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14화 (314/400)

Round 314. 줄행랑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준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소란을 일으킨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잔뜩 화가 나서 씩씩대는 레논과 일본 마녀 오노 요코.

‘아니, 왜 저 여자가 여기에 있어?’

설마 앙리가 데려왔을 거라고는, 그리고 우승 축하 파티에 찾아왔을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까.

거기다 레논하고도 만나다니!

그런데 현재 벌어진 상황은 우려했던 것과 영 딴판이었다.

“레논, 어떻게 된 일이야?”

준영의 물음에 레논은 울먹울먹하는 요코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저 여자가 주장을 욕했어요. 터무니없는 모함이나 하고…….”

“그렇다고 다짜고짜 남의 여자를 때리면 어떡하나.”

앙리가 눈살을 찌푸리자, 레논은 불만스럽게 이죽거렸다.

“때리지 않았어요. 따귀를 한 대 날린 것뿐이라고요.”

‘그게 그거지, 이놈아. 죽빵 안 꽂은 게 자랑이냐.’

준영은 자칫 곤란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버릇없는 여자는 맞아도 싸다는 게 이 시절 사람들의 관념이긴 해도, 공공장소에서 손찌검을 하는 건 도가 지나친 일이니까.

그러므로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수습해야 했다.

“레논, 당장 사과드려.”

“못해요! 오히려 저 여자가 먼저 주장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요!”

“누가 저 여자에게 사과하래? 여기 앙리에게 사과해. 아무리 화가 나도 남의 파트너에게 함부로 손찌검을 하는 건 옳지 않다고.”

그 말에 레논도 흥분을 좀 가라앉히며 앙리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결례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래, 나도 미리 만류하지 못한 걸 사과하지. 설마 예술을 한다는 사람이 마구잡이로 폭언을 내뱉을 줄은…….”

요코를 흘겨보았던 앙리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 BB도 그렇고, 어째 자신의 애인들은 이 모양인 건지.

더구나 벌써 두 번이나 존 Y. 리에게 무례를 범하고 말았다.

‘윌리엄 말대로 나는 여자 보는 눈이 정말 없는지도…….’

앙리가 씁쓸해하고 있을 때, 요코가 자리에서 일어나 짜증을 부렸다.

“앙리, 왜 사과를 하는 거죠? 내가 무슨 폭언을 했단 거예요? 난 내가 겪은 일을 말했을 뿐인데!”

“그렇다 해도 방식은 옳지 않았어. 남의 감정을 상하게 만든 건 사실이잖아.”

“뭐라고요? 하! 이래서 남자들이란……! 죄다 하나같이 자기들 멋대로고 폭력적이야!”

분통을 터트리는 요코를 앙리가 한심하다는 투로 바라보았다.

“그러는 지금 당신 언행은? 당신도 멋대로고 폭력적인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말을! 당신은 내 애인이잖아요! 왜 내 편을 들어 주지 않죠?”

“애인이니 당신 대신 사과를 한 거야. 무슈 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삐뚤어진 이복동생을 바른길로 인도해 준 친절한 사람.

앙리에게 준영은 그런 고마운 은인이었다.

결국 아무도 자신을 편들어 주지 않는다는 걸 안 요코는 부들부들하며 흉하게 인상을 쓰다가 파티장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앙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무슈 리, 자네의 충고를 더 뼛속까지 새길 걸 그랬어.”

“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힘내라고.”

“고마워.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

힘없이 어깨를 떨군 채 발걸음을 돌리는 앙리.

준영은 그가 부디 바람둥이 기질을 고쳐 착한 아가씨를 만나 행복하기를 빌었다.

별난 구석이 있긴 해도, 터너 신부님처럼 선량한 사람이었으니까.

***

요코는 앙심이 남았는지 이후에도 뒤끝이 작렬했다.

언론사를 찾아가서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있었던 준영의 만행(?)을 고발한 것.

여기에 싸잡아서 레논에게도 비난을 퍼부었다.

“이거 진짜야? 캡틴 리가 기타를 부수고 여자에게 욕을 했다던데 말이야.”

“바보야, 타블로이드에 올라온 걸 믿냐?”

