하는 자유당 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
하지만 그가 이기붕에게 쓴소리를 해 대고,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모습을 보이자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4월 혁명 때 일부러 서울에 와서 계엄군의 마음을 돌려놓는 데 기여한 모습에 감동,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팬이 되었다.
“이번 올림픽에서 선수들이 선전한 것도 이준영이 지원해 준 덕분이라고 합니다.”
“그래, 시국이 어수선해서 선수들이 훈련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던가.”
레슬링에서 봉창원이 은메달을 땄고, 역도의 김해남과 마라톤의 이창훈도 동메달을 땄다.
축구는 비록 죽음의 조에서 탈락했지만, 개최국인 이탈리아와 비기고, 축구 종가 영국을 잡아 내면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덕분에 세계가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다시 보게 되었지만……. 스포츠만으로 끝나서는 안 돼. 학문과 산업, 경제 등 모든 분야를 지금보다 발전시켜 나가야 해.”
“물론입니다, 각하. 이대로 왜놈들에게 뒤처질 순 없으니 말입니다.”
한국 전쟁으로 경제 호황을 맞은 일본은 1964년 올림픽 개최권을 따내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일제의 핍박과 수탈에 시달린 한국 입장에선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장은 힘들어도 언젠간 추월할 수 있게 계속 쫓아가야지. 그래서 이번에 추진하고 있는 경제 개발 계획안이 중요해.”
부흥부, 아니 건설부로 이름을 바꾼 부처에서는 지난 자유당 정부에서 세운 경제 부흥 5개년 계획을 수정해서 새로운 개발안을 내놓았다.
민관군의 전문가들과 해외 학자들까지 참여해서 만든 이 새로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는 도로, 철도, 전기 등 산업 인프라 구축 및 확충이 핵심 목표로 잡혔다.
여기에 의무 교육과 농지 개량, 기초적인 중공업 육성, 수출 증대 계획들도 세워져 있었다.
“이게 공염불이 되지 않으려면 이준영이 그 친구가 말하는 식으로 추진력이 필요해.”
“예, 자금과 기술 확보가 제일 중요합니다.”
다행히 최근 영국 정부에서 자본과 기초 산업 기술 지원을 해 주겠단 뜻을 전해 왔다.
여기에 미국 정부를 설득해 차관 지원도 더 늘려 주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고맙긴 해도 도대체 영국이 뭘 보고 한국을 돕는지 의문스럽군.”
이것도 이준영 효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면서 이준영이 처칠이나 영국 여왕과 친분이 있음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김홍일이 볼 때 그건 너무 지나쳐 보였다.
아무리 축구 선수의 활약이 예뻐 보였다 한들, 그 때문에 그의 고국까지 돌봐 주겠는가.
그것도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나라를 말이다.
“우리가 자유 진영의 최전선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해도 영국이라면 구라파 쪽에 더 신경을 쓰겠지. 분명 뭔가 노리는 게 있을 텐데……. 이봐, 장 실장, 국내 자원 중에 국제 경쟁력이 있는 게 있나?”
“예, 중석이 있습니다. 일제 때 개발이 되었는데, 중국산에 밀려 주춤했다가 최근 다시 각광을 받고 있지요.”
중석, 텅스텐은 총포를 비롯한 각종 무기 생산에서 빠질 수 없는 전략 자원.
중국이 공산화되는 바람에 한국의 텅스텐이 자유 진영의 주요 젖줄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현재 한국 수출의 절반 이상을 텅스텐이 책임지고 있을 정도였다.
“관리를 잘해야겠군. 안 그래도 자원이 없는 나라인데, 있는 것도 엉뚱한 데로 새 나가면 곤란하니까.”
“돈이 되는 것에는 파리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니까요.”
김홍일은 대한중석을 비롯한 국영 기업들에 대해 다시 점검해 보기로 했다.
멀리 해외에서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고 있는 청년에게 부응하지 못하면 면목이 없게 될 테니까.
***
“최근에 정부에서 한국 지원을 결정지은 게 자네와 연관 있나?”
서재에서 함께 차를 마시다가 건넨 알버트의 물음에 준영은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없을 수 없죠. 하지만 그들도 노림수가 따로 있는 모양이더군요.”
세간에선 영연방 국가들을 제쳐 놓고, 한국에 지원하는 것을 두고 여러 가지 말이 나오고 있었다.
몇몇 언론에서는 최근 북해 유전 개발로 한몫을 챙긴 이준영이 영국 정부에 로비한 게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 수뇌들을 움직인 건 돈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정보였다.
“제가 미래에서 가져온 자동차와 모바일 기기를 살펴보고 좀 충격을 받은 모양이더라고요.”
“그렇겠지. 미래 시대에 첨단 기술은 물론, 제조업에서도 독일과 일본에 뒤처진다는 걸 알게 되었을 테니까.”
단순한 조작이나 허무맹랑한 거짓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후 독일은 라인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경제 부흥을 하고 있었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라, 라디오나 자동차 시장에서 저가 제품들을 내세우며 세계 시장을 야금야금 잠식해 나가는 중이다.
“하긴, 국력을 소모해 쓰러트린 두 전범국이 연합 왕국을 넘어서는 상황을 좋게 볼 수 없을 테지.”
“예. 문제는 첨단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해도, 국내 인건비 상승을 꺾기 힘들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인건비가 저렴하고, 성장 잠재력이 있는 국가에 투자하는 것.
그럼 수익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가 공세로 부를 쌓는 경쟁국의 발목을 잡아 놓을 수 있다.
“경공업 쪽 투자에서는 이미 저나 조셉이 꽤 성과를 올렸으니까요.”
