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13. 악연
“잘 봐 두렴, 이드송. 이게 내년 이맘때 우리가 들어야 할 우승컵이다.”
“트로피가 좀 더 멋있게 생겼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펠레의 말을 들은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사실 자신도 트로피가 너무 단순하게 생기지 않았나 생각했었기 때문.
명색이 세계 최강의 축구 클럽에게 수여하는 우승컵인데 좀 더 그럴듯하게 만들면 좀 좋은가.
더구나 브라이언 클러프나 짐 박스터 등 몇몇 선수들은 술을 부어 마실 수 없는 트로피라며 투덜대기도 했다.
“뭘 웃은 거지? 우리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고 여기는 거야?”
준영이 웃는 걸 봤는지, 펠레가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준영은 오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터무니없을 리가 있나. 리버풀은 세계 정상에 오를 충분한 역량을 가진 팀인걸. 너도 있고, 여기 섕클리 감독님도 계시니까.”
그 말에 펠레의 표정이 금세 풀어졌다.
그러나 섕클리는 준영의 말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 녀석, 역량을 가졌다곤 말해도 우승할 수 있단 말은 하지 않는군.’
우승 후보가 반드시 우승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준영의 말을 미루어 볼 때 내년에 리버풀이 이 우승컵을 들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존, 너는 내년에도 유나이티드가 이 우승컵을 들 거라 생각하는 거냐?”
“고기도 씹어 본 사람이 맛을 안다는 속담이 있거든요. 올해 정상에 올라가 본 경험이 있으니, 내년 우승 레이스도 좀 더 유리할 거라고 봅니다.”
“경험이라……. 확실히 그건 중요하지.”
섕클리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리버풀은 그런 경험에서 부족하다.
지난 시즌 리그 챔피언으로 이번에 처음 유러피언 컵에 참여하는 거니까.
더구나 국제 경기 경험도 펠레나 알란 아코트 같은 몇몇 선수를 제외하면 일천했다.
‘무엇보다 해외 팀들에 대한 정보가 적어. 원정에 신경 써야 할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서도.’
울버햄프턴이 그런 점에서 소홀했다가 두 번의 유러피언 컵에서 고배를 마셨다.
철저히 준비하고 정보를 모아야 한다는 건 펠레 역시 인식하고 있었다.
“이봐, 캡틴 리. 이번 시즌 유러피언 컵 출전 팀들에 대한 정보를 조사했으면 우리에게도 좀 알려 줘.”
“공짜로?”
“공짜는 아니야. 우리가 준결승이나 결승에 올라가면 너희도 편할 거잖아. 피곤하게 멀리 원정 갈 필요도 없다고.”
뻔뻔하면서도 음흉한 펠레의 발언에 준영은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이동 거리가 짧으면 좋긴 하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맨유에게만 유리하겠는가.
펠레가 내민 조건으로는 거래할 수 없었다.
“섕클리 감독님, 올 시즌 퍼스트 디비전 팀들에 대해 조사한 거 있으시죠?”
“그래. 근데 그건 너희도 있지 않나?”
“정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죠. 교차 검증도 할 수 있고, 우리가 놓친 부분도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하긴 그렇구나. 그러니 그 정보랑 유러피언 컵 출전 팀 정보를 바꾸자 이거군.”
“예, 일단 버스비 감독님이나 머피 코치님과 상의를 하고 최종적으로 결정할 거지만…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보는데, 어떠세요?”
준영의 말에 섕클리는 냉큼 수락했다.
아직 대외 정보 수집 능력이 부족한 리버풀 입장에선 이 거래가 최선이라고 보았으므로.
“기왕이면 정상에서 만났으면 좋겠구나.”
“저도요.”
붉은 악마와 붉은 제국.
앞으로 60년대 내내 자웅을 겨룰 양 팀의 주장과 감독이 우승 트로피 앞에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
축하 파티에는 음악이 빠질 수 없는 법.
맨유에는 이런 파티 때 사실상 전속으로 나서 주는 밴드가 있었다.
바로 비틀즈.
현재 영국 전역에서 인기가 급부상하고 있는 그들은 오늘도 빠지지 않고 찾아와 축하곡을 불러 주었다.
‘위 아 더 챔피언이라…….’
준영은 존 레논이 이번에 작사, 작곡한 곡에 귀를 기울였다.
혹시 후대에 퀸이 부른 노래와 같지 않을까?