“이런 건 뻔하다고. 유명인의 명성에 흠집을 내서 튀어 보려는 수작이지.”

“기타를 부술 정도면 노래를 어지간히도 못 불렀나 보네.”

“존 Y. 리는 한국 사람이잖아. 한국인들은 일본인을 싫어한다니, 그래서 그랬던 거 아니야?”

다소 시끄럽긴 해도 요코가 기대한 대로 여론이 흘러가지는 않았다.

더구나 곧바로 반격이 들어왔다.

“요코, 미국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앙리가 호텔방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더니 이렇게 권유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구단에서 명예 훼손 혐의로 당신을 고발할 건가 봐.”

이미 맨유 구단은 축하 파티 때 벌어진 일에 대해서 해명했다.

여기에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클럽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트린 요코에 대해서도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흥, 아주 뻔뻔하군요.”

“그쪽은 당시 상황을 촬영한 무비 카메라 필름이 있다던데? 해당 클럽의 기타리스트도 영국으로 불러와서 증명하게 할 거라고 하고.”

앙리의 말에 태연하던 요코도 낯빛이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반응에서 앙리는 법정에 섰다간 보나 마나 필패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유나이티드의 회장 헤롤드 하드먼은 법조인 출신이야. 실력 있는 변호사들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더군. 존 Y. 리 역시 런던에서 유명한 법률 사무소와 계약이 되어 있다고 하고.”

“그러니까 승산이 없다는 건가요?”

앙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솔직히 별로 도와주고 싶지도 않지만.

그래도 애인으로 삼아 영국으로 데려왔으니, 책임을 지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비행기를 예약해 뒀어. 돌아갈지, 아니면 남아서 법정에서 싸울지 당신이 선택해.”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한 앙리의 말에 요코는 한숨을 쉬었다.

“돌아가겠어요.”

“그래, 공항까지 바래다주지.”

“필요 없어요. 택시를 타면 되니까.”

다음 날, 짐을 꾸린 요코는 영국을 떠났다.

그렇게 그녀가 줄행랑을 치면서 시끄러웠던 루머는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

“요코 이 여자, 결국 빤스런을 해 버렸군.”

저택 서재에서 신문을 본 준영은 코웃음을 쳤다.

앤지는 못마땅한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여자는 아주 호된 꼴을 당했어야 했는데.”

비틀즈를 찢어 놓은 마녀.

원래 레논뿐만 아니라 폴 매카트니에게도 찝쩍거렸다는 이야기를 준영에게 전해 들은 앤지는 이런 마무리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준영의 생각은 달랐다.

“이 정도가 좋다고 생각해. 너무 몰아붙여서 순교자 비슷한 게 되어 버리면 피곤하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옛날에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만 봐도 그러니까.”

준영에게 동의한 리즈는 과거 프랑스 혁명을 부채질했던 사기 사건을 들먹였다.

그에 대해선 앤지도 알고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필적을 위조해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빼돌린 여자가 저지른 사건 말이지?”

“그래, 그 사건으로 목걸이를 사지도 않은 앙투아네트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지. 사기꾼인 잔은 중상모략을 일삼으면서 대중으로부터 추앙받았고.”

“하지만 형부나 유나이티드 구단은 앙투아네트나 부르봉 왕실만큼 평판이 나쁘진 않잖아.”

“그렇지. 하지만 어디나 질투나 시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유명인들이 곤란을 겪는 걸 재미있어하는 이들도 있으니까.”

“하여튼……. 그 여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노크와 함께 서재로 고용인이 들어와 준영에게 세 통의 서신들을 전하고 갔다.

“런던에서 온 거군.”

“누가 보낸 거예요? 혹시 그 정보부에 있다는 사람?”

“응, 번즈 씨가 보내 준 것도 있고, 사업하고 관련해서 온 것들도 있네.”

준영은 일단 사업 쪽 관련 편지들을 살펴보았다.

하나는 경기장 A보드 광고판 계약 업무를 맡은 부서에서 보낸 것이었다.

내용을 보니 하반기 들어 광고 계약을 맺은 업체들의 수익이 대폭 상승했고, 그로 인해 계약 요청이 폭증하고 있다고 했다.