“기업인들이나 투자자들 입장에서도 구미가 당길 만해졌다는 거군.”
리스크가 크면 투자에 주저하기 마련이지만, 이미 누군가가 개척해 득을 봤다면 달라지기 마련.
북해 유전만 해도 그랬다.
예상보다 전망이 훨씬 좋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뒤늦게 투자가 쇄도하고 있었다.
덕분에 석유 재벌이 되겠다는 준영의 꿈이 이뤄질 시기도 보다 앞당겨지는 중이었다.
“아무튼 한국의 경제 개발이 빨라진다면 자네 입장에도 좋겠군. 리즈에게 들으니 미래에 아주 수익이 좋은 땅들을 사 뒀다면서?”
“네, 강남은 미래 한국인들에게 있어 꿈과 동경의 땅이니까요.”
“바뀐 역사에서도 꼭 그리되었으면 좋겠군. 자네나 자네의 아이들, 내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알버트의 말에 준영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때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여겨지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지만, 저 너머까지 뚜렷하게 보이는 느낌이었다.
***
11월의 첫 번째 토요일.
날씨가 점차 쌀쌀해지고 있었지만, 올드 트래퍼드의 열기는 용광로만큼이나 뜨거웠다.
“Glory United!”
“You’ll Never Walk Alone!”
시작 전부터 양 팀 서포터들의 응원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 와중에 신경전까지 있었다.
콥스가 맨유의 레플리카를 불태우자, 맨유의 서포터 12번째 전사들도 솜 인형으로 만든 리버 버드의 목에 줄을 걸어 막대 끝에 내걸고 흔들어 댔다.
기자들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한쪽은 화형, 한쪽은 교수형이라…….”
“너무 지나친 거 아냐?”
“반드시 상대를 이겨야 하는 상황이니까.”
현재 단독 1위는 토트넘 핫스퍼.
그 뒤를 맨유와 리버풀이 공동 2위로 맹추격하고 있었다.
당연히 오늘 경기는 우승 레이스에 있어 매우 중요했다.
“사이좋게 둘 다 비겼으면 좋겠군요.”
“솔직히 말해 봐. 너 토트넘 팬, 스퍼드지?”
“스퍼드가 아니라 스퍼스예요!”
기자들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양 팀 선수들이 필드로 입장했다.
TV 중계 카메라가 양 팀 선수들의 모습을 비췄다.
리버풀의 펠레, 로저 헌트, 이안 캘러헌.
맨유의 이준영, 던컨 에드워즈, 바비 찰튼.
기존 주전들 외에 올 시즌 양 팀이 새로 영입한 선수들도 주목을 받았다.
리버풀이 야심차게 영입한 공격수 이안 세인트 존과 센터백 론 예이츠.
섕클리가 스코틀랜드에서 데려온 이 패기 넘치는 젊은 선수들은 10월 말 울버햄프턴 원정과 볼튼전에서 4-1, 2-0 승리를 거두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버스비 감독과 머피 코치도 그 두 선수를 주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일전에 존이 추천한 선수들이 다 리버풀로 가서 활약할 줄이야…….”
“하지만 우리도 그에 못지않은 선수들이 있지요.”
“그래, 맞아.”
중계 카메라는 지난달 맨유에 합류한 두 선수를 비췄다.
페냐롤에서 임대한 알베르토 스펜서와 포르투갈의 장신 공격수 주제 토히스.
이 두 선수를 바라보는 섕클리 감독은 연방 투덜댔다.
“정말이지, 잘도 저런 괴물들을 데려왔군!”
알베르토는 12라운드 뉴캐슬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충격적인 데뷔를 했다.
그다음 경기에 데뷔한 주제 토히스도 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이 진가를 발휘한 건 10월 29일 아스날 원정.
이들 콤비는 다섯 골을 합작하며 맨유에 대승을 안겨 주었다.
아직 영국 무대에 제대로 적응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활약을 보여 준 것이다!
‘어려운 경기가 되겠지만, 우린 지지 않아. 우린 왕좌에 오를 팀이니까.’
이런 자신감은 섕클리 감독뿐만 아니라, 리버풀 선수들에게도 가득 차 있었다.
특히 펠레의 경우 자신감뿐만 아니라 앙심도 남아 있었다.
‘지난 시즌 우승을 했지만, 유나이티드를 꺾진 못했어.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고 우쭐대는 저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 주리라!
펠레가 각오를 다지고 있는 사이, 경기 시작 휘슬이 울렸다.
「15라운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대 리버풀의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시작부터 리버풀 선수들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중계 캐스터가 부지런히 혀를 놀리는 가운데, 리버풀은 신예 공격수 이안 세인트 존을 앞세워 맨유 진영을 파고들어 갔다.
상당히 영리하게 공을 다룰 줄 아는 St. 존은 선수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며 전진했다.
펠레가 맨유 수비수들의 시선을 잔뜩 끌어내는 가운데, 로저 헌트가 조용히 배후로 들어갔다.
이에 St. 존은 로저 쪽으로 공을 보냈다.
다들 펠레에 시선이 쏠려 있었기에, 그야말로 허를 찌르는 패스였다.
하지만 로저가 패스를 받기 직전 준영이 냉큼 끊어 냈다.
마치 로저에게 패스해 줄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
이안 세인트 존은 1961년부터 약 10년간 리버풀에서 뛰며 붉은 제국 리버풀의 토대를 쌓은 공신입니다.
체격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무척 영리하게 공을 찼고, 헤딩 능력도 굉장히 뛰어났다고 합니다. 로저 헌트와 찰떡 콤비로도 유명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