그리 생각했지만 레논이 지은 노래는 제목만 같고 멜로디나 가사는 완전히 달랐다.
‘그래도 이것도 퀸의 노래 못지않게 근사하군.’
가사는 뜻하지 않은 절망에서 박차고 일어난 사나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 사나이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그렇기에 노래가 끝나자 다들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그런 모두를 보며 미소 지은 레논이 말했다.
“세계 정상에 오르기까지 구슬땀을 흘린 동료들과 코칭스태프, 그리고 올드 트래퍼드의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다들 정말 자랑스러운 일을 해냈어요!”
연회장에 다시 한번 환호성이 울렸다.
그 환호성이 가라앉자, 레논이 마저 말을 이어 갔다.
“작게나마 제가 이 위대한 팀의 행보에 한몫했다는 사실은 평생의 긍지가 될 겁니다.”
“작지 않아!”
“너도 잘했어, 레논!”
동료들의 칭찬에 레논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다들 고마워요. 그리고 항상 보살펴 주고 이끌어 준 주장… 정말 감사해요. 주장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전 없었을 겁니다.”
레논의 말에 준영은 별말을 다 한다는 투로 손을 내저었다.
“됐으니까 노래나 불러.”
“네, 그럼 바로 다음 곡 부를게요. 이번 곡의 제목은 ‘Hero’입니다.”
레논과 비틀즈 멤버들은 바로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머나먼 동쪽에서 찾아온 낯선 이방인.
모두가 의심하고 경멸하는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도왔다.
그리고 혹독한 시련을, 험난한 모험을 이겨 내며 불멸의 영광을 쟁취했다.
이 같은 내용의 노래를 들은 준영은 쑥스러운 기색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훗, 가사에 나온 영웅은 우리 기사님을 말하는 것 같네요.”
곁에 다가온 리즈가 못을 박아 버리자, 준영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레논 저 자식, 사람 낯간지럽게 만들다니…….”
“준이 그렇게 만든 거잖아요.”
리즈는 일전에 준영의 스마트폰을 통해 레논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음악 파일의 이미지로 붙어 있던 그 사진은 미래, 아니 준영이 살았던 세계의 존 레논이었다.
그 흑백 사진 속의 존 레논은 어딘가 그늘지고 시니컬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레논은 무척 밝고 유쾌해 보였다.
“그런데 가사에는 우리 기사님이 아가씨들에게 인기 많다는 내용은 없네요.”
“리즈, 그건 말이지…….”
“후후후, 알아요. 준이 일부러 꼬시지 않았다는 거.”
경기장에서 준영에게 여자들이 엉겨 붙은 상황을 보고 울컥 화가 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준영이 아니라 그에게 달려든 여자들이 못마땅했던 거였다.
준영이라는 사람 자체보다 그가 누리고 있는 인기나 지위, 재산을 보고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우리 기사님은 그런 여자들보다 저를 더 사랑하는 걸 믿으니까. 이런 제 믿음이 틀리지 않은 거죠?”
“물론입니다, 여왕님.”
절대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준영은 다짐하기라도 하듯, 리즈를 안고 키스해 주었다.
***
축하곡을 부르고 물러난 레논과 비틀즈 멤버들에게로 기자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현재 인기 급상승 중인 밴드와 준영의 관계가 무척이나 궁금했던지 연방 질문을 건넸다.
“미스터 레논, 캡틴 리와 어떻게 친분을 쌓게 된 건가요?”
“일설에는 쿼리멘 시절부터 존 Y. 리에게 음악을 배우거나 곡을 받기도 했다던데요?”
“레논 씨, 밴드 활동이 많아지면 선수 활동을 하기 힘들어질 텐데, 이 점을 버스비 감독이나 캡틴 리와 상의한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쏟아지는 질문에 대해서 레논은 차근차근 대답하고 해명해 주었다.
일일이 질문에 응하는 건 피곤했지만, 그렇다고 건성으로 넘겼다간 주장에게 자칫 폐를 끼칠 수 있으니까.
“휴, 인기가 많다는 것도 결코 좋은 게 아니군.”
“그러게. 온갖 사람들이 다 달려드니까.”
“행동거지도 조심해야 하고 말이지.”
한바탕 인터뷰를 마친 비틀즈가 칵테일을 마시며 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웬 귀티 나는 청년과 긴 머리의 동양인 여성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이제야 짬이 좀 생기는군. 자네들이 비틀즈라는 밴드가 맞지?”