“일전에 준이 말한 대로 TV 중계 덕분이죠?”

“응, 보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었으니까……. 근데 생각보다 요청 업체들이 많은 모양이군. 광고판 개량도 슬슬 준비해 둬야겠어.”

21세기에서 사용하는 LED 보드는 현재 기술로는 불가능하겠지만, 롤링 광고판 정도는 개발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롤링 광고판?”

“광고를 인쇄한 천이 일정 시간에 따라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지. 더 많은 광고를 실을 수 있지만, 고정식보다 구조가 복잡하니까 비용이 적잖게 들겠지.”

어떻게 싸고 효율적인 구조를 가진 광고판을 만들어 봐야 할 것 같았다.

“음, 이건 북해 유전 개발 건과 관련된 거로군.”

상업 시추를 시작한 스코틀랜드 모레이만의 플랜트에서는 매일 약 8,000톤의 석유가 생산되고 있었다.

이에 고무된 영국 정부와 로열 더치 쉘은 유전 탐사 지역을 북해 중앙부와 셰틀랜드 제도 부근까지 넓혔다고 한다.

그리고 새로운 유전 탐사를 위해 노르웨이 정부와 논의를 하고 있다고.

“노르웨이 쪽에 쓸 만한 유전들이 많은 것 같다나 봐.”

“노르웨이에서 허락해 줄까요? 자신들이 독자적으로 개발하겠다고 하면…….”

“그건 힘들 거야. 노르웨이는 기술이나 자본이 부족하니까.”

이 시대 노르웨이는 청어, 대구 등을 잡아 수출하는 어업 국가였다.

기술력에서는 영국을, 그리고 자본에서는 네덜란드에 미치지 못했다.

해저 유전을 개발하고 해양 플랜트를 구축할 기반이 부족했던 것이다.

“아무튼 석유 재벌 구단주가 되겠다는 형부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고 있다는 거지?”

“그래, 아마 몇 년 안에 유전 쪽에서 거두는 수입이 식품이나 의류를 뛰어넘게 될지도?”

“그럼 폴에게도 해양 플랜트 쪽에 투자해 보라고 해야겠네.”

벌써부터 챙겨 줄 생각을 하다니.

약간 어이가 없었지만, 딱히 만류하거나 안 된다고 막아설 생각은 없었다.

준영도 주식과 관련해서 동료 선수들에게 투자를 권유하기도 했고, 친분 있는 사업가들을 끌어들이기도 했으니까.

아무튼 사업 쪽 서신들을 모두 살펴본 그는 MI6의 제이미 번즈가 보낸 편지를 보았다.

편지에는 여러 장의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인가요?”

“그런 것 같아. 로마 콜로세움을 찍은 걸 보니 확실하군.”

올림픽 경기들을 찍은 사진도 있었다.

편지 내용을 봐도 평범한 관광객이 올림픽 관람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냥 휴가 차 이탈리아 관광을 간 건 아닌 것 같은데…….’

꼼꼼하게 편지를 살펴보던 준영은 다른 부분보다 살짝 굵은 펜으로 적혀진 내용에 주목했다.

<여기서 아주 반가운 사람도 만났습니다. 창고 업체에서 일하는 이웃사촌인데, 하얀 담장으로 둘러싸인 아주 고풍스러운 저택에 살고 있죠. 영국에 돌아가면 존에게도 소개시켜 주고 싶군요.>

‘창고 업체… 하얀 담장…….’

은근슬쩍 묻어 있는 힌트 덕분에 준영은 번즈가 말하는 이웃사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 소개시켜 준다고 하면 만나야지.’

진짜 꼭 한번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기왕이면 말이 아닌 주먹으로.

***

맨유의 헤롤드 하드먼 회장은 젊은 시절 블랙풀, 에버튼 등에서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나중에 맨유의 감독을 지내기도 하고 회장도 되었지만, 실제 맨유에서 뛴 경기는 4경기뿐이라고 합니다.

한편으로 세미프로라서, 1908년 하계 올림픽 영국 대표팀 선수로도 출전하고 법률도 공부해서 변호사 자격증도 따고 그랬다고 하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