“그렇습니다만, 뉘신지?”
레논의 물음에 청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앙리 드 보그라고 해. 존 Y. 리와 친분이 있지. 우리 부친께서 그의 사업에 투자하고 계시거든.”
“아, 그렇습니까?”
부잣집 도련님인 모양이구나.
대충 대화를 나누고 말자고 하려는 때, 앙리가 옆에 있는 여자를 소개했다.
“자네들이 음악을 한다고 해서 소개해 주고 싶더군. 뉴욕에서 예술가와 음악가로 활동하는 미스 오노라네.”
“오노 요코예요.”
요코의 인사에 레논은 뭔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서 그럴까, 어쩐지 낯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던 것.
더구나 신비한 느낌의 동양 여성이다 보니, 뭔가 호기심도 들었다.
“반갑습니다, 미스 오노. 비틀즈의 보컬을 맡고 있는 존 레논입니다. 이쪽은 폴 매카트니고, 조지 해리슨,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레논은 밴드 멤버들을 차례로 요코에게 소개해 주었다.
요코는 입 끝이 귀밑까지 찢어지는 걸 겨우 참았다.
비틀즈라면 최근에 영국에서 매우 핫한 밴드가 아닌가.
더구나 호색하고 능글맞은 프랑스 귀족 도련님보다 파릇파릇한 록밴드 아이돌들이 나아 보였다.
“영국에 와서 여러분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대중적인 음악을 하면서도 새로운 장르의 곡을 만드는 데도 능하다면서요?”
“네, 뭐… 능하다고 할 정도는 아닌데, 밴드 활동 말고 다른 활동을 하면서 얻은 배움이나 경험들이 새로운 노래를 작곡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더군요.”
레논이 축구 선수로 활동을 하고 있다면, 스튜어트는 그림과 디자인 쪽의 공부를 하고 있었다.
폴은 요새 톨킨 작가의 팬인 여친 때문인지, 소설을 보거나 직접 글을 쓰기도 했다.
“기자분들에게도 말했지만, 특히 주장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리준욘, 아니 존 Y. 리에게서요?”
“네, 미스 오노도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주장은 단순한 축구 선수가 아니거든요. 안목도 높고 아는 것도 많아요. 음악적인 감각도 뛰어나고요.”
“그래요?”
준영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요코는 바로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레논은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나 당황했다.
그런 그에게 요코가 말했다.
“확실히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죠. 하지만 인성은 그렇지 않은 듯하더군요.”
“예? 그게 무슨 말이죠?”
“남의 여자를 뺏은 사람이잖아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다들 눈이 휘둥그렇게 된 상황에서 요코는 앙리에게 눈길을 돌렸다.
“앙리, 당신이 그랬잖아요. 마음에 두고 있던 아가씨를 존 Y. 리에게 뺏겼다고 말이죠.”
“그거? 리즈를 말하는 거면 뺏겼다기보다 내가 방관한 사이에 둘이 눈이 맞았다고나 할까.”
“그게 뺏긴 거지 뭐예요. 더구나 그 남자 말인데, 신사인 척하면서 어찌나 난폭하고 음흉스럽던지…….”
그러면서 요코는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있었던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 가공해서 떠벌렸다.
연주를 이상하게 해서 자신을 당황시켰다는 둥, 기타를 부숴서 자신을 위협하고, 경멸했다는 둥.
그 이야기를 듣고 레논의 눈빛이 싹 달라졌다.
“그럴 리 없어요. 주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그건 당신이 존 Y. 리라는 사람을 잘 몰라서 그래요. 정체도 불분명하고, 아주 속이 시커먼 인간쓰레기…….”
짜악-!
살갗이 찢어지는 소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사람들의 눈에 뺨을 잡고 쓰러진 요코와 분노로 얼굴을 붉힌 레논의 모습이 들어왔다.
“주장 욕하지 마! 네까짓 게 알면 얼마나 안다고!”
원래는 불륜으로 인연을 맺은 커플.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달라진 역사는 그들의 관계를 악연으로 만들었다.
***
인터콘티넨털 컵 우승 트로피는 저렇게 생겼습니다.
저 모양이 도요타 컵으로 바뀐 시절에도 바뀌지 않고 21세기까지 유지되다가 클럽 월드컵 출범 이후 보다 세련된 디자인으로 바뀌었지